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화. 응해정(凝海晶)
*
응해정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한립은 놀라기보다는 기대가 충만해 보였다.
휘휘휘휙!
그의 두 손에서 날아간 수십 개의 깃발이 진법 곳곳에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순간 현란한 불빛이 사방에서 날아들어 진법이 방출하는 붉은 빛을 배로 진하게 만들었다.
화르륵!
거세게 타오른 심해지화가 더욱 짙은 금색으로 변했다. 반대로 응해정을 감싸고 돌던 남색 물빛의 속도는 느려지고 색도 연해졌다.
이제야 수정돌 표면이 흐릿해지며 약간씩 녹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응해정은 작아져 심장 모양으로 변해갔다.
여전히 물처럼 투명한 수정 표면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한립은 다른 재료들이 융합되어 형성된 구슬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웅!
해저 바닥 허공에 남색 물 속성 진법이 떠올라 거대한 팔괘도안을 형성하고 진동했다.
쿠르르르.
방원 수백 리의 바닷물이 크고 작은 소용돌이들을 만들어 서로 충돌했다. 남색 빛의 실들이 물속에서 빠져나와 한립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수결을 맺은 한립의 조종에 무수히 많은 남색 실들은 정신없이 남색 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색 구슬은 크게 부풀어 올라 언제든 터질 것 같아 보였는데, 천천히 늘어나더니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팔과 다리가 끝까지 자라나지 못했고 머리는 대머리였다.
한립의 주문 소리가 빨라졌다.
남색 인영은 천천히 다시 변화하더니 손가락과 발가락이 구분되어 얼굴의 이목구비도 뚜렷해졌다. 한립과 꽤 닮은 모습이었다.
한립은 기운을 끌어올리고 손에서 푸른빛을 날려 한쪽의 응해정을 감싸고 천천히 남색 인영의 가슴으로 인도했다.
쿠쿵!
심장 자리에 응해정이 쏙 들어간 후 남색 인영은 주변의 지화도 날려버릴 만큼의 휘황찬란한 빛을 발산했다. 응해정에서 혈관처럼 남색 실들이 빠져나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됐어!’
얼마 후, 허공에 나타난 남색 사내를 보고 한립이 희색을 드러냈다. 지기화신 주조의 첫 단계가 아주 순조롭게 끝난 것이다.
낙몽과 교팔의 지기화신 잔해를 꼼꼼하게 연구해 깨달음을 얻은 덕이었다. 하지만 지기화신을 단단하게 굳히려면 아직 지화의 힘이 필요했다.
한립은 마음을 다잡고는 수결을 맺어 심해지화로 지기화신을 감싸 불덩이로 만들고 천천히 구워냈다.
7일 후, 한립은 눈을 번쩍 뜨고는 수결을 풀었다. 그러자 거대 불구슬이 흩어지고 안에서 지기화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처음보다 작았지만 훨씬 단단해 보였고 전신에서 물의 정화와 같은 남색 빛을 발산했다. 이제 주조는 끝난 셈이었지만 빈껍데기일 뿐이라 영성이 전혀 없었다.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지기화신에게 지능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팟.
반짝이는 눈으로 사방을 훑던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핏물로 축축하게 젖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요수의 심장은 진한 피비린내 속에 기이하게도 좋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와라!”
이때 한립이 있는 곳에서 수천 리 떨어진 심해 동굴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검은 물체가 동굴을 빠져나와 코를 킁킁 거렸다.
옥처럼 새하얀 몸통에 머리에는 사람의 얼굴이 달린 거대 물고기 요수가 흥분한 기색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헤엄쳤다.
물고기 요수는 엄청난 속도로 쉼 없이 수천 리를 헤엄쳐 전방에서 유혹적인 냄새를 풍기는 나사수(玀沙獸)의 심장을 발견했다.
나사수는 물고기 요수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였다.
남색 빛 속에서 나사수 심장을 든 인족 청년은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예민한 감각을 지닌 물고기 요수는 더 다가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때 한립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하얀 물고기 요수 옆에 물보라가 일고 한립이 나타나 한 손을 뻗었다.
그가 다섯 손가락을 쫙 펴자 엄청난 괴력에 물살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에 기겁한 물고기 요수는 전신에서 남색 빛을 방출하며 옆 지느러미를 펼쳤다.
촤아앗!
바닷물이 굵은 물기둥을 이루어 한립을 향해 날아갔다. 남색 빛을 품은 물기둥 안에서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쾅!
물기둥과 한립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괴력이 만나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물기둥은 뚫렸지만 그 안에서 남색 뇌전이 불현 듯 튀어나왔다.
냉소를 머금은 한립은 그것을 피하지도 않고 물고기 요수를 향해 날아갔다.
콰르릉!
그는 남색 뇌전에 정통으로 맞고도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하얀 물고기 요수가 대경실색하고 있을 때 한립의 손바닥이 요수의 머리로 떨어졌다.
퍽!
머리가 터져 주변 바다가 붉게 물들었고, 남색 빛이 그 안에서 빠져나와 달아나려 했다. 남색 빛이 얼마 달아나지 못했을 때 한립이 앞에 나타나 그것을 낚아챘다.
그의 손에서 발버둥 치는 것은 물고기 요수의 혼백이었다. 한립은 번득이며 남색 진법 안으로 되돌아갔다.
하얀 물고기 요수는 보기 드문 물 속성 요수 나부요(羅婦妖)였다. 지기화신 제련을 마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 요수를 잡아 그 혼백으로 지능을 일깨워야 했다.
이곳에서 진법을 펼치고 제련한 것도 지하에 심해지화가 있는 것 외에 인근에 나부요를 점찍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수결을 맺은 한립은 입에서 푸른빛을 뿜어 남색 혼백이 지기화신 머리 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미간에서 빛을 반짝인 그는 진땀을 흘리면서 집중했다.
“윽!”
사람을 홀릴 듯한 두 줄기의 수정빛이 그의 눈에서 번득였고 미간에서 녹색 소인이 빠져나왔다.
지기화신에게 영성을 부여하려면 신외화신을 제련할 때처럼 혼백 일부를 분열해 집어넣어야 자유롭게 부릴 수 있었다.
녹색 소인은 쏜살 같이 지기화신 머리 위의 남색 혼백에게 다가가 동화시키려 들었다.
남색 혼백이 바로 물어뜯으며 반격을 가했지만 소인의 주먹에 퍽! 맞고는 맥을 못 추었다.
우적우적.
소인은 한 손으로 남색 혼백을 쥐고 우악스럽게 살점을 뜯어먹었다. 남색 혼백을 전부 삼킨 녹색 소인은 색깔이 청록색으로 변해 천천히 지기화신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지기화신이 드디어 눈을 뜨자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아직 수결을 풀지 않은 한립은 진지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의 미간에서 수정실이 날아가 지기화신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화신의 표정이 살아났다.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탄혼화 액을 주입해서 지기화신 내부의 분혼을 안정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암녹색 옥갑을 불러낸 그가 은은한 금빛을 띠는 모란 모양의 거대 꽃을 살피고 있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해수면 끝에서 둔광 대여섯 개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선급 기운을 지닌 이들이었다.
의식의 힘으로 누가 다가오는지 파악한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장 선두에 선 거한은 하얀 갑옷을 입고 구멍이 숭숭 뚫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구노조의 지기화신이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도 음산한 살의가 느껴졌다.
그 뒤를 따라 온 이들은 멍한 눈빛의 다섯 화신들이었다. 흑갑 사내, 누런 수염 노인 외에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청포 수사도 둘도 있었다.
처음 보는 화신들이지만 낙풍이 알려준 인근 섬 조신들의 용모와 일치했다. 마지막으로 날아오는 남색 장삼의 미부인은 한구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인 곡골부인이었다.
여섯 조신들의 본체는 진작 고명한 방법으로 기운을 감추고 숨어 있어 한립이 미리 눈치채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선에게 그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쉭!
선두의 한구 화신이 하얀색 낫을 날렸다.
낫은 동산 만하게 부풀어 한립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선기는 아니지만 대단한 위력을 지닌 보물로 날아들며 바닷물을 양쪽으로 갈랐다.
지기화신 제련이 막바지에 이른 한립은 싸우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할 상황이었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빠져나가 주위의 남색 보호막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웅!
보호막 표면에 물결 그림자가 떠올라 솨아아! 물소리를 냈다. 남색 보호막은 강력한 방어용 진법이었다.
채챙!
금속성의 마찰음이 울리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낫은 부르르 떨며 튕겨나갔는데 남색 보호막은 표면의 물결 그림자만 출렁이고 잘리지 않았다.
이때 곡골부인 등 나머지 다섯 화신도 각각 법보를 방출했다.
흑갑 사내는 먹색 여의, 노란 수염 노인은 황토색 인장, 청포 도사 둘은 쪽빛 장창을 꺼내들었고 곡골부인은 검은 장검을 불러냈다. 다섯 개의 법보가 연달아 남색 보호막을 공격했다.
카카카캉!
충격으로 바다 속이 요동쳤다. 여러 법보들도 낫과 마찬가지로 남색 보호막에 의해 튕겨나갔다.
보호막은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게 물결치다 안정을 되찾았지만 처음보다 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바깥에서는 보호막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다는 것은 흐릿하게 보였다.
“한구 수사, 지난번에 지난 은원은 모두 털어버리기로 한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립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게 누가 그리 욕심을 부리랍니까? 낙몽이 찾은 탄혼화를 못 찾았다면 어찌 지기화신을 제련하고 있단 말입니까! 아직 만 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쓸 만한가 봅니다.”
한구는 냉소했다.
“선인이 된지 오래라 그런지 지기화신 제련 과정을 훤히 꿰고 계십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 화신 제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나타셨으니 말입니다.”
“영리한 분이니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알 겁니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 탄혼화를 내주고 오몽도 도주 노릇을 계속하는 것이고, 두 번째 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곡골부인과 다른 수사들도 한구 수사와 같이 저를 사지로 내모는 데 동의하신 겁니까?”
한립은 더 이상 한구를 상대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향해 물었다.
“수사와는 일면식밖에 없지만 무의미한 저항은 하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진극체를 이루고 현천의 길을 가시는 분이 왜 굳이 지선이 되려 하십니까? 저희의 바람대로 따라주시면 오몽도 도주 자리는 보장하겠습니다.”
곡골부인이 천천히 입을 뗐다.
“하하, 제 귀에는 아무나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허수아비 도주가 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꼭 벌주를 마셔야겠다면 우리가 무정하다 원망하지 마시지요! 자, 저자만 죽이면 모두에게 약속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한립의 비웃음에 한구가 다른 수사들을 돌아보고 수결을 맺었다. 튕겨나갔던 낫이 하얀 도광(刀光)으로 변해 보호막을 찍었다.
다른 다섯 수사들도 긴말하지 않고 각자의 법보로 남색 보호막을 공격했다.
카카카캉!
남색 보호막은 극심하게 떨리면서도 여섯 수사들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빛이 급격히 암담해지고 한층 얇아졌다.
“…….”
그러나 한립은 그 안에 앉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돌연 한구가 괴성을 지르며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하얀 낫에서 똑같이 생긴 낫 허상 8개가 나타나 본체 주변을 회전했다.
마치 새하얀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변한 낫이 예리하게 보호막을 갈랐다. 굉음이 울리고 드디어 보호막이 챙강! 깨져 남색 빛으로 흩어졌다.
한립과 그 앞에 앉은 화신이 노출되자 기다리고 있던 다른 법보들이 달려들었다.
웅웅!
이때 물소리와 함께 남색 빛 알갱이들이 떠올라 반원형의 남색 물의 장막을 만들었다. 이전 보호막과 비슷하지만 훨씬 얇고 수십 겹이나 되었다.
쨍강!
다섯 법보의 공격에 겉면의 보호막이 깨졌고, 법보들도 반탄력에 의해 튕겨나갔다. 그사이 다른 보호막들이 웅웅 기운을 일으켜 바닷물에서 남색 빛 알갱이들을 모아 다시 물의 장벽을 복원했다.
신비로운 남색 보호막의 모습에 한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한립은 역시 담담하게 그 안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기화신을 제련하는 동안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무상맹을 통해 천금을 지불하고 구한 천중명도진(千重溟濤陣)이었다.
공격 능력이 없는 대신 방어력이 뛰어나 한구와 그가 데려온 다섯 진선들이 협공해도 파훼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