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화. 구오
*
“후우…….”
한립은 귓가에 쿵쿵 울려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눈을 감았다. 현선이 되어 선도에 올랐지만 사람의 육체의 근간은 본래 심장이었다.
괴이한 심박은 강해지고 빨라지면서도 묘한 규칙성이 있었고 교십육의 육체가 터지는 순간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떠올랐다.
교구는 교십육이 죽은 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점점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미 지기화신의 신념의 힘과 법칙의 힘까지 거두어들였지만 핏빛이 함유한 괴이한 법칙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쿵쿵쿵쿵…….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한계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교구는 속으로 노호성을 터트렸지만 마음만 급할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소리도 지를 수 없어 자신의 보호막이 점점 암담해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퍽!
이때, 홀연히 주먹이 날아들어 그의 보호막을 뚫고 등 뒤에서 심장을 때렸다. 주먹에서 뻗어 나온 힘이 그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주먹에서 전해진 힘은 목화솜처럼 부드러웠지만 일정치 않은 기복을 지니고 있어 심장이 뛰던 규칙성을 깨트리고, 체내의 괴이한 힘을 대부분 흩어버렸다.
푸확!
교구는 피를 토해내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교십오!’
언제 나타났는지 한립은 천천히 팔을 거두고 있었다.
상대가 어떻게 일격으로 법칙의 힘을 파훼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감격한 얼굴로 한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벽에 나타났던 혈목들도 서서히 눈을 감고 공간 전체를 감돌던 핏빛 기운도 흩어지고 있었다.
‘핏빛 문양과 빛의 장막은 남아 있군.’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온 한립과 교구는 죽었다 살아난 느낌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누군가 천천히 내려오는데 전신이 피로 물든 처참한 몰골의 교팔이었다.
원기를 크게 상했어도 광포한 피의 법칙을 견딘 것을 보면 그가 수련한 법칙의 힘에 특별한 구석이 있는 듯했다.
이제 지하 공간에는 그들 셋을 제외하면 살아남은 이가 없었고 숨 막히는 피비린내만 가득했다.
살아남기에 급급해 주변 상황을 살필 여력이 없던 한립과 교구는 교팔 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교팔만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나머지는 갖은 방법을 쓰다 목숨을 잃은 것이 확실했다. 다시 말해 조금 전 사태로 네 명의 진선급 수사가 죽었다는 소리였다.
중앙 제단에 서있던 키 작은 사내도 사라졌고, 그 아래로 암담하게 변한 핏빛 깃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립은 키 작은 수사의 실종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곰곰이 상황을 정리했다. 함정으로 그들을 유인한 것은 홍월도 도주 공수홍일 확률이 높았다.
산선인 수하까지 희생시킬 정도로 잔혹한 방법을 썼다는 것은 그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머리를 굴린 그는 얼른 단약 몇 개를 집어삼키고 운공을 했다.
상대가 쉽게 자신들을 보내주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교십오,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여러 단약을 삼켜 안색이 나아진 교구는 한립을 향해 손을 보아 인사를 올렸다.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뻗자, 옆에 서있던 흑색 장포 노인의 몸이 쪼그라들어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함께 위험에 처했는데 돕는 게 당연하지요.”
한립은 상대방이 지기화신을 방출한 것을 보았음에도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답했다. 조금 전 화신과는 손속을 겨룬 적도 있었다.
바로 한구와 같이 나타났던 오몽도 육곤 노조의 화신이었다.
육곤 노조가 무상맹의 저계 회원 중 한명이고, 공교롭게도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교팔도 얼른 날아와 한립과 교구를 향해 공수를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하아, 우리가 공수홍의 계략에 당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공수홍이 수련한 공법이 괴이하다는 것은 들었지만 섬 안의 범인들과 수사들을 도륙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교구는 이를 갈며 답했다.
“아직 완전히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니 이곳을 빠져나간 후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죠.”
한립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명이나 살아남았을 줄이야. 무상맹은 강자가 수두룩하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쿠르릉!
공간 중앙 제단이 무너져 내리고 등장한 동굴 속에서 핏빛 구름이 빠져나왔다.
구름 속에서 나타난 세 명은, 자색 장포의 노인과 혈월자포를 걸친 중년 거한 그리고 지나치게 뚱뚱한 검은 치마를 입은 부인이었다.
거한은 구불구불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여인의 용모는 그보다 더 추했다.
세 사람은 전부 진선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만 따지면 중년 거한이 가장 강해 보였다.
“지난번 천수성에서 갑자기 혈망공간을 깬 자가 저 녀석입니다. 그때는 우연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실력이 제법인 듯하군요.”
자색 장포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립을 가리켰다.
“구오 수사, 그리 흥미로우면 저자는 수사가 맡으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검은 치마 추녀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 저야 좋습니다!”
곱슬 수염 거한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립 일행도 상대를 살피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진성경 초기의 산선들이라 원래는 붙어볼 만했으나, 지금은 한립을 제외한 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저 셋도, 공수홍이 데리고 있는 산선 수하들인 것 같습니다.”
교팔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며 한립과 교구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오래 머물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도 붉은 문양이 반짝이는 벽을 본 한립이 답했다.
“반드시 속전속결하고 떠나야 하니, 더 이상 실력을 숨기지 맙시다.”
교구의 탄식 섞인 말이 끝날 무렵 곱슬 거한이 먼저 달려들었다. 그들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한립 일행 주변으로 파동이 일고 백여 개의 핏빛 칼날들이 쇄도했다.
눈을 번득인 한립은 한 걸음 물러서며 주먹을 허리춤에서부터 내질렀다.
후두두둑!
무형의 힘이 공간을 가르고 전방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핏빛 칼날들이 엄청난 힘에 밀려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핏빛이 가시기도 전에 구오와 그 일행들이 흩어져 각자 점찍어 둔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교팔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곱슬 수염 거한을 보고 부상을 개의치 않고 수결을 맺었다.
그의 몸에서 찬란한 남색 빛이 날아올라 하얀 장포를 입은 수척한 사내로 변했다.
수척한 사내는 언뜻 보면 교팔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청록색 피부를 지녔고 전신이 푸른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후읍!
교팔의 지기화신은 나타나자마자 교팔의 앞을 막아서고 앞쪽을 향해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찰나의 순간 돌풍이 일고 하얀 기류가 사방팔방에서 몰려들어 나팔 형태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후욱!
화신은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다시 한번 숨을 내뱉어 푸른 기파를 날렸다. 기파는 허공에서 커다란 푸른 풍룡으로 변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곱슬 수염 거한이 입가에 비웃음을 지으며 대충 주먹을 갈겼다.
어느샌가 그 주먹에 백골로 만들어진 장갑이 씌워져 악귀처럼 거대한 주먹 허상을 내뿜었다.
쾅!
푸른 청룡과 악귀 주먹 허상이 동시에 폭발해 수많은 바람의 칼날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티티티티티팅!
지하 공간의 바닥이며 벽 돌기둥이 두부처럼 바람의 칼날에 베여나갔다.
곱슬 거한은 전신에 옅은 핏빛을 두르고 바람을 칼날을 피하지도 않은 채 교팔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바람의 칼날은 그의 핏빛을 전혀 뚫지 못했다.
교팔은 이를 악물고 지기화신과 함께 뛰어올랐다.
다른 쪽에서 검은 치마 추녀가 육곤과 한차례 격렬히 충돌한 후, 검은 안개를 두르고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발밑에서 검은 연꽃을 불러내 떠올랐다.
그녀가 내려서려던 바닥에는 검은 인영이 남색 물의 검을 든 채 솟구치고 있었다.
육곤은 암습이 실패하자 얼른 흑색 장포 노인을 불러들이고 추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구오가 묘한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부터 평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현선이었구나! 마침 혈괴뢰를 제련하는데 마땅한 육체가 없었는데 네 진극체가 딱이겠어.”
그 말에 한립은 입술을 꿈틀댔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주먹만 쥐어보였다. 그 모습에 자색 장포 노인의 눈꼬리가 떨리고 눈빛이 살기등등해졌다.
노인의 손이 뒤집히자 자줏빛 바리가 떠올랐고 그 안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그가 주문을 외자 핏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수면에 악귀 얼굴들이 떠올라 서로 바리를 벗어나려 난리법석을 떨었다.
“가라.”
구오의 명령에 바리에서 대량의 핏물이 치솟아 거대한 핏빛 물결로 한립을 뒤덮으려 들었다.
크하학!
케엑! 키에에엑!
저승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처절한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마치 방금 죽은 모든 범인들과 수사들이 전부 악귀가 되어 원념과 살기를 방출하는 것 같았다.
짙은 피비린내와 음혼들의 기운에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손에서 노란 거울을 불러내 둥근 보호막을 만들었고 핏빛 물결이 그 위로 밀려들었다.
콰쾅!
잠시 흔들리던 노란 보호막은 금방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핏빛 물결에 물든 보호막 표면에서 치지직! 하며 하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보호막이 녹자 허공에 떠있던 노란 거울도 사정없이 흔들거리다 챙강! 깨져나갔다.
출렁!
노란 보호막이 사라지자 핏빛 물결은 단숨에 한립을 집어삼켰다. 그는 눈앞이 새빨갛게 변해 핏빛 망망대해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진극체는 여전히 은은한 빛을 발산했지만 미세하게 핏빛에 오염이 되고 있었고, 사방에서 온갖 음혼들이 몰려들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각양각색의 음혼들이 흉신악살의 모습을 하고 그를 할퀴고 깨물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두 팔을 움직여 무수히 많은 주먹 허상으로 백여 마리의 음혼들을 쳐내고 전신을 금색 비늘로 뒤덮였다. 신형도 머리 하나는 커서 핏물 속에서 곧장 뛰쳐나올 수 있을 듯했다.
“어딜 달아나려고!”
구오가 그걸 보고 손바닥에 핏빛을 일으켜 바리를 때렸다. 동시에 주술문자들이 잔뜩 날아올라 한립을 가둔 핏빛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쿠릉!
한립 주변 핏물들이 급속도로 회전을 하며 들끓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핏물의 온도가 웬만한 용암보다 뜨거워져 한립의 피부와 금빛비늘을 붉게 달구었다.
핏물의 끌어당기는 힘도 몇 배로 증가해 뛰쳐나갈 수가 없었다.
표정을 굳힌 한립의 손바닥 위로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은색 불새 한 마리가 튀어나와 불길로 그를 감쌌다.
은색 화염이 가로막은 덕에 뜨거운 핏물은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은색 화염이 어찌나 뜨거운지 핏물들이 거꾸로 증발했고,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공간이 생겨났다.
“당신에게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립은 힘껏 허공을 박차고 핏빛 소용돌이를 빠져나와 당장 주먹을 뻗었다.
깜짝 놀란 구오가 두 손을 다급히 움직여 수결을 맺었고, 바리가 몇 배로 불어나 주술문자가 가득한 검은 빛으로 그의 앞을 막아 주었다.
쿠앙!
자색 장포 노인의 검은 보호막이 주먹 한 방에 깨진 것은 물론 바리까지 금이 가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욱!”
구오는 가슴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을 흘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균열이 간 바리를 매만지다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휘익!
구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색 불새가 꼬리 뒤로 기다란 화염을 늘어트리며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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