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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07화 (1,264/2,000)
  • 1507화. 괴이

    *

    ‘역시…….’

    침음하던 한립이 고목 옆에 쓰러져 있는 교십육 옆으로 이동해 그를 일으키고 단약 하나를 삼키게 했다.

    “고맙습니다.”

    중상을 입은 교십육은 힘겹게 고개를 숙인 후, 가부좌를 틀고 단약의 힘을 빌려 치료에 들어갔다.

    교구도 자색 장포 노인이 사라진 것을 알고 골목에 남아 있는 합체기 수사 쪽으로 내려갔다. 상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머리를 거머쥔 교구는 손바닥에서 남색 빛을 반짝였다.

    무슨 비술을 사용한 것인지 축 늘어진 합체기 수사의 머릿속에서 겁에 질린 붉은 원영이 빠져나왔다. 남색 빛 속의 원영은 아주 허약한 몰골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원영을 잡아 저택의 뜰로 돌아온 교구는 운기조식 중인 교십육과 그 옆에 선 한립을 새로운 눈빛으로 살폈다.

    “수사께서 진법에 이리 정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까 수사를 오해한 것은 다 제가 속이 좁아서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시지요.”

    교구가 한립을 향해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공간의 약한 부분을 찾아낸 것뿐입니다. 수사가 그 산선을 붙들어 주신 덕분에 저도 기회를 보아 진법을 파훼할 수 있었습니다.”

    한립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교구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손에 쥔 원영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실 다발이 뿜어져 나와 원영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다.

    몸을 꿈틀거리던 원영은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교구는 주춤거리지도 않고 검은 실을 더욱 깊이 침투시켰다.

    비명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원영의 표정이 사라져갈 무렵 교구는 미간을 좁히며 더욱 검은 실들에 힘을 실었다.

    이때, 원영의 몸이 수정처럼 반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잠깐…….”

    그걸 본 한립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영이 펑! 하고 터져 빛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에 교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흠, 혼백에 금제가 걸려 있었나 봅니다. 금제가 발동하기 전에 알아내신 것이 있으십니까?”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 자의 신분으로 보아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을 테고요. 그저 이곳에 있던 무상맹 수사들은 전부 죽임을 당한 듯합니다.”

    교구의 대답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이제 어찌 해야 할까요?”

    짧게나마 불안정한 기운을 억누른 교십육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일단 천수성을 샅샅이 뒤져봐야겠습니다. 이미 신분이 노출 되었는데 더 이상 거리낄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눈을 번득인 교구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 * *

    그 시각, 천수성에서 멀리 떨어진 고공 위를 붉은 선박 한 척이 날아가고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선박은 각 층마다 방이 여러 개 있었고, 옆면에 각인된 날개 도안이 여덟 쌍의 암홍색 날개를 만들어내 빠른 속도로 펄럭였다.

    선박의 위층에는 한립 일행과 교전했던 자색 장포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인은 손바닥 크기의 옥 원반을 꺼내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짚어 붉은 빛을 일으켰다.

    “구오, 무슨 일입니까?”

    옥 원반 속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상맹에서 보낸 이들과 충돌했습니다.”

    “허허, 예상대로군요.”

    “그들의 실력은 예상대로가 아니던 걸요? 산선 두 명에 지선도 한 명 있었습니다. 그들 손에 내가 죽을 뻔 했다고요! 수하 한 명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색 장포 노인이 노기를 담아 쏘아붙였다.

    “오, 그 자가 무엇을 알고 있었습니까?”

    “겨우 합체기 수사가 뭘 알겠습니까.”

    “그럼 되었습니다. 그쪽으로만 진선이 세 명이나 갔다니 이번에 무상맹이 단단히 작심을 한 모양이군요. 눈치 있게 물러나면 모르겠으나 계속 귀찮게 군다면 성주가 알아서 처리를 하실 겁니다. 어쨌든 고생 하셨습니다, 일단 돌아오시지요.”

    옥 원반 속의 목소리가 냉소를 흘리며 명령조로 말했다.

    자색 장포 노인은 상대의 어투가 거슬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천수성, 어느 석전 안.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양쪽에 돌기둥들이 서있었고 그 사이로 타닥타닥 불길이 이는 화로가 놓여 있었다.

    석전 입구에선 한립 일행은 가면을 쓴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들의 수행과 의식으로 거리낌없이 천수성을 뒤지자 금방 성 안에 연허기 이상의 고계 수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다가 성 남쪽에 위치한 석전 안에서 세 구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전부 피부가 쪼글쪼글하게 변한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죽어 있었다.

    시체 옆에 놓인 푸른 가면들은 한립 일행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시체들은 체내의 피를 전부 빨린 모양새였고, 이들을 방치하고 떠났다는 것은 도발과 다름없었다.

    “맹에서 잠입시킨 수사들 같습니다.”

    교구가 시체와 그 옆의 가면들을 살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승기 수사 하나에 합체기 둘이 제대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원영까지 격살당한 것을 보면 앞서 싸웠던 산선의 짓이겠군요. 그 자도 어느 정도 법칙의 힘을 다루는 듯합니다.”

    “공수도, 그 늙은 여우같은 놈이 진작 대비를 해둔 겁니다! 우리를 가둔 금제도 우리를 위해 공들여 준비한 함정일 테고요!”

    시체를 살피던 한립과 교십육도 한 마디씩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천수성에서 이렇다 할 실마리가 없으니 떠나기 전에 이 상황을 교삼 대인에게 알리고,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상의해봐야 합니다.”

    교구가 우두머리답게 결정을 내리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웅!

    그의 양머리 남색 가면에 파문이 일고 남색빛이 맹렬하게 반짝였다. 곧바로 눈을 감은 교구가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후, 가면의 빛이 가시고 교구가 눈을 뜨자 교십육이 조급히 물었다.

    “교삼 대인은 뭐라고 하십니까?”

    “즉시 용호성(龍湖城)으로 결집하라고 하십니다.”

    “그쪽도 기습을 당한 것입니까?”

    한립이 듣고 있다 입을 뗐다.

    “교삼 대인과 다른 무리는 목표 지점이 우리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허나 이곳의 상황으로 보아 그들이 가려던 예상지점의 수사들도 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다만 미리 대비를 하라 알려주었으니 기습이 성공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교구가 나지막하게 답하자 한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조사를 마쳤으니 서둘러 출발합시다.”

    남색 빛을 날려 바닥에 떨어진 시체들을 거둔 교구가 석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세 사람은 조용히 천수성을 벗어나 황야지대로 들어갔다.

    교십육이 막 은신술을 펼쳐 모습을 감추려는데 귓가에 교구의 전음이 울렸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교삼 대인께서 적들이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아니 더 이상 은밀히 움직일 것 없이 바로 용호성으로 오라고 분부를 내렸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소매를 펄럭여 물결 속에서 커다란 남색 선박을 불러냈다.

    유선형의 매끄러운 선박은 수정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술법을 펼치려다 만 교십육이 선박을 보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운람천정(云藍天晶)으로 제련한 배라……. 선기에 못지않은 보물입니다.”

    한립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하하, 과찬이 십니다. 겨우 영보급 비행 보물에 불과한 것을요.”

    교구가 웃음을 터트리며 겸손히 말했다. 이전 전투로 상대의 실력을 보았기에 한립을 더욱 공손히 대하고 있었다.

    “속도는 쓸 만하니 이것을 타고 이동하지요. 교십육이 회복에 전념해 이후의 전투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교구가 먼저 선박 위로 날아오르고 교십육과 한립이 차례로 선박에 올랐다.

    * * *

    용호성의 규모는 천수성 보다도 컸고 성 안에 천 무(畝:넓이의 단위, 약30평)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가 있어 여러 갈래의 강줄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성 안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꽤 많았다.

    한립 일행이 갈 길을 재촉해 용호성 구석의 장원에 도착했을 때는 교삼과 원숭이 가면을 쓴 교팔이 각자의 무리를 이끌고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들도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듯 보였다.

    교삼의 명령에 교구는 천수성에서 매복에 당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늘어놓았고, 그 뒤에 천수성에서 가져온 무상맹 수사의 시체를 꺼내 모두에게 보였다.

    교삼이 일일이 깡마른 시체를 살피고 눈빛이 서늘해졌다.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습니다. 저희를 공격했던 산선의 짓이라 추측되고요.”

    양머리 가면 교구가 부연설명을 했다.

    “너희의 소식을 듣고 나와 교팔 무리도 목적지에 도달해 잠복해 있던 무상맹 수사들이 전부 실종된 것을 확인했다.”

    “오는 길에 들으니 홍월성으로 조성을 하러 갔다면서 몇몇 성들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구 무리의 보고와 마찬가지로 공수홍이 신념의 힘을 모으는 방식 중에 하나였고요.”

    원숭이 가면 교팔도 조사 내용을 알렸다.

    “조성을 하러 간 사람들 중 소위 신심이 깊은 이들이 선발되어 조성 이후에 다시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용은 들으셨습니까?”

    가만히 있던 한립이 돌연 ‘선발’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 이야기도 있더군요. 아마 공수홍이 사람들의 신앙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쓰는 수단이겠지요. 그보다, 저와 교삼대인이 이끄는 무리는 습격을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들이 우리 무상맹을 진작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맹에서 내려온 정보가 정확한지 다시 고려를 해봐야겠어요.”

    교팔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화제를 돌렸다.

    “맞습니다. 상대는 우리의 행적을 파악하고 일부러 함정으로 유인했습니다. 허나 전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는 듯싶더군요. 공수홍은 절대 맹에서 알려준 예상거점에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홍월성에 있을 확률이 높겠죠. 그곳에 먼저 가보는 게 임무를 완수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구가 쓴웃음을 지으며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홍월도는 스물여덟 개 주(州)로 나뉘는데 각 주마다 홍월성이라 불리는 성이 있단 말입니다.”

    교팔이 당장 고개를 저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맹에서 받은 지도에 홍월성이라는 곳이 표시가 되어 있는데, 범인들이 조성을 하러 갔다는 홍월성 방향이 약간 다른 겁니다.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가 여러 주를 지나며 전부 다른 곳을 홍월성이라 일컫는 것을 보고 알아낸 사실입니다.”

    교팔은 소매를 펄럭여 다섯 개의 옥간을 한립, 교삼 등에게 나눠주었다.

    옥간에 적힌 지도에는 과연 이전에 홍월성이라 불린 성 외에도 몇 개의 주에 홍월성 표시가 되어 있었다.

    주 하나하나의 크기가 광활해서 고계 수사들이 고의로 속이면 범인들은 평생 가도 다른 주에 홍월성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섬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곳도 섬 전역 지도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공수홍이 일부러 그런 것이겠군요. 수하들에게는 특수한 금제를 걸어놔 관련 사실을 토로하면 혼백이 폭발하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고요! 이전에 맹에서 입수한 지도도 그가 일부러 유출한 내용이 아닌지 의심됩니다.”

    교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번 임무의 목표인 공수홍의 행방이 묘연하니 골치가 아파왔다.

    한립은 문뜩 무엇을 떠올렸는지 이미 살펴본 옥간을 다시 이마에 대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가까운 홍월성부터 조사를 시작한다. 너희는 앞으로 함께 이동하며 홍월성을 일일이 수색하면 된다.”

    이때 교삼이 돌연 명을 내렸다.

    “교삼 대인께서는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홀로 움직이겠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수시로 알리도록.”

    교삼은 질문한 교구와 다른 수사들을 훑고 붉은 빛을 일으켜 기운을 숨김없이 발산하며 날아갔다.

    “큼, 교삼 대인께서는 따로 공수홍을 찾아볼 요량이신가 봅니다. 우리는 명에 따라 이곳 난주(瀾州)의 홍월성부터 가봅시다!”

    원숭이 가면 교팔이 헛기침을 해 이목을 모으고 말했다.

    그 말에 수사들은 가면을 이용해 용모를 바꾸고 장원을 벗어나 거리의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사소한 용무가 있습니다.”

    길을 걸어가던 한립이 갑자기 이런 말을 남기고 바로 각종 서책을 파는 점포로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할 뿐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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