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16화 (1,273/2,000)
  • 1516화. 흑해중수경(黑海重水經)

    *

    밀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밀조밀 새겨진 가면의 문양을 손끝으로 만져본 한립은 기이한 파동을 느끼고 원래 있는 남색 가면 대신 새 가면을 썼다.

    물결이 치는 듯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오자 남색 가면이 소리 없이 흩어졌다.

    다음 순간, 한립의 뇌리 속에 금빛 찬란한 문자들이 떠올랐다. 가면의 여러 기능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용모와 기운을 감추고 비밀 전음을 보낼 수 있는 이전 기능 외에 임무를 발표하거나 동급의 회원과 수련 자원을 거래할 수 있는 방법도 적혀 있었다.

    내용을 숙지한 한립은 두 손가락으로 가면의 미간 부분을 짚고 기이한 주문을 외웠다.

    파앗.

    주문소리가 끊기자 가면에서 부드러운 푸른빛이 솔솔 흘러나와 밀실 가득 퍼졌고, 그의 앞에 진법 원반 허상이 떠올랐다.

    복잡한 주술문자가 새겨진 네모난 진법 원반 중심의 소용돌이에서 공간파동이 전해졌다.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진법 원반은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 맨 위쪽에 각각 ‘임무’와 ‘교환’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원반 표면에서 금빛 문자들이 날아올라 물물교환을 할 때 준수해야할 사항을 알려주었다.

    맹의 거래는 공간을 넘어서 진행되기에 거래물품은 무상맹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다. 물건의 품질과 심지어 유래까지 가격과 함께 표기되기에 비교적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거래 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맹의 엄중한 처벌을 받음과 동시에 영구적으로 제명된다.

    금빛이 사라지고 원반 좌측에 작은 글자로 적힌 임무와 그에 따른 보상을 살피던 한립은 그중에 사람을 구하는 내용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살수나 위험한 지역을 함께 탐사할 일행을 구했는데 내용이 다양한 만큼 보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원반 우측은 조금 더 복잡했다.

    거래 가능한 물품이 영약, 재료, 법보, 부적, 경전 등 몇 가지로 분류가 되어 있었고 등급에 따라 또 나뉘었다.

    한립은 원반을 쓱 훑고 경전 쪽을 유심히 살폈다. 다양한 수준의 공법이 많았는데 조신이 수련하는 공법은 얼마 없었고 특히 고계 지신공법은 더 드물었다.

    한참을 뒤진 한립은 혼원연토결(混元煉土決)이라는 흙 속성 지선 공법을 발견하고 표정이 좀 나아졌다. 간략한 설명에 따르면 공법을 대성하면 적어도 금선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래를 원하는 물건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화원룡아과(火元龍牙果)를 원했기 때문이다.

    불 속성 법칙의 힘을 지닌 천지 영물로 나무 자체가 키우기 극히 어려운데다 수만 년 공을 들여야 열매가 다 자랐다. 현천과실과도 비슷한 수준의 보물이었다.

    거기다 화원룡아과는 향기도 진하고 그윽해서 다 익기도 전에 인근의 영수가 먹어 치우는 경우가 많아 구하기 극히 어려웠다.

    반 시진 정도 더 목록을 뒤진 한립은 혼원연토결보다는 못하지만 물 속성에 속한 얼음 속성 공법인 소산한빙결(霄山寒氷決)을 발견했다.

    흑풍해역에서 수련하면 어느 정도 지리적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또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다. 공법을 얻으려면 백년 내로 북한선역의 위험지역으로 가서 무언가를 찾아와야 했다.

    물건을 못 찾고 살아만 돌아와도 공법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진 한립은 다른 공법으로 눈길을 돌렸다.

    꼬박 하루 동안 샅샅이 거래되는 공법을 뒤져 마지막으로 찾아낸 것이 흑해중수경(黑海重水經)이었다.

    신념의 힘으로 물 속성 법칙의 힘을 응결할 수 있었고, 바닷물에서 중수(重水)도 정련할 수 있었다.

    중수 정련 과정에서 공법을 수련하는 이의 선령력도 높아진다니 일거양득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이 공법으로 총9성의 중수를 정련할 수 있었는데 이론적으로는 대성하면 진선경계를 넘어 금선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적힌 것은 아무도 실제로 금선에 이른 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공법이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전 두 개의 공법보다 쉬운 대신 중수 정련에 드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더 높은 단계를 수련할수록 필요한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이 공법을 창안한 지선은 개울물만큼인 3성의 중수를 정련하는데 장장 오십만 년을 허비해 겨우 진선 중기에 이르러 수사들 사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나중에는 그마저 다른 공법을 수련했다고 하니 나머지 6성을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천만년 이상일 듯싶었다.

    하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쭉 지선의 길을 가려는 것이 아니라 지선공법으로 필요한 법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또한 결점이 많기에 거래 조건이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아무것이나 법칙의 힘을 지닌 재료면 교환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팟!

    한립은 마음을 정하고는 미간에 두 손가락을 대고 푸른 실을 흑해중수경이 적힌 곳으로 쏘아 보냈다.

    일다경이 지나자 진법 원반에서 푸른빛이 튀어나왔다. 밀실에 나타난 살쾡이 가면을 쓴 사내의 허상은 체구가 무척 크고 복색이 특이해 인족 수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흑해중수경을 거래하고 싶으십니까?”

    한 사내가 한립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우렁찬 목소리에 비해 온화한 말투였다.

    “그렇습니다.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면 무엇이든 된다고 적혀 있는데 수량이 언급되지 않아서요.”

    한립 역시 포권을 하며 질문을 했다.

    “허허, 경전도 급이 다르듯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도 품질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은 수량은 수사께서 어떤 물건으로 거래를 원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웃으며 답하는 거구의 사내를 보고 한립은 사람 얼굴 문양이 있는 기이한 호두를 불러냈다. 즉시 사방으로 농염한 흙 속성 기운이 퍼졌다.

    “이건 어떻습니까?”

    거구 사내 허상은 무심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려다 제자리에 서서 평온하게 답했다.

    “토손과(土孫果)가 약간의 흙 속성 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기는 한데 양이 적어 열 개는 있어야 합니다.”

    ‘이게 토손과였구나…….’

    한립은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거구 사내를 응시했다.

    사내는 내심 탄식했다. 숨겨보려 했지만 토손과를 보자마자 보인 반응을 들킨 게 틀림없었다.

    “큼, 이것보다 품질이 나은 토손과가 있으시면, 제가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다섯 개에 거래를 해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말을 바꾸자 한립은 씩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두 개.”

    “정 없이 왜 그러십니까! 흑해중수경이 약간의 결점은 있지만 그래도 고계 지선 공법입니다. 토손과 두 개는 너무 헐값이에요.”

    거구 사내 허상이 손을 내저었다.

    “하하, 이 공법이 어떤지는 수사께서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어차피 계륵인 물건을 진귀한 과실 두 개와 바꿀지 말지는 알아서 선택하시지요.”

    “그래도……. 두 개는 정말 너무 합니다. 딱 한 개만 더해서 세 개면, 어떠십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거구 사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가능은 합니다만 대신 제 질문에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연히 토손과 몇 개를 구하기는 했는데 그 쓰임새를 모릅니다. 수사께서 제 의문을 풀어 주시지요.”

    한립은 솔직히 말했고 거구 사내는 아연한 얼굴로 답했다.

    “토손과는 흙 속성의 특수한 영과입니다. 흙에 심어두고 십만 년이 지나면 싹이 트고 백만 년이 지나야 나무가 되지요. 천만 년을 기다려야 결실을 맺는데, 흙 속성 선기와 고계 병기를 제련하기에 최상의 재료입니다.”

    “그랬군요.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거래하시지요.”

    한립은 미소를 머금었고, 사내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손바닥을 들어 올려 인면(人面) 호두 세 알과 고서 한 권을 원반 가운데의 소용돌이 속으로 날려 보냈다.

    잠시 후, 진법 원반이 밝은 빛을 발하고 검푸른 고서가 나타났다.

    고서를 끌어와 내용을 확인한 한립은 거구 사내 허상을 보았고, 상대도 토손과 세 개를 살펴본 뒤 포권을 해보이고 사라졌다.

    한립은 상대가 토손과의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고계 지선공법을 헐값에 넘겨 아쉬워하는 것을 알았기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 공법은 있고 지기화신 재료만 구하면 되었다. 원래는 토손과를 주재료로 쓰려 했지만 흑해중수경을 익히면 물의 법칙을 지닌 주재료가 있어야 했다.

    그는 원반의 교환이라 적힌 쪽에 손을 뻗어 토손과를 두고 물 속성 법칙을 함유한 재료를 구한다고 표시했다.

    여러 가지를 따져보았을 때, 무상맹의 세력범위는 겨우 흑풍해역에 국한되지 않는 듯했다. 당연히 회원의 수도 많아 거래되는 품목도 엄청났다.

    토손과가 흙 속성의 진귀한 재료라면 동급의 물 속성 법칙을 지닌 재료를 금방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진법 원반 허상에서 눈을 떼고 바닥에 주저앉아 흑해중수경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짐작대로 일주일이 못 되어 여러 명이 연락을 취해왔다.

    그들과 바로 거래하지 않고 며칠을 더 기다린 그는 총 십여 개의 재료들을 비교해 최종적으로 응해정(凝海晶)이라는 재료를 택했다.

    상당한 물 속성 법칙을 함유하고 있어서 흑해중수경과도 잘 어우러졌고, 방원 만 리의 물의 정화를 손톱 크기로 응결할 수 있다고 하니 토손과를 훨씬 뛰어넘는 진귀한 재료였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던 토손과 전부에 다른 재료까지 더해서 간신히 거래를 마쳤다. 그 후 바로 폐관을 한 그는 봄이 가고 가을이 지날 때까지 1년을 보냈다.

    그 동안 한립은 녹색 액체로 탄혼화를 배양하면서 밤낮없이 흑해중수경을 연구해 지기화신을 제련할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 * *

    오몽도에서 만 리나 떨어진 해저.

    높낮이가 다른 암석들이 산봉우리처럼 솟아 있어 바다 아래 가라앉은 산맥과 다름이 없었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암석들은 울퉁불퉁하면서도 암홍색을 띠고 있었고, 활화산이 남아 있어 자주 화산 분출이 일어나는 터라 접근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런 해저 모처의 평평한 지면에 남색의 반원형 보호막이 물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 안에 펼쳐진 진법 가운데에는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열댓 개의 돌기둥이 들쑥날쑥하게 박히고 중앙에 적홍색 주술문자가 새겨진 불 속성 진법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있었다.

    웅웅!

    적홍색 진법이 진동하고 주위의 돌기둥들이 요란한 빛을 뿜어 주변 해저를 밝게 비추었다. 수결을 맺은 한립을 중심으로 해저 바닥이 쿠르릉 울렸다.

    쩌적!

    진법에서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부분이 갈라지고 커다란 동굴이 형성되었다. 그 틈으로 새빨간 용암이 출렁이고 주변에 화염을 일으켰다.

    은은한 금빛을 띠는 화염은 평범한 암장(巖漿) 지화가 아니라 심해지화(深海地火)라 불리는 기이한 화염으로 바닷물과 공존이 가능하고 위력이 몇 배는 강했다.

    지반 틈으로 발산된 열기에 바닷물이 요동치고 있었다. 재빨리 일어나 입구로 향한 한립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열손가락에서 법결을 튕겼다.

    진법이 더욱 빠르게 진동하면서 붉은 빛을 동굴 속으로 흘려보냈다. 지하의 암장이 파동을 따라 천천히 동굴 밖으로 흘러나왔다.

    쿠릉.

    틈사이로 굵은 금빛 화염이 솟구쳐 빙글빙글 나선형을 이루며 올라갔다. 마치 화염의 샘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한립은 손가락을 더욱 빠르게 움직여 진법에서 동굴로 흘려보내던 붉은 빛으로 금색 지화를 에워쌌다.

    거세게 솟구치던 심해지화가 유순하게 변해 그의 손짓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팟!

    그제야 긴장을 푼 한립은 다른 재료들을 불러내 일렬로 늘어놓았다. 현재 그의 법력으로는 재료들을 제련할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심해지화의 힘을 빌리러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하얀 수정 광석이 날아올라 지화 속으로 들어갔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 광석이 서서히 반투명한 액체로 녹아갈 때쯤 그는 다음 재료를 날려 보냈다.

    제련에 매진하다보니 금방 한 달이 지나갔다.

    한립 주위의 재료들은 모두 심해지화 속으로 들어가 하나로 합쳐졌고, 맷돌 크기의 은은한 남색 구슬이 불길 속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운학초를 꺼내 씹어 먹은 그는 사발 크기의 짙은 남색 수정돌을 불러냈다. 강력한 물의 법칙파동을 발산하는 광석은 응해정이었다.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수정돌을 지화 속으로 던져 넣었다.

    화륵!

    지화 속에 들어간 수정돌은 돌연 남색 물빛을 일으켰다. 온갖 재료를 싹 녹여낸 심해지화가 그 남색 물빛의 장벽에 막혀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있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