1519화. 사슬을 깨다
*
보름 후, 오몽도는 모든 조각상들을 허물고 새로운 조각상을 세웠다. 이전보다 더 많은 수량이었다. 새로운 조각상은 이전 조신과 생김새가 약간 비슷했지만 낙몽이 아닌 한립을 닮아 있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한립 조각상 아래로 수많은 섬 주민들이 몰려들어 웅얼웅얼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오몽도 밤하늘에 콰릉! 하고 은빛이 번쩍거리며 떨어졌다. 마치 은하수가 하늘에서 섬의 사합원으로 흘러드는 듯 했다.
사합원 사방에 꽂힌 8개의 은색 깃발이 짙은 은색 안개로 모든 것을 가렸다.
푸른 의복을 걸친 한립은 정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기화신과 마주 보고 있었다.
“시작하지.”
눈을 감은 한립은 의식을 단전으로 집중했다. 단전 안에는 금색 소인이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소인을 휘감고 반짝거리고 있는 수정빛은 그가 검은 사슬을 가려두기 위해 남겨둔 의식의 힘이었다.
팟.
수정빛이 물처럼 흘러 그의 의식세계로 돌아가고, 원영 표면에 9개의 시꺼먼 사슬이 떠올라 검은 안개를 일으켰다.
별빛으로 번쩍거리는 사합원 안에서 한립은 배와 가슴에 일곱개의 남색 빛덩이를 불러냈다.
맞은편에 앉은 지기화신도 수결을 맺은 채 그의 단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동시에 단전이 뜨끈해진 한립은 따뜻하고 충만한 법력이 체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성광지력이 변한 은색 실도 그의 사지와 온몸의 경맥을 쾌속으로 돌았다.
수결을 맺은 한립의 단전에서 두 개의 힘이 평화롭게 만나 은색 빛의 실을 이루어 원영으로 날아갔다. 이전에 시도했을 때보다 은색 빛의 실의 수량은 백 배가 넘었고 그 기운도 굉장했다.
한립에게서 희미하게 법칙의 힘이 느껴졌다.
콰르릉!
단전에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은색 실들이 전장을 누비는 기마병처럼 새까만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칙! 파치칙!
검은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사슬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조급히 빛의 실을 나눠서 모든 사슬을 노리지 않고 단 하나만을 공략했다.
치지지직!
뜨겁게 달군 쇠를 물통에 집어넣은 것처럼 새까만 사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빛이 줄어들었다. 이와 동시에 깨알 같은 검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소모된 검은 빛을 채우려 들었다.
은색 빛의 실도 법칙의 힘을 지닌 물빛을 머금고 있어 검은 주술문자가 사슬을 회복하는 속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느렸다.
한립은 흡족하게 연신술을 운용했다. 왕성한 의식의 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정실을 뽑아내 단전으로 진입했다.
한립의 조종에 수정실은 얽히고설켜 커다란 도끼로 변해 검은빛이 어둑해진 사슬을 찍었다.
은색 실들이 기마병들이라면 도끼는 중무장한 보병이었다. 기마병들이 기습으로 뚫어 놓은 약점에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보병.
챙!
날카로운 충돌음과 함께 수정 도끼가 튕겨나갔다. 엄청난 진동이 한립의 단전을 타고 그의 의식세계까지 울려 극통이 느껴졌다.
한립은 단전 내의 사슬에 신경 쓰느라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도끼로 찍힌 사슬에 분명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 방법이 옳다는 확신이 생기자 고통을 참으며 연속해서 도끼로 사슬을 찍었다.
챙! 챙! 챙!
한 번, 두 번, 세 번…….
도끼가 7번 정도 찍었을 때 새까만 사슬이 투두둑 부러져 검은 수정빛이 되었다. 수정빛은 흩어지지 않고 나머지 8개의 사슬로 흘러들어가 융합되었다.
이전보다 밝게 빛나는 남은 사슬들은 더 많은 주술문자들을 내뿜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허탈하게 웃었다.
사슬을 하나씩 절단할 때마다 다른 사슬들로 그 힘이 흡수된다면 뒤로 가면 갈수록 남은 사슬들이 강해진다는 소리였다.
* * *
흑풍해역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사막 대전 안.
한립이 원영을 구속한 사슬을 깨트리자,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비쩍 마른 사내가 갑자기 혼탁한 눈을 떴다.
웅! 웅! 웅! 웅!
대전을 가득 채운 검은 사슬이 거위 털처럼 가볍게 떠올라 울부짖고 있었다. 침음하던 그는 냉소를 흘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눈을 감았다.
이에 모든 사슬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 * *
오몽도 사합원.
한립은 은색 빛 실들을 두 번째 검은 사슬로 향하게 했다. 이때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첫 번째 사슬을 깨트렸을 때 뭔가 무서운 존재를 건드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번처럼 단전에 또 다른 검은 사슬이 나타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의식을 두 번째 사슬로 돌렸다.
법력과 성광의 힘이 응결된 은색 실들이 빠르게 두 번째 사슬을 타고 올라가 치지직, 검은 연기를 일으켰다.
첫 번째 사슬보다 검은 빛이 어둑해지는 속도가 확실히 느렸고, 은색 빛의 실이 소모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 * *
며칠 뒤, 한밤중.
콰앙!
사합원 안에서 은색 빛기둥이 은빛으로 흩어졌다. 한립은 천천히 눈을 뜨고 맞은편의 지기화신을 피로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며칠간 끈질기게 검은 주술문자를 제거한 후, 마지막으로 수십 번의 도끼질로 두 번째 사슬을 끊어냈다.
그러나 한립은 체내의 얼마 안 되는 법력과 지기화신의 법력 그리고 신념의 힘을 전환한 법력도 모조리 바닥나 잠시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장기전이 되겠어…….”
한립은 단약 한 알을 삼키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 앞에는 남색빛에 둘러싸인 지기화신이 가부좌를 틀고 오몽도 각지의 돌 조각상들이 보내는 신념의 힘을 흡수하고 있었다.
* * *
그 시각, 운부계(雲浮界).
만리 고공 쪽빛 하늘에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구름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려 모였다 흩어졌다 하고 있었다.
게다가 태양의 위치가 계속해서 달라져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거대 구름들의 색깔이 푸른색, 남색, 노란색, 붉은 색으로 보였다.
그리고 오색구름 아래 천리에 달하는 녹음이 짙은 산맥이 구불구불 교룡처럼 놓여 있었다. 그 산맥 중간에 다른 봉우리보다 높은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위엄을 드러냈다.
다른 산맥들이 푸른 생기를 품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산봉우리는 풀과 나무 하나 없이 하얀 암석만 곳곳에 박혀 있었다. 꼭대기에는 널따란 하얀 광장이 세워져 있었고, 광장 뒤쪽 절벽 근처에는 금색 대전이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이때, 대전 안에서는 다양한 복색을 한 수십 명의 수사들이 앉아 마치 속세의 관원들처럼 엄숙한 얼굴로 양쪽으로 나뉘어있었다.
그 중에는 폭삭 늙은 노인, 묘령의 소녀, 중년 유생, 사나운 거한 등 각양각색의 인물이 있었는데,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대승기 수사들이었다.
대전 중앙의 상석에 앉은 검은 경장 차림의 2, 30대 청년은 굉장히 잘생겼지만 눈빛은 무척 매서웠다.
바로 요수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부운계로 파견된 방반이었다.
“방 선사님, 봉선문(奉仙門)과 탁염종(卓炎宗)이 힘을 합쳐 동류대륙(東流大陸)과 서천대륙(西川大陸)의 수사 문파들을 정리하고 그곳의 요수의 난을 제압하는 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하게 처리가 될 것입니다.”
회백색 도포를 입은 긴 수염 노인이 한발 앞으로 나서 흑의 청년에게 공손히 고했다. 대전의 모두가 다들 선계에서 왔다는 선사대인에게 충만한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실력을 지닌 데다 손속이 굉장히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부운계에 온 그는 요수의 난에 대응할 만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공표했고, 각 종문들이 철저히 그에 맞춰 움직이기를 바랐다.
몇몇 거대 종문의 장로들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 그에게 직접 참살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 일로 방 선사에게 원한을 품는 이는 없었다.
상대의 실력은 둘째 치고, 부운계의 본토 수사들보다 더욱 요수의 난에 신경 쓰고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방 선사가 홀로 요수의 난에 뛰어들어 숨어 있던 가장 흉포한 어미 요수들을 도륙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방반이 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무어라 답하려는데, 허리춤에서 노란빛이 반짝였다. 그는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져 얼른 원형의 전신원반을 꺼내 의식을 움직였다.
눈빛이 흔들리던 그는 나중에는 표정이 가라앉아 생각에 잠긴 듯했다. 대전의 다른 수사들은 긴장해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진법 원반을 거둔 방반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전부 당장 출발해 각 종문에 명을 전한다! 종문들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신속히 두 대륙의 요수의 난을 진압한다. 위반자는 누구든 죽일 것이다!”
화들짝 놀란 수사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얌전히 명을 받들어 대전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안에는 방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투명한 백옥 자기 병을 꺼내 그 안에서 미끄러지듯 굴러다니는 금색 피 한 방울을 쳐다보았다.
“네 놈이 격원법련을 제거했다 한들 어쩔 것이냐? 이미 선계로 돌아왔으니 이 마지막 정혈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이곳의 일이 끝나는 대로 친히 찾아가 요절을 내주겠다.”
* * *
1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오몽도에는 밤바다 은색 빛기둥이 떨어지고, 수시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오몽도 주민들은 오몽도를 비호하는 조신이 폐관수련을 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점점 습관이 되어 지금은 오랫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면 오히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유독 소란이 심했다.
섬 전체가 쉼 없이 흔들거리고 인근 해역도 영향을 받아 거대한 파도가 넘실댔다.
섬 주민들은 뜬 눈으로 밤을 새며 곳곳의 조신 조각상 앞으로 모여들어 진심 어린 기도를 하기도 했다.
섬 중앙, 사합원 안의 한립은 하얀 별빛 속에 앉아 신중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앞에는 밝은 남색빛을 반짝거리는 지기 화신이 앉아 체내의 신념의 힘을 법력으로 전환해 한립의 몸속으로 넘겨주고 있었다.
이때, 한립의 단전 안에는 금색 소인이 충만한 성광의 힘 안에 둥실 떠있었다. 소인을 구속하던 8개의 검은 사슬이 사라지고 복부와 연결된 검푸른 사슬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사슬들이 붕괴할 때마다 강화된 마지막 사슬이었다.
한립은 진법의 힘, 성광의 힘 그리고 법력을 이용해 사슬의 검푸른 수정빛을 세 달 넘게 제거하고서야 본체를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
“후우…….”
그의 의식의 힘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거대 수정 도끼가 단전 안에 떠올라 사슬을 찍었다.
쾅!
단전에 천둥이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의식 도끼는 멀리 튕겨나가 빛의 실로 흩어졌는데, 검푸른 사슬은 여전히 광택이 좌르르 흘렀다.
한립은 이럴 거라 예상했기에 별다른 반응 없이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렸다.
단전 내의 성광의 힘이 하나로 뭉쳐져 은색 거대 손을 이루어 사슬을 잡으려 날아갔다.
동시에 연신술을 운용해 의식세계에 광풍을 일으켰다. 웅대한 의식의 힘이 단전으로 몰려들어 수정 거대 손으로 변했다.
두 거대손이 사슬을 단단히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촤르륵!
검은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원영을 통해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를 악문 한립은 지속적으로 의식의 힘을 불어넣어 두 거대 손에 힘을 실었다.
웅!
그 순간, 푸른빛이 번진 검푸른 사슬에서 깨알 같이 작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괴이한 법칙파동을 일으켰다.
사슬을 쥔 두 개의 거대 손은 강대한 흡입력에 휘말려 법력은 물론 의식의 힘까지 빠르게 유실되었다. 마치 사슬 속으로 법력과 의식의 힘이 빨려 들어가 봉인되는 듯했다.
흠칫 놀란 한립은 눈을 번쩍 뜨자 수결을 맺고 있던 지기화신이 두 손을 뻗어 그의 단전을 가리켰다.
팟.
물 속성의 법칙의 힘이 흘러들어와 남색 빛의 장막을 이루고 검푸른 사슬을 에워쌌다. 사슬의 주술문자들은 장막에 가로막혀 괴이한 파동이 한층 약해졌다.
이때 두 눈을 반짝인 한립의 몸 안에서 맑은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거원, 채봉, 뇌붕, 오색공작 등 손바닥만 한 허상들이 금빛에 휩싸여 나타나 흐릿하게 한립의 단전 속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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