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화.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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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과 교십육은 산선에게서 시선을 떼고 조각상 뒤편을 바라보았다. 거의 구겨지다시피 빼곡하게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 교구가 보였다.
그도 한립과 교십육을 보고 막 이동하려는데 제단 위 산선이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폈다.
“모두…….”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지하공간이 고요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중앙으로 모였다. 이에 분위기는 다시금 더없이 엄숙해졌다.
“선발 의식이 끝났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성심으로 성주님을 봉양했으니 성주님의 은혜를 입어 다시없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건장한 사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환호성이 차츰 줄어들고 지하공간이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어진 성주께서 너희를 위해 선문을 개방하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수도의 비술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너희는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며 성주님의 강림을 기원하라.”
이 말에 모든 이들이 두 손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눈을 감았다. 교십육도 희색을 드러내고 한립과 교구에게 전음을 보냈다.
“공수홍이 오려나 봅니다! 이제 교삼 대인께 알려야 하게 않겠습니까?”
한립은 교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쿠릉!
그때, 중앙의 조각상이 떨리고 두 눈에서 붉은빛을 반짝였다. 한립 일행도 분분히 조각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주님의 강림을 맞이합니다.”
“성주님의 강림을 맞이합니다!”
키 작은 사내가 조각상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몸을 숙이며 외쳤다.
그러나 한립은 살짝 허리를 숙여 조각상이 아닌 키 작은 사내를 주시했다. 예를 올리는 척하며 사내는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조각상의 눈에서 핏빛이 번득이고 붉은 빛줄기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카카카캉!
이어서 조각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붉은 빛줄기로 모인 이들을 꼼꼼하게 훑었다.
한립은 붉은 빛이 자신을 향할 때 의식 한 줄기가 살짝 머물렀다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의식의 주인은 조각상이 아니라 보라색 장포의 키 작은 사내였다. 교구가 한립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조가 강림했다는 것은 헛소리고, 스스로 의식을 방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주의 이름을 빌려 의식을 진행 중인 듯합니다. 당연히 공수홍은 나타나지 않겠지요.”
한립이 대답하고 조각상을 바라보자 두 줄기의 붉은 빛기둥이 청년의 모습을 한 두 사내에게서 멈추었다. 그들은 감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산선에게로 다가갔다.
한립이 힐끗 보니 두 청년은 축기기 수행에 영근 자질이 썩 나쁘지 않았다. 붉은 빛줄기는 그 뒤로도 사람들을 꼼꼼하게 훑었다.
잠시 후 허약해 보이는 소년과 청수한 얼굴의 소년이 선택되었고 역시 그들도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붉은 빛줄기의 선택을 받은 젊은 남녀들은 산선의 인도를 받아 조각상 옆의 제단으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모인 이가 벌써 이백여 명은 되었다. 수행 자질로 따졌을 때 지하공간으로 이동한 수만 명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재들이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이 교구와 교십육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곳은 성조를 만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홍월도에서 혈제가 치러지는 곳 중 하나일 겁니다.”
“뭐라고요?”
“교십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교구와 교십육이 깜짝 놀라 한립을 보았다.
“이곳은 물론 다른 홍월성의 지하공간에는 피비린내와 음기가 가득했습니다. 수시로 생령들을 도륙해온 것이겠지요. 이곳으로 전송된 자들은 수사가 아니면 영근 자질이 뛰어나 혈기가 왕성한 범인들이었습니다. 제물로 쓰기에 적당하지 않습니까?”
“공수홍이 수련한 것이 피의 법칙이라더니 이런 사악한 수법을 쓴단 말입니까? 생령의 피로 수련을 한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바로 혈제를 진행하지 않고 한 번 더 선별한 것입니까?”
교십육과 교구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짐작대로라면 선발된 이들 중 자질이 최상인 자들은 따로 모아 고계 수사들로 양성이 될 겁니다. 공수홍이 섬을 관리하고 혈제의 비밀을 지킬 수 있게 혼백에 금제를 심은 다음에요. 나머지야, 진정한 선발이 끝나면 혈제의 제물이 되겠지요.”
“아직 시간이 있는 듯하니 저자를 잡아 이곳을 떠나면 되겠습니다.”
교구가 키 작은 사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전음을 보냈다.
웅웅웅웅!
그런데 그의 말과 달리 공간이 바로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에 핏빛 문양들이 거미줄처럼 떠올라 곳곳에서 핏빛 꽃이 피어나듯 수많은 눈들이 번쩍 뜨여 섬뜩하게 공간 안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피비린내가 갑자기 열 배는 짙어지고 지하 공간 안 사람들도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쉬쉬쉬쉬쉬쉭!
교구가 막 입을 떼려는데, 수많은 핏빛 눈동자에서 핏빛이 뿜어져 나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핏빛은 희미하게 법칙파동을 품고 있었다.
깜짝 놀란 한립 일행은 핏빛이 좋지 않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 조치를 취했다.
한립은 억눌러 두었던 의식을 움직여 피부 전체에 수정빛이 흐르게 만들고 노란 거울과 푸른 여의를 꺼내 노란 빛과 푸른빛으로 몸을 보호했다.
두 법보는 한정족 대승기 수사를 죽이고 얻은 것으로 다시 제련해 줄곧 갖고 다니던 것이었다. 교구의 반응도 빨라서 얼른 수결을 맺어 남색 물결로 겹겹이 보호막을 펼쳤다.
교십육은 푸른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도는 보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푸른 빛구슬이 그를 보호하게 했다.
“어, 어째서!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을 선발하던 키 작은 사내는 핏빛 눈들이 등장하자 경악했다. 핏빛을 보고 몸을 떨던 그는 핏빛 깃발을 뿜어 보호막을 펼쳤다.
핏빛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한립 일행이 법보로 만들어낸 보호막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핏빛은 모든 것을 뚫고 그들의 체내로 들어왔다.
‘엇!’
안색이 급변한 한립은 급히 의식으로 몸을 살폈다. 몸속으로 들어간 핏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쿵쿵……. 쿵쿵…….
심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렬하고 빨리 뛰었다!
체내의 피도 몇 배로 빠르게 돌기 시작해서 전신의 경맥이 과열되고 단전의 법력조차 영향을 받아 불안정해졌다.
교구, 교십육도 놀란 것을 보면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큭, 이게 뭐야!”
“괴, 괴로워…….”
“크악!”
“꺅!”
동시다발적으로 처절한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범인들과 저계 수사들은 온몸이 시뻘겋게 변해 부들부들 떨다 펑, 하고 몸이 터져 진득한 핏빛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수많은 이들이 터져 지하공간이 핏빛 안개로 뿌옇게 차올랐다.
핏빛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핏빛 안개가 급속도로 모여들어 구름을 형성했고, 갑자기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한립 일행과 멀리 떨어진 곳에는 네 명이 더 보였는데 바로 교팔 무리였다. 그들도 이곳에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교구와 교십육은 그걸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동료가 많을수록 힘을 합쳐 곤경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허공의 핏빛 구름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진 한립은 전신에서 푸른 기운을 일으켰다.
법력을 운용해 비술로 체내의 이상을 억제할 작정이었다. 안타깝게도 무슨 수를 써도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고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무형의 힘이 몸속을 헤집고 다니며 심장에 압박을 가했고 또 다른 힘이 그것을 막으며 팽창했다.
한립의 피부에도 괴이하게 핏빛이 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교구, 교십육 심지어 교팔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것은 제단 위의 키 작은 사내마저 그들과 같은 증상을 겪는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들은 잠입에 성공했다고 여겼지만 공수홍이 벌써 그들을 발견하고 혈제 장소로 유인했고, 작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수하인 산선마저 희생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의 핏빛 눈들은 아직도 깜빡거리며 지속적으로 핏빛을 쏘아댔다. 다들 열심히 피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일부는 맞아야 했다.
핏빛이 몸속으로 들어오면 또 괴이한 법칙의 힘이 심장 박동을 가속시켰다. 지하 공간에 갇힌 모든 이들이 심장에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나마 일곱 수사 중 한립의 상황이 가장 나았다. 이미 진극체를 이룬 그의 몸은 심장도 일반 수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아직 버틸 만은 했다. 표정이 어두워진 교구는 더는 법력을 아끼지 않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남색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얇은 보호막을 이루고 강렬한 물의 법칙 파동을 발생시켰다.
사방에서 날아든 핏빛들 중 일부가 남색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법칙의 힘은 역시 법칙의 힘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었어.’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와 교구는 그리 위험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교십팔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겹겹이 보호막을 두르고 온갖 수단을 다 썼는데도 몸이 미세하게 부풀어 오르고 피부와 눈, 코, 입에서 핏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교구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고 남색 빛을 일으켜 위쪽으로 날아올랐고 교십육이 그 뒤를 쫓았다.
아직 핏빛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한립도 이런 괴이한 곳에 오래 머물 마음은 없었다. 그가 날아가고 멀리 교팔 일행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둔광을 일으켰다.
교구는 맹렬히 팔을 휘둘러 남색 비도를 날렸다.
쿠콰쾅!
날카로운 비도가 천장의 석벽을 때린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대량의 핏빛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많은 주술문자를 품은 빛의 장막을 형성했다.
탱!
남색 비도에 공격당한 핏빛 장막은 멀쩡했지만 교구의 안색은 달라졌다.
파앗!
그걸 본 교십육이 삼각뿔 형태의 검은 송곳을 불러내 정혈을 흡수시켰다. 검은 송곳은 쾌속으로 회전하며 검은빛과 함께 깨알 크기의 주술문자들을 내뿜었다.
송곳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뱀처럼 모여들고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콰르릉!
검은 뇌전이 닿은 공간은 극심하게 흔들렸고 검은 파문이 일었다.
“가라!”
교십육이 손을 뻗자 송곳이 쾅! 하고 튀어나가 핏빛 장막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교구도 수결을 맺어 남색 장도에 주술문자가 어리게 만들었고 한립의 두 주먹에서도 빽빽하게 주먹허상이 날아가 핏빛 장막을 때렸다.
쿠콰콰콰쾅쾅!
깜빡깜빡 거리던 핏빛 장막이 움푹 파였지만 깨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때 공간 벽의 핏빛 문양들이 돌연 밝은 빛을 내뿜고 허공의 핏빛 구름에서 꿀렁꿀렁 뱀들이 나타나 벽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별안간 허공의 핏빛 구름이 싹 사라지고 벽의 핏빛 문양과 괴이한 핏빛 눈들만 커다랗게 변했다.
또한 한립 일행을 막아선 천장의 핏빛 장막도 눈에 띄게 단단해졌고, 세 사람이 공격해 움푹 들어간 부분이 요란한 빛을 발했다.
퍼퍼펑!
검은 송곳, 남색 장도가 튕겨나가고 한립도 반탄력으로 인해 움찔 물러났다.
그들이 다른 수를 쓰기 전에 거대 혈목(血目)들이 더 진한 핏빛을 뿜어 지하공간을 붉게 물들였다.
쿵! 쿵! 쿵! 쿵! 쿵!
한립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법칙의 힘에 심장이 몇 배는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강력한 신체를 지닌 그도 오래 견디기 힘들었다.
파아앗!
한립은 낮게 기합을 넣고는 전력으로 소북두성원공을 운용해 가슴에 7개의 별빛이 반짝였고 전신은 별빛에 휩싸였다.
근육과 뼈가 쇠처럼 단단하게 변하고 심장 박동도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미 얼굴이 흙색이 된 교구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전신에 남색 빛을 일으켜 몸속에서 검은빛을 내보냈다.
검은빛은 눈부신 남색 보호막을 두른 흑색 장포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보호막에 어른거리는 주술문자들은 강렬한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다.
교구의 손짓에 흑색 장포 노인의 남색 보호막이 흩어져 그를 향해 스며들었고, 법칙의 힘으로 강화된 보호막 덕에 핏빛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한립, 교구와 달리 교십육은 엄청난 육체를 지니지도 못했고 산선의 수행으로 법칙의 힘을 발동해 몸을 보호하지도 못해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강렬한 법칙의 힘이 내부에서 심장으로 치고 올라왔다.
푸확!
결국 교십육은 심장이 퍽! 터져 내장조각이 섞인 피를 뿜으며 쓰러졌고, 그가 조종하던 검은 송곳도 빛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교십육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몸이 급속도로 부풀어 폭발했다. 대량의 핏빛 안개와 놀라운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교십육은 육체는 물론 원영까지 피의 법칙의 힘에 침식을 받아 터지고 만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핏빛 안개도 수십 가닥으로 변해 주변 벽으로 흡수되었고 공간의 법칙의 힘은 그만큼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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