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12화 (1,269/2,000)

1512화. 격퇴

*

은색 불새를 본 구오는 겁에 질렸지만, 이를 악물고 들고 있던 바리에 연달아 정혈을 세 모금이나 흡수시켰다.

크앙!

핏물을 남김없이 빨아들인 바리가 웅웅 울어대며 붉은 빛을 방출하자, 주술문자들로 휩싸인 바리 속에서 핏물이 응결한 교룡이 날아올랐다.

교룡이 날아올라 핏물을 뿜어 대자 붉은 파도가 은색 불새를 덮쳤다.

진득한 핏물에는 검은 기운들이 섞여 있었고, 더없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겼다.

은색 불새는 그걸 보고도 멈추지 않고 날개를 펄럭여 주먹 크기의 은색 불덩이들을 마구 날렸다.

퍼퍼퍼퍼퍼펑!

치지지직!

은색 불덩이가 핏빛 파도에 부딪쳐 폭발할 때마다 은색 화염이 흘러나와 핏물을 증발시켰다.

순식간에 핏빛 파도는 숭숭 뚫린 벌집이 되었고, 결국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은색 불새는 한 줄기 은빛으로 변해 구멍을 지나 혈교와 구오를 향해 날아들었다.

“잇!”

놀란 구오는 열손가락을 미친 듯이 튕겨 법결을 날렸고, 핏빛이 진해진 혈교는 핏빛 주술문자들을 번득이며 은색 불새를 향해 날아갔다.

쾅!

표면에서 번득이던 주술문자들이 밝게 빛나던 순간, 혈교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그러자 혈교가 자폭한 기운이 진득한 핏빛 안개로 변해 불시에 은색 불새를 가두었다.

그러나 은색 불덩이는 맑은 소리를 내며 핏빛 안개를 뚫고 나와 한립에게 되돌아갔다.

불새의 빛이 이전보다 어둡고 표면에 핏빛 안개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혈교의 자폭에 원기를 상한 듯했다.

한립의 손짓에 불새의 몸에서 은색 불길이 화르륵 치솟더니 핏빛 안개를 증발 시켰고, 곧장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바리가 소환해낸 혈교는 약간이지만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고, 영성을 지닌 불새조차 오염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때 불러들이지 않았으면 크게 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번 공격으로 만만치 않게 원기를 소모한 구오는 더없이 창백해졌지만 아직도 멀쩡한 한립을 보고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때 모골이 송연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갑자기 자신의 의복 상의를 찢어내더니 양손으로 뱃가죽을 당겨 복부에 새까만 구멍을 드러낸 것이다.

자줏빛 바리는 무언가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갔고, 동시에 혈교의 폭발로 만들어진 핏빛 파랑도 구오의 뱃속 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구오는 급격히 몸집이 불어나 눈동자와 흰자위가 모두 핏빛으로 물들어 두 눈은 마치 혈홍색 보석이 두 개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왁!

의복이 찢어지며 그는 핏빛 수정 비늘로 뒤덮인 웬만한 거한보다 일고여덟 배는 큰 혈정(血晶) 거인으로 변했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광택이 흐르는 거인을 바라보고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향해 쇄도했다.

구오가 변한 거인이 그것을 보고 껄껄! 괴소를 터트리며 손바닥으로 한립의 머리를 내리쳤다.

손바닥이 날아드는 데도 한립은 피하지 않고 한 다리는 앞으로 굽히고 다른 다리는 뒤로 편 자세로 주먹을 뻗어 혈정거인의 거대한 손을 가격했다.

쿠앙!

한립은 거대한 힘에 두 발이 땅 속으로 절반이나 가라앉았다. 하지만 혈정거인도 휘청거리며 뒤쪽으로 몇 걸음이나 쿵쿵!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쉬익!

그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른 한립은 천장을 두 발로 힘껏 차고 혈정거인을 향해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렸다.

크아악!

혈정거인은 포효하며 전신에 핏빛을 일으켜 한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한립의 가슴과 배에서 남색 빛덩이 7개가 빛을 발하고 그가 뻗은 주먹에도 어렴풋이 별빛이 어렸을 때 혈정거인의 주먹과 충돌했다.

쿠쿠쿠쿠쿵!

마치 산봉우리가 붕괴하듯 혈정거인의 거대 주먹이 산산이 쪼개져 크고 작은 수정돌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한립의 주먹은 파죽지세로 거인의 주먹과 어깨를 지나 왼쪽 가슴을 날카롭게 갈라냈다.

몸 절반이 부서진 혈정거인은 우두커니 있다가 몸 전체가 와르르 부서져 혈홍색 수정돌 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한립은 혈정거인의 단전에 있던 수정돌에서 빛을 잃은 금빛 소인을 발견했다. 바로 구오의 원영이었다.

원영은 거인으로 변신하기 위해 사용한 비술 때문에 단전에 갇혀 탈출하지 못했다. 이에 그가 손을 뻗어 끌어오려는데, 원영이 펑! 하고 터져 핏빛 안개로 변하더니 아래쪽의 핏물로 흡수되어 자취를 감췄다.

구오가 공격을 시작하고 한립이 그를 처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아 머지않은 곳에서 격렬하게 대치하던 수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교팔과 교구는 기뻐하는 얼굴이 확연했고, 곱슬 수염 거한과 검은 치마 추녀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추녀는 눈빛이 달라지며 더는 육곤을 상대하지 않고 빈틈을 노려 지하 공간 중앙의 제단 위로 번득 이동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곱슬 수염 거한도 교팔과 그의 지기화신의 공격에서 벗어나 추녀의 옆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곧장 흐릿하게 핏빛 구름으로 변해 제단 위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뜻밖에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바로 도망을 친 것이다.

교팔과 교구인 육곤이 그걸 보고 지기화신을 거둔 후 한립 옆으로 다가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리해서 전투를 하느라 부상이 더 심해진 것이다.

“이전에는 제가 안목이 없어 수사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산선을 죽이다니, 대단하십니다.”

육곤은 복잡한 눈빛으로 한립을 칭찬했다.

“수사 덕에 나머지 두 놈이 달아나지 않았으면 장기전으로 가서 우리에게 불리해졌을 겁니다. 이 일은 반드시 교삼 대인께 고하지요.”

교팔도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야 물론입니다. 저도 돌아가는 대로 교삼 대인께 교십오의 공로를 알리겠습니다. 그런데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육곤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교십육이 선기를 이용했는데도 금제를 뚫을 수 없었고, 도리어 괴이한 핏빛이 반격을 가했습니다. 단시간 내에 완력으로 금제를 뚫는 것은 어려울 듯하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적들도 잠시 물러난 것에 불과하고 그들 배후에는 아직 공수홍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텐데요?”

교팔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교십오, 천수성에서 핏빛 공간을 파훼했던 것이 그저 운이 좋아서만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수사께서 이곳 진법의 약점을 탐색해 주시면, 그동안 저는 교삼 대인에게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육곤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곤은 두 눈을 감고 얼굴에 쓴 양머리 가면 위로 남색 파문을 일으켰고, 교팔은 몸을 돌려 지하 공간 곳곳에 흩어진 다른 수사들의 저물 법기를 수색했다.

한립은 힐끗 교팔을 보고는 별다른 말없이 눈에서 강렬한 남색 빛을 분출해 주위를 꼼꼼하게 훑기 시작했다.

지하 공간은 수많은 이들이 흘린 진득한 핏물로 가득했고, 돌기둥과 벽에는 피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핏빛 꽃이 섬뜩하게 피어있었다.

그들과 머지않은 곳에는 전신이 핏빛으로 물든 조각상이 지하공간을 음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사방의 벽은 물론 조각상에서도 진법의 허점은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육곤이 천천이 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교삼 대인 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지하 공간이 무척 괴이합니다. 금제가 피의 법칙을 함유하고 있는데다 오랜 세월 선혈로 배양한 공간이라 약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교팔이 돌아와 입을 열었다.

“무상맹의 다른 수사들과 산선들의 저물 법기를 모아왔습니다. 얼른 나눠 갖고 앞으로의 위기에 대비하시지요.”

그의 손에는 저물대 몇 개와 저물탁 두 개가 들려있었다.

죽은 여섯 산선들이 모아둔 물건이 적지 않았고, 영단과 재료는 물론 영보와 법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한립의 공이 있기에 보물들 중 유일한 선기인 교십육의 검은 송곳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교팔과 육곤도 보물이 탐났지만 서로의 손에 선기가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해 한립에게 내준 것이다.

한립도 그런 속내를 알아 다른 재료들을 나눌 때는 다른 두 수사의 몫을 넉넉하게 챙겨주어 그들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전리품 분배를 마친 이들은 출구를 찾기 위해 흩어졌다. 이 괴상한 지하공간에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한립은 조각상과 백여 장 떨어진 공간부터 명청령안을 이용해 차례로 조사했고, 교팔과 육곤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각자 비술을 발동해 다른 곳을 살폈다.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자 육곤과 교팔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쿠릉!

바로 그때, 갑작스레 공간이 흔들리는 이변이 발생했다.

꿀렁꿀렁.

지면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진득한 핏빛 구름들이 용솟음쳐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눈앞이 캄캄해진 순간 이미 핏빛 구름에 갇혔고, 몸을 가누었을 때에는 또 다른 낯선 거대 공간 속에 있었다.

이전에 있던 지하보다 몇 배는 더 거대했고, 커다란 핏빛 호수에서는 부글부글 기포가 끓어올랐다.

기포가 터질 때마다 혈홍색 안개가 터져 나와 지하 굴을 짙은 혈무(血霧)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핏빛 호수 가운데에는 평평한 섬이 하나 있었는데, 마치 호수 한가운데 건축된 거대 광장처럼 보였다.

한립, 교팔 그리고 육곤이 위치한 곳이 바로 그 광장 위였다.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궁전은 짙은 핏빛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흐릿하게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대 지하 굴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 아주 고요했고, 호수의 핏물이 보글거리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려왔다.

한립은 즉시 의식을 방출해 주변 환경을 둘러보려다 안색이 달라졌다. 그들을 휩싸고 있는 혈홍색 안개 속에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어 의식을 밖으로 방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팔과 육곤도 어두운 표정으로 상황을 살펴보다 교팔이 먼저 지기화신을 방출했다. 이에 육곤이 입을 열려는 데 한립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래쪽을 조심하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사람의 발밑에서 핏빛 뼈다귀 거대 손들이 뻗어 나와 그들의 다리를 노렸다.

쉬쉬쉭!

세 사람은 신속히 땅을 박차고 허공에 떠올라 뼈다귀 거대 손들은 허탕을 쳤지만, 땅속에서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커다란 핏빛 해골 수백 마리가 튀어나왔다.

키에엑!

각각의 해골들은 합체기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발산했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출렁이는 섬 주변의 핏물 속에서 혈홍색 괴물들이 빠져나왔다.

여인의 얼굴을 하고 핏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괴물들은 박쥐 날개에 뱀의 하반신을 지니고 있었다.

해골들과 비슷한 기운을 지닌 반인반사(半人半蛇)의 괴물들 역시 핏빛으로 변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순식간에 천여 마리나 되는 해골과 괴물들이 물샐틈없이 그들을 포위했다.

세 수사들은 안색이 달라졌고, 그 중 교팔이 먼저 지기화신을 불러내 강렬한 푸른빛을 발산했다.

태양처럼 반짝이는 지기화신은 두 팔을 휘둘러 네 마리의 거대한 푸른 풍룡들을 날려 보냈다.

휘잉!

열댓 마리의 해골들과 뱀 여인들이 풍룡과 부딪쳐 날아갔다. 그중 대다수는 몸이 찢겨 나갔지만 일부는 주위의 핏빛 안개로 흘러 들어가 상처를 빠르게 회복했다.

그 모습에 교팔이 인상을 찡그렸다.

네 마리 풍룡은 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그가 법칙의 힘으로 응결해낸 것이었다. 대승기 수사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을 해골과 뱀 여인들이 맞고 멀쩡하게 회복되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