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4화. 붉은 달
*
그 시각, 공수홍은 안개로 여섯 마리의 거대 호랑이를 만들어내 교삼과 싸우고 있었다.
아래쪽의 혈홍색 괴인들까지 조종해야 해서인지 그의 핏빛은 어둑해졌고 교삼의 적홍색 거검을 막느라 급급했다.
“죽어라!”
교삼은 냉소하며 기운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갑자기 체구가 커진 그의 몸에 적홍색 비늘이 돋고 머리에는 두 개의 용 뿔이 생겨났다.
반인반교(半人半蛟)의 모습이 된 그의 팔뚝이 유난히 굵어졌다.
붉은 주술문자들을 토해낸 적홍색 거검은 지하의 천기원기를 미친 듯이 흡수한 채 공수홍을 베었다.
쿠아앙!
커다란 검빛이 불의 법칙을 품고 지나는 곳마다 붉은 궤적을 남겼다. 그 모습에 서둘러 물러난 공수홍이 두 개의 거대 손을 교차해 앞을 막았고, 여섯 마리 호랑이들이 입에서 진득한 핏빛 빛기둥을 쏘았다.
붉은 궤적은 가볍게 두 거대 손을 가르고 핏빛 빛기둥과 닿았다.
퍼퍼퍼퍼펑!
폭음이 연달아 들리고 핏빛 빛기둥은 물론 안개 호랑이들까지 검빛에 몰살당했다. 붉은 궤적이 순간이동을 하듯 공수홍 앞에 도달했다.
이때 붉은 궤적이 마른 장작처럼 공수홍을 베었다.
화르륵!
법칙의 힘이 공수홍을 덮쳐 주변 공기를 이글이글 끓게 만들었다. 이 공격으로 교삼의 기운도 5, 6할 정도 줄어있었다.
휘익!
모호한 핏빛 그림자가 불길을 빠져나와 마른 중년사내로 변했다. 피골이 상접하고 푸석한 누런 머리카락을 지닌 중년사내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체내의 기운이 요동치고 팔 한쪽도 잘려 있었지만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체겁술(替劫術)을 썼구나!”
교삼은 표정이 서늘해지더니 적홍색 거검에서 무시무시한 법칙파동을 일으켰다.
쿠릉!
또 한 번 거대한 검빛이 나타나 붉은 궤적으로 변해 공수홍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공수홍은 이번에는 피하지도 않고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아래쪽 호수에서 굵은 핏빛 빛기둥이 솟구쳐 붉은 궤적과 공수홍 사이를 막아섰다.
콰쾅!
붉은 궤적과 부딪친 빛기둥은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호수에서 핏빛을 흡수해 끝까지 버텨냈다. 점점 옅어지던 붉은 궤적이 도리어 빛을 잃고 펑! 하고 사라졌다.
교삼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되었다.”
공수홍은 키득거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기괴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호수의 핏물이 나선형으로 솟아올라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기운을 회복한 그는 잘려나간 왼쪽 팔마저 붉을 실들로 회복했다. 그리고 굉장한 장관이 펼쳐졌다.
호수가 거세게 출렁이더니 핏빛 기둥이 백여 개 가까이 솟아올라 거대한 진법을 형성한 것이다.
핏빛이 동굴을 가득 채우고 피비린내를 풍기는 괴이한 법칙의 힘이 동굴을 뒤덮었다.
두근, 두근, 두근.
‘……!’
혈홍색 괴인과 싸우던 한립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전신의 피가 심장으로 쏠리고 행동이 굼떠졌다.
미세하게 비틀거린 그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놀란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육곤과 교팔도 영향을 받았으나 지기화신의 힘을 끌어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화신들이 이미 축적한 신념의 힘을 상당히 잃었고 그들의 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제때 보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위쪽의 교삼도 얼굴에 기이한 핏빛 기운이 어려 멈춰 섰다. 그도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기운을 몰아내고는 꽤나 놀라는 중이었다.
쿠쿠쿵.
지하공간에서 이변이 일어나자 지상의 곤주 홍월성도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성 안으로 흘러드는 강줄기들이 부지불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조성을 하러 몰려든 인파 역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파파파파팟!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백 개에 가까운 핏빛 빛기둥이 홍월성 성벽을 따라 뿜어져 나와 성을 둘러싼 거대한 빛의 장막을 만들었다.
바람을 타고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세상에! 이, 이게 무슨 일이 랍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백성들은 물론이고 혈월자포를 걸친 중, 고계 수사들조차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핏빛 장막에 크기가 각기 다른 눈 문양이 떠올랐다.
쉬쉬쉬쉭!
눈 문양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핏빛이 방출되어 성에 혈우(血雨)가 내리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들어냈다.
핏빛에 닿은 이들은 전신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팽창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폭발했다.
잠시 후, 인파로 북적이던 홍월성에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없어졌고, 성 바닥을 촉촉하게 적신 핏물만이 지하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곤주 인근의 악주, 청주 등의 다른 지역의 홍월성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홍월도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섬 전역의 물길이 시뻘겋게 변해서 곤주의 홍월성으로 흘러가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홍월도는 검은 바닷물 위에 뜬 붉은 달처럼 붉게 물들었다.
* * *
곤주 홍월성 지하동굴.
솨아아아아.
얼룩덜룩한 동굴 벽에 느닷없이 십여 개의 구멍이 뚫려 그 안에서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공중에는 핏빛 빛기둥이 만들어낸 거대 진법이 웅웅 진동하고 있었고, 진법에서 수많은 핏빛 화염 덩어리가 날아올라 동굴의 온도를 끌어올렸다.
피의 법칙이 자욱하게 퍼져 동굴의 천지원기를 들끓게 만들었다. 공간의 법칙의 힘은 몇 배로 강력해지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교팔과 육곤이 울컥 피를 토하고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뒤로 물러났다.
거의 동시에 그들과 교전하던 혈홍색 괴인들이 들려들었다.
휘잉.
깜짝 놀란 교팔은 입에서 푸른 바람을 내뿜어 초승달 모양의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강렬한 법칙파동을 발산하는 칼날에 괴인이 세로로 쫙 갈라졌다.
그런데 두 조각난 괴인의 몸은 날아오다 그대로 교팔 뒤로 날아가 하나로 합쳐졌다.
푸확!
불시의 공격에 등을 내준 교팔은 괴인에게 초췌한 몰골의 원영을 뽑히고 말았다. 혈홍색 괴인은 괴이한 웃음을 터트리며 원영을 한입에 삼켰다.
‘이런!’
알 수 없는 이유로 체내의 법력이 굳은 육곤도 가슴이 철렁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혈홍색 괴인을 피할 방법이 없자 그는 의식을 움직였다.
이에 가까운 곳에 있던 그의 지기화신의 몸이 머리와 분리되더니 퍽! 하고 터져 남색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후우웅.
소용돌이의 흡입력이 순간적으로 괴인의 속도를 늦추었고, 지기화신의 머리는 남색 빛으로 변해 육곤과 함께 아래쪽 핏물로 첨벙 떨어져 사라졌다.
교팔과 육곤이 법칙의 힘에 당하고 있을 때 다른 쪽에서도 굉음이 그치지 않았다.
세 번째 혈홍색 괴인과 한립이 싸우는 소리였다.
한립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이를 본 공수홍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붉은 수정 실처럼 가느다란 검빛이 법칙파동을 발산하며 날아들었다.
코웃음을 친 공수홍은 소매를 털어 빛기둥 속에서 불러낸 핏빛과 호수에서 끌어올린 화염을 융합해 십여 층의 두꺼운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쿵!
붉은 검빛이 핏빛 보호막에 닿아 그중 한 겹을 깨트렸다. 치지직 거리는 소리 속에서 보호막이 한 겹씩 사라지고 있었다.
반대로 붉은 검빛도 점점 빛을 잃어 9층까지 보호막을 파괴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교삼이 기다렸다는 듯 적홍색 거검을 들어 올려 작렬하는 불의 법칙의 힘으로 주변의 핏빛을 차단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콰콰쾅!
백 개에 가까운 핏빛 빛기둥들이 번득 이동해 거대한 우리처럼 그를 가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교삼은 침착하게 손에 들고 있는 거검에 힘을 불어넣어 불의 연꽃으로 변화시켰다.
불의 연꽃에서 무수히 많은 검 그림자들이 뻗어나가 핏빛 우리를 갈랐다.
빛을 깜빡깜빡 거린 핏빛 빛기둥들은 무수히 잘려나갔지만 곧 진득한 핏물이 날아들어 우리를 복원했다.
공수홍은 조소하며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격하게 출렁인 호수의 핏물이 핏빛 화염으로 촉수들을 만들어 우리를 둘러쌌다.
교삼과 우리를 품은 핏빛 화염은 활활 타오르다 세 발 솥의 모습으로 변해 천천히 회전했다.
핏빛 솥 안에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교삼은 가부좌를 틀고 날뛰는 체내의 기운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화염이 엄청난 열기로 그의 피와 살을 녹이려 들었다.
하앗!
교삼이 춤을 추듯 열손가락을 움직여 붉은 화염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솥 안에 그의 화염 공간이 생겨 피의 법칙의 침투를 막아주었다.
“흐흐, 제아무리 용을 써 봐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화염 솥 바깥에서 공수홍이 스산하게 웃음을 흘리다 힐끗 아래쪽의 한립을 보았다.
한립은 피의 법칙으로 충만한 공간 속에서도 혈홍색 괴인과 밀리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공수홍이 의식을 움직였다.
슈슉!
다른 두 혈홍색 괴물들이 날아가 한립과 교전 중인 괴인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보고 뒤쪽으로 날아간 한립은 거리를 두고 공수홍 쪽을 살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세 혈홍색 괴인들은 협공을 하지 않고 진득하게 하나로 합쳐져 마른 중년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공수홍과 똑같은 얼굴이었고, 기운 역시 이전 괴인들보다 훨씬 강력했다.
‘저게 공수홍의 지기화신이었어!’
화신은 광포하게 울부짖다 대량의 핏물을 방출해 물 항아리 크기의 피구슬을 만들어 날렸다.
쾅!
한립이 주먹을 날려 피구슬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공간이 흔들리고 파문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피구슬이 폭발하며 대량의 법칙의 힘을 머금은 핏빛 안개를 쏟아냈다. 불길한 느낌에 한립은 피하려 했지만 핏빛 안개가 먼저 십여 개의 사슬로 변해 그의 사지를 결박했다.
두 주먹을 마구 흔들며 격렬하게 저항해 보아도 핏빛 사슬은 더욱 세게 조여 왔다.
공수홍 화신이 웃음을 흘리며 법결로 도처에 깔린 핏물을 조종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한립을 집어삼키게 만들었다.
크아앙!
하지만 다음 순간 소용돌이 안에서 낯선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굵은 금색 팔뚝 두 개가 소용돌이 속에서 쑥 빠져나와 힘껏 소용돌이를 잡아 뜯었다.
푸확!
놀랍게도 소용돌이가 흩어져 사방으로 핏물이 튀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산악거원으로 변신한 한립이었고, 팔뚝과 가슴 등 몇 곳에 상처가 나있었다. 거원은 나타나자마자 은색 화염으로 변해 거목 크기의 은색 창을 응결했다.
공수홍 화신이 굳은 얼굴로 수결을 맺어 호수의 핏물 속에서 불러낸 화염으로 비슷한 크기의 핏빛 수레바퀴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은색 창도 거원의 손을 떠나 엄청난 기세로 공수홍 화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콰쾅!
세차게 핏빛 수레바퀴를 뚫은 은색 장창은 더욱 속도를 높여 번개처럼 공수홍 화신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전력으로 화염 솥을 운용해 교삼을 녹이는데 집중하던 공수홍이 별안간 부르르 떨고 피를 토해냈다.
“안 돼!”
공수홍이 급히 고개를 숙이자 은색 창에 가슴에 뚫린 화신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발견했다.
크아아앙!
지기화신이 훼손되어 기운이 어지러워진 공수홍을 향해 아래쪽에서 하얀 파랑이 몰려들고 있었다. 방금 금털거원이 펼친 금강후였다.
하얀 기파가 허공을 왜곡해 공간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그 때문에 법칙파동이 약해진 핏빛 화염 솥 안에서 폭발적으로 용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쿠쾅!
터진 솥에서 커다란 화염 교룡이 핏빛 안개를 뚫고 나와 공수홍을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내 지기화신을 멸해 내 수행의 근본을 망가트려! 죽더라도 너희를 전부 데려가고야 말 것이다.”
광기를 드러낸 공수홍의 몸이 급격히 팽창하더니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훼멸의 기운을 풍겼다. 표정이 심각해진 한립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정염불새도 회수했다.
교삼이 변신한 화염 교룡이 그런 공수홍을 긴 몸통으로 휘감고 붉은 비늘에서 적홍색 화염을 콸콸 쏟아냈다.
작열하는 불의 법칙이 퍼져 지하동굴에 독립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영역!”
변화를 감지한 한립이 두 눈을 반짝였다. 이때 수십 배로 부풀어 오른 공수홍이 터져 태양처럼 밝은 핏빛을 발산했다.
콰르릉!
폭발의 여파로 호수 중앙의 섬은 물론 지하 공간 자체가 무너져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위의 홍월성도 내려앉아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동굴 안은 녹색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구역만이 멀쩡했다.
마름모꼴로 된 8개의 거북 갑옷 조각이 견고하게 맞물려 암녹색 보호막을 만들었고, 그 안에 체내의 현무혈맥을 발동한 한립이 암녹색 갑옷을 입고 서있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교삼이 거대한 화염 연꽃 위에 앉아 장포를 휘날리며 붉은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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