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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15화 (1,272/2,000)
  • 1515화. 추천

    *

    반각이 지나 동굴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자 교삼은 영역을 흩어버렸다.

    한립은 그가 피로한 얼굴로 화염 연꽃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거북 갑옷을 치우고 공수했다.

    “홍월도 도주 공수월을 처리하는데 성공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교삼 대인.”

    “교십오, 이번 일에는 자네의 공도 컸네.”

    교삼은 처음과 다른 눈빛으로 한립을 보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자네야말로 과하게 겸손하군. 무상맹은 실력을 중시해서 부족한 실력으로 과한 이익을 취하려 들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나?”

    교삼이 손을 내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좋군! 내 자네를 더 높은 급의 회원으로 추천하려 하네만, 원하는가?”

    “높은 급의 회원이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더 위험한 임무만 수행해야 한다면 함부로 응할 수 없겠지요.”

    뜻밖의 제안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표정변화 없이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스로 일반 임무를 교부할 수 있고, 동급의 회원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네.”

    “그렇다면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추천을 받는다고 무조건 결정되는 것은 아니네. 맹에서 따로 특사를 파견해 임무를 내릴 것이야. 수사라면 충분히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 거라 보네.”

    교삼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임무도 마쳤고 이 섬은 오래 있을 곳이 못되니 철수하지. 홍월도가 오랜 세월 모아둔 보물을 찾고 싶으면 알아서 움직이되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게.”

    교삼이 당부를 덧붙이고 사라지자 한립도 즉시 몸을 날렸다. 곤주 홍월성 지상으로 올라온 한립은 폐허가 된 일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 명이 함께 성에 진입했는데 살아남은 이는 그뿐이었으니 무상맹의 임무가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성취를 위해 억만 생령과 자신을 따르는 산수들까지 혈제로 희생 공수홍도 잔인했지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수도의 길에는 순탄한 길만을 지날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라 홍월도의 자원을 탐색하고 다녔다.

    교팔의 저물법기는 그가 조용히 챙겼고, 섬에서 가장 가산이 풍부했을 공수홍의 것은 당연히 교삼이 가져갔다.

    * * *

    두 달 후.

    오몽도 인근에 이른 푸른 둔광에서 한립이 나타났다. 작은 섬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편안한 웃음이 어렸다.

    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곧 섬에서 낙풍이 그를 맞이하려 날아올랐다.

    “류 선배님!”

    한립의 얼굴을 확인한 낙풍은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이번 출타에 관해서는 그만이 알고 있기에 혹시나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할까 여러 날을 전전긍긍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겠지?”

    고개를 끄덕여준 한립이 낙풍과 오몽도의 안부를 물었다.

    “선배님 덕분에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낙풍은 사합원으로 돌아가는 한립을 졸졸 따라가며 인근 해역 소식을 일일이 보고했다.

    육곤이 조신으로 있는 섬이 봉쇄되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 말에 한립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육곤은 마지막 순간, 머리만 남은 지기화신과 호수 속으로 추락해 행적이 묘연해졌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낙풍을 돌려보낸 한립은 사합원의 침실로 들어가 침상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활기를 되찾은 그는 한 무더기의 물건을 꺼냈다. 그곳에는 저물법기, 영보, 교팔의 망가진 지기화신까지 있었다.

    교팔의 화신 잔해는 낙몽의 화신과 재료가 비슷했고 적잖은 바람속성 재료가 추가된 것만 달랐다.

    이미 지기화신에 녹아든 재료들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어도 세밀하게 연구를 해두면 앞으로 지기화신을 제련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보물들 중에는 교십육의 검은 송곳이 저계 선기로 가장 특별했는데 어째서인지 심각한 타격을 입어 법칙의 힘이 서서히 유실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수백 년 후면 법칙의 힘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 확실했다. 당시 교십육이 사용할 때도 위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한립은 대충 보물들을 정리하고는 저물 법기들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과연 진선급 선인들의 저물 법기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각종 재료들이 오몽도에 낙몽이 모아둔 것보다 훨씬 많았고 그가 이름을 모르겠는 진귀한 물건들도 보였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옥간 하나를 들어 올렸다.

    지선 공법인 청풍현강결(靑風玄罡決)은 조신이 된 후에야 지선이 될 수 있어 별 쓸모가 없었으나 참고삼아 읽어볼 생각이었다.

    * * *

    한 달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밀실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한립이 일어나 사합원 위쪽 허공으로 이동했다. 얼굴에는 푸른 소머리 가면에 나타나 있었다.

    둔광을 일으켜 반나절을 날아간 그는 오몽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의 어떤 언덕에 도착했다.

    그가 나타나자 파문이 일고 회색 인영이 걸어 나왔다. 적홍색 가면을 쓴 상대는 회색빛에 가려져 있어 멀리 있는 느낌을 주었다.

    한립은 회색 인영의 수행이 교삼 이상인 것을 눈치채고 동공을 수축했다.

    “교십오, 교삼이 수사를 청급(靑級) 회원으로 추천했다. 수사의 공헌도로는 까마득하게 먼 등급이지만 누군가 추천 자격을 사용했으니 시험 임무를 전달하겠다.”

    한립을 아래위로 훑은 회색 인영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목소리조차 웅웅거려 남녀노소가 구분되지 않았다.

    “이해했습니다.”

    “임무 목록 중에서 스스로 하나를 고르도록.”

    붉은 영패를 꺼낸 회색 인영은 깨알 같은 주술문자를 불러냈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한 줄 한 줄 임무가 적혀 있었다.

    임무는 각양각색이었다. 위험한 지역을 만 년 동안 지키는 것도 있었고, 먼 곳의 강력한 요귀를 멸살하는 일, 보기 드문 천지영물을 구해오는 일 등 아주 다양했다.

    어느 것 하나 지난번 임무보다 쉬운 것은 없었다. 그의 실력에 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가 중요했다.

    만년은커녕 백년, 아니 십년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진선계는 느긋하게 보내기에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어느 세력이 그를 막다른 곳으로 내몰지 않았다면 삼백 년의 기억을 잃고 영환계로 떨어진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빠르게 임무를 훑던 그는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다.

    ‘백년 내로 이름 모를 영약 종자를 부활시키라?’

    어떤 종자는 장천병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살려낼 수 있었다.

    “특사 대인, 영약 종자를 부활하는 임무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오, 그걸 선택하려고?”

    “안 됩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 임무는 맹의 장로 중 한 분이 내린 것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약 종자가 완전히 생기를 잃어 특수한 나무속성 법칙을 이용해야만 부활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한립은 설명을 듣고는 고민 없이 선택을 마쳤다. 회색 인영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붉은 영패를 거두고 하얀 진법 원반을 꺼내 주었다.

    “전물반(轉物盤)이다. 며칠 뒤에 누군가 이것을 통해 종자를 보낼 것이니 부활시키는데 성공하면 다시 전송해서 돌려보내면 임무는 성공이다.”

    “예, 감사합니다.”

    하얀 원반을 받은 한립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선계에 이렇게 편리한 물건도 있었다니! 일을 마친 회색 인영은 두 팔을 벌려 회색빛을 날렸다.

    촤악!

    공간에 균열이 생기자 회색 인영은 한립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공간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공간통로가 닫힐 때까지 한립은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회색 인영이 날린 빛에는 금색 꽃문양이 그려진 금색 부적이 들어있었다.

    이렇게 쉽게 공간을 열고 특수한 법칙파동을 발산하는 것으로 보아 비범한 물건 같았는데 위급한 순간도 아닌 평상시에 사용하다니 사치가 심한 듯했다.

    밤이 되어 사합원으로 돌아온 그는 기다리고 있던 낙풍과 마주쳤다.

    “류 선배님을 뵙습니다.”

    “가서 영초를 키우는데 적합한 고계 흙을 종류별로 모아 오게. 양은 그리 많지 않아도 되네.”

    “예!”

    한립의 갑작스런 명령에 낙풍은 의아했지만 이유는 묻지 않았다.

    * * *

    3일 후.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밀실에 하얀 진법 원반이 떠올라 웅웅 진동했다.

    잠시 후 눈부신 빛을 머금은 원반에서 은색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하얀 빛덩이를 이루었다.

    늘었다 줄었다 하던 하얀 빛이 흩어진 자리에는 손바닥 크기의 하늘색 옥함이 떠있었다. 한립은 옥함을 불러들여 의식으로 살펴보고는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갈색의 말라비틀어진 복숭아 씨앗을 닮은 종자가 들어있었다. 종자를 들어 올린 한립은 완전히 말라붙어 죽은 것을 확인했다.

    어떤 효과가 있기에 맹의 장로라는 자가 다시 살려내려는 것일까?

    옥패를 꺼내 비밀 공간 입구로 들어간 그는 목재 건물 너머 공터에 옥으로 만든 화분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짙은 영력을 담은 알록달록한 흙이 담겨 있었다.

    낙풍이 모아다 준 흙들로 만든 오색토양(五色土壤)이었다. 오색토양은 대부분 영초와 영약들을 키우는데 적합했다.

    갈색 종자를 흙 속에 심은 뒤 장천병을 기울여 녹색 액체를 한 방울 떨어트렸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한립은 시간이 지나 거의 반나절 후에야 기쁜 얼굴로 눈을 떴다.

    녹색 액체를 주고 두세 시진 만에 말라붙은 종자 내부에 약간의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몸을 일으켜 비밀공간을 빠져나온 그는 사합원에 겹겹이 금제를 쳐놓고 작은 병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빛이 반짝였다.

    한 달 후, 병 안에 녹색 액체가 한 방울 모이자 한립은 그것을 종자에 떨구었다.

    이번에는 갈색이던 종자 표면이 희미하게 녹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 * *

    다섯 달 후.

    여섯 번째 녹액을 머금은 종자의 껍질은 절반은 어둑하고 절반은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또 세 달이 흘러 한립이 아홉 번째 녹색 액체를 부었을 때는 종자가 작게 갈라지며 여린 새싹이 돋아났다.

    한립은 연두색 새싹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자라서 어떤 영초가 될지는 몰라도 기대가 되는 종자였다.

    완전히 말라죽었던 종자는 아직 생기가 부족했지만 이만하면 부활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좋은 토양에 옮겨 심어 적합한 나무 속성 영액으로 배양하면 잘 자랄 것이다.

    녹색 액체 없이는 수만 년이 걸리겠으나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사합원 밀실로 돌아가 소머리 가면을 쓴 한립은 하얀 전물반을 꺼내 새싹이 튼 화분을 올려놓고 금제를 발동했다.

    웅!

    진법 원반에서 하얀빛이 나와 옥 화분을 감싸고 사라졌다.

    한립은 진법 원반을 허공에 띠우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한참 후, 진법 원반이 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자 원반 위로 하얀 빛의 진법이 만들어졌다. 그 위에는 무상맹 특사인 회색 인영이 서있었다.

    “교십오, 종자 부활에 성공할지 몰랐구나. 그것도 1년도 안 돼서 말이야! 맹의 장로께서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해 하셔서 내가 대신 왔다. 그 방법을 알려주는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회색 인영은 역시 바로 용건을 밝혔다.

    “그게, 아무래도 장로님을 실망시켜 드려야겠습니다. 오래전 운이 좋아 얻은 액체를 오색토양에 심은 종자에 뿌렸더니 말라붙었던 종자가 살아났습니다. 그 액체를 믿고 임무를 받은 것이고요. 원래도 몇 방울 남지 않았었는데 이번 임무로 전부다 써버렸습니다. 혹시 오색토양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으시면 그건 거래할 수 있습니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쉽다는 듯 답했다.

    “그거 안타깝구나. 이후에도 같은 액체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내게 연락 하거라. 이번 임무를 하달한 장로께서 선기와 거래할 용의도 있다고 하셨다. 어쨌든, 시험을 통과했으니 오늘부터 수사는 정식으로 본 맹의 청급 회원이 되었다. 새로운 가면이니 잘 지니고 있도록.”

    침음하던 회색 인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가 날려 보낸 가면은 파란색인 것 말고는 이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미간에 적힌 숫자도 동일했다.

    “감사합니다, 특사 대인.”

    한립의 인사를 받은 회색 인영은 말없이 손을 저었다.

    펑!

    그의 모습과 하얀 빛의 진법이 동시에 흩어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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