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화.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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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알아보셨군요. 이전 지도에는 큰 강과 물줄기들이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맹에서 나눠준 지도에 물길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건 제가 오는 동안 만난 크고 작은 물줄기들을 그려 넣은 지도입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며칠간 성에 들어갈 때마다 성의 지리환경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고대 지도에서 크고 작은 물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건…….”
“시간이 얼마 없어 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모두 보셨다시피 우리가 지나온 홍월성들과 다른 거대성들은 전부 수맥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립의 설명에 다른 수사들도 거대 성 안팎에 보이던 큰 호수나 강을 떠올렸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물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홍월도가 아닌 다른 섬들도 큰 강과 호수 주변에 성을 짓는 경우가 많고요.”
교십삼이 의문을 제기했다.
“조금 전 성 안 서책방의 장궤에게 미혼술을 걸어, 섬의 모든 서적과 지도에 물줄기의 흐름을 표시하는 것이 엄하게 금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명령은 성주, 그러니까 공수홍이 친히 내린 명령이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홍원도 도주가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곳에서 모든 물줄기가 모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립은 손을 뻗어 지도에 나타난 한 성을 가리켰다. 바로 곤주(坤州)의 홍월성이었다!
“모두 추측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이곳에 공수홍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교이십오가 반박했다.
“저도 확신할 수 없지만 무턱대고 아무 곳이나 뒤지는 것보다는 이곳을 먼저 살피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한립은 평온하게 답했다. 교이십오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리가 있습니다! 교십오 수사 덕분에 막막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교이십오와 반대로 교구는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7명이 같이 움직인 이래 드디어 교팔 무리를 압도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교십오의 말씀이 맞습니다! 28개에 달하는 각 주의 홍월성을 차례대로 다 돌아다니다가는 어느 세월에 공수홍을 찾겠습니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일 수도 있고요.”
교십육도 뿌듯한 얼굴로 동의했다.
“아하하. 교십오 수사의 추측이 그럴듯합니다. 우선 곤주 쪽으로 가보시지요.”
침묵하던 교팔도 웃음을 흘리며 대세에 따랐다.
* * *
며칠 후, 홍월도 중부에 굵직한 둔광 두 줄기가 수풀로 떨어졌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두 척의 배와 7명의 수사들로, 각기 다른 동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전방에 곤주의 홍월성입니다. 이곳도 조성 의식을 진행 중인 듯하고요.”
교팔이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성을 가리켰다. 한립은 커다란 등불이 거대 성을 밝히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적홍색 불길은 영롱하게 밤하늘을 비추어 하늘까지 붉게 물들였고, 섬 주변의 남색 금제도 등불 때문인지 미묘하게 암홍색으로 번들거렸다.
“성의 규모가 상당합니다. 정말 공수홍이 숨어 있을 수도 있겠어요.”
“들어가서 확인하시죠.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 안으로 들어가면 광범위하게 의식을 퍼트리는 것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구의 말에 교팔이 얼른 입을 놀렸다.
곧 가면으로 용모를 바꾼 이들은 야행용 검은 삿갓을 푹 눌러쓰고 묵묵히 홍월성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때 곤주 홍월성은 성의 네 문을 개방하고 성 중앙으로 통하는 대로 양쪽에 붉은 등롱을 걸어 길을 비추고 있었다.
성의 문으로 통하는 길을 지금 이 시간에도 수천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홍월성 조성에 참가하러 왔으나 각기 다른 이유로 늦어 걸음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7명의 수사들도 두 무리로 나뉘어 성문을 통해 홍월성으로 진입했다.
한립과 교구, 교십육은 남쪽 성문으로 들어가 인파를 따라 성 중앙으로 향했다.
엄숙한 분위기는 여전했고 조성을 드리러 온 이들은 다들 양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한 채로 묵묵히 길을 걸었다.
성 중앙에 가까이 가서야 조그맣게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마치 파도소리처럼 고르게 들려왔다.
성 중앙으로 향하는 큰길은 거의 수백만 인파로 가득 차 있었고 한립 일행을 비롯해 남문에서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안쪽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립 일행은 미꾸라지처럼 사람들을 피해가며 광장으로 향해 적잖은 이들의 노기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어차피 그들은 범인에 불과했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기 급급해 그들을 막고 따지는 이들은 없었다.
체격이 좋은 한립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머리 하나는 튀어나와 있어 다른 이들보다 먼저 광장 중앙의 거대 조각상을 볼 수 있었다.
조각상은 특수한 재질을 쓴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등불 때문인지 괴이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조각상 허공에는 핏빛 초승달 도안이 수놓아진 짙은 남색 비단 장포를 걸친 7명의 인영이 떠 있었다.
주위의 빛과 거대 조각상의 빛이 그들을 비추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사실 인자한 얼굴의 백발노인이 대승 후기 수사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합체기 수행에 불과했다.
한립이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데 불쑥 교십육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저들이라도 먼저 제압해 볼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교구가 그를 보며 주저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고공의 초승달이 서서히 하늘 중앙으로 이동하고 주위의 웅성거리는 기도 소리가 가라앉았다.
허공에 뜬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 마치 백성들을 다스리는 고관이라도 된 듯 광장을 훑고 입을 열었다.
“성주님의 은혜로 중생들이 복을 누리고 있다. 진심을 다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만이 선발의 영광을 누릴지니! 갑자천선(甲子天選)을 시작하겠다. 모두 신실하게 성주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우와아아!”
노인의 말이 끝나자 광장 전역에서 우레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얼마 후 광장은 다시 고요해지고 다들 기대감 어린 얼굴로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한립 일행도 당연히 그들을 따라 기도하는 척했다.
이때 광장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정체 모를 진법이 발동하려는 듯 기이한 기운을 풍겼다. 이에 살짝 고개를 든 한립은 남색으로 빛나는 눈으로 인파를 투시해 지면을 관찰했다.
백석 바닥에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복잡한 문양들이 얼기설기 뒤엉켜 있었다.
웅!
광장 전체에 수백 줄기의 붉은 빛기둥이 솟아올라 홍월도 백성들을 뒤덮었다. 한립은 주변을 살피고 조금 놀랐다.
붉은 빛기둥에 둘러싸인 이들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지인이나 가족이 붉은 빛기둥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거나 질투와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한립은 이게 뭔가 싶어 교구와 교십육을 보았는데 그들의 얼굴에도 의혹이 가득했다.
다른 홍월성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었다. 침음하던 한립은 무언가를 보고 나머지 두 수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들이 성주가 선발해 남겨둔다는 이들이겠군요.”
“아마도요……. 저들을 따라가면 홍월도 도주의 소식을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교구가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들은 사실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립은 씩 웃고 있었다.
“아, 전부 저계 수사거나 아니면 영근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수사의 뜻은 우리도 저계 수사로 속여 저들과 같이 전송되게 하자는 것이겠지요?”
붉은 빛기둥에 휩싸인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낸 교십육과 교구가 번갈아 가며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의 수행에 이 정도 진법을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요.”
“저기, 전송 지점이 공수홍과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데 교팔 무리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잠입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망설이는 교십육의 말을 교구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는 곧바로 가면을 가볍게 쓸어 무형의 파동을 퍼트렸다.
그의 용모는 그대로였지만 기운이 달라져 축기기 정도의 수행을 지닌 저계 수사처럼 느껴졌다.
한립과 교십육도 자신의 기운을 축기기 수준으로 조정했다. 그런데 반각이 흘러도 그들 발밑으로는 붉은 빛줄기가 치솟지 않았다.
“왜 전송이 안 되는 거죠? 설마 갑자천선이 정말 무작위로 이루어졌던 것일까요?”
참다못해 교구가 전음을 보냈다.
“조급해 마시고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 선발이 끝날 때까지 전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좁은 범위에서 의식을 퍼트려 전송 장소를 탐색하면 될 것입니다.”
생각 끝에 한립이 대답을 했고, 교구는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팟!
바로 그 순간, 교구의 발밑에 붉은빛이 번쩍이고 빛기둥이 그를 감쌌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잠시 후, 붉은빛이 사라지자 그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연이어 붉은 빛기둥이 두 개 치솟아 나머지 두 명을 데리고 사라졌다.
파팟!
그들은 당연히 한립과 교십육이었다. 빛에 둘러싸인 한립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풍경에 비틀거리다 바닥에 착지했다.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그들 사이에 교십육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러나 교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널찍한 거대 지하공간이었다.
사방팔방에 사람들이 가득차서 벽면은 볼 수 없었고 천장과 주변에 우뚝 솟은 굵은 돌기둥만 눈에 들어왔다.
돌기둥에는 커다란 화로가 걸려 있었는데 무엇을 태우는지 연기는 전혀 일지 않고 가끔 불씨만 바깥으로 튀었다.
그리고 아직도 붉은 빛이 번쩍일 때마다 새로운 범인과 저계 수사들이 전송되어 왔다.
광장의 숙연한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한립 주변의 축기기, 연기기 수사들을 제외하고 범인들은 갑자기 다른 공간으로 전송된 것이 신기한지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나지막한 기도 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지하공간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한립은 왠지 모를 불편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런 느낌은 빠르게 가라앉았고 대신 희미한 피비린내가 그를 자극했다.
코를 찡긋한 한립은 고개를 숙여 청석 돌판을 자세히 살폈다. 군데군데 검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꼭 누군가의 피 같았다.
동시에 난주 홍월성 지하공간에서 보았던 음산한 토양이 떠올라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어떻습니까? 뭐라도 발견하셨습니까?”
교십육이 사람들을 피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우선 교구 수사부터 찾지요.”
고개를 저은 한립은 바로 교구에게 전음을 보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전음이 몇 번 오간 후에야 교구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지하 공간 중앙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한립과 교십육은 중얼중얼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중앙으로 이동하며 욕을 한 바가지나 얻어먹어야 했다.
지하공간의 중심으로 갈수록 피비린내가 심해졌고, 바닥의 돌판에서 스며 나오는 붉은 기운도 진해졌다.
중심부에 이른 한립은 바닥이 아예 자줏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우뚝 솟은 홍월도 도조 공수홍의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조각상 주변은 텅 비어있었지만, 그 옆의 방원형의 돌 제단에는 체격은 좋지만 키가 작은 사내가 서있었다.
보라색 장포를 입은 그의 가슴팍에는 핏빛 실로 초승달이 수놓아져 있었다.
반쯤 눈을 감은 그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산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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