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화. 핏빛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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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도 진하게 풍기는 피비린내 속에 기이한 악취가 섞여 있어 사람을 초조하고 답답하게 만든다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그의 강대한 의식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교구는 금색 줄에 걸린 백옥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걸었고, 백옥이 보광을 빛내 그를 감쌌다.
콰쾅!
이어서 그의 손에서 남색 물결이 세차게 빠져나와 그를 향해 달려드는 십여 마리 혈귀들을 터트려 핏빛 안개로 되돌렸다.
교십육도 말없이 보라색 부적을 꺼내 자신의 이마에 붙이고 보랏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 안에서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교십육의 팔뚝과 가슴의 근육이 급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쿵!
펄쩍 뛰어오른 그는 마치 거대 운석처럼 혈귀들 틈에 떨어져 예닐곱 마리의 혈귀들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단약을 복용하는 척하며 앞으로 성큼 나서 두 주먹으로 인근의 혈귀 두 마리를 쳐냈다.
퍼퍽!
주먹에 맞은 혈귀들은 날아가 다른 혈귀들과 연달아 부딪혀 모두 핏빛 안개로 터져 나갔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혈귀들은 겉모습만 살벌했지 상대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성가신 점은 그것들이 바닥의 균열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와 죽여도 죽여도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수백 마리의 혈귀들에 둘러싸인 동안, 한립에게 공격당한 넙데데한 얼굴의 중년인은 빨갛게 물든 눈으로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깃발 한 벌을 꺼내 주변에 꽂고 거울을 머리 위로 띄운 다음 핏빛 갑옷을 불러내 걸쳤다.
키에엑! 케엑!
겹겹의 보호막이 빛을 발해 혈귀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바깥쪽에서 날카롭게 손톱만 휘둘러 대는데도 중년인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핏빛 장검을 쥐고 초초하게 사방을 주시했다.
이런 법보들은 무궁무진한 혈귀들을 막아주기는 해도 혼백을 잠식하는 피비린내를 어쩌지는 못하는 게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인이 괴성을 지르며 이성을 잃고 핏빛 검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통제를 잃은 법보들은 위력이 점차 감소해 가장 바깥쪽 보호막이 금방 혈귀들에 의해 찢겨나갔다.
멀리서 혈귀들을 격살하던 한립은 그것을 보고 교구, 교십육을 향해 신속히 전음을 보냈다.
“귀물들을 죽일수록 이곳의 핏빛 기운이 농밀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우리도 영향을 받게 될 겁니다.”
교구도 번뜩 상황을 깨달았다.
“제게 이 공간을 가를 방법이 있습니다! 두 분이 잠시 호법을 서주시지요!”
달려드는 혈귀 몇 마리를 격퇴시킨 교십육이 다급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안심하고 술법을 펼치시지요.”
한립은 대답을 하고 번개처럼 두 손을 움직였다. 동시에 두 마리 혈귀들이 날아가 교십육 좌측의 혈귀들과 부딪쳐 터져나갔다.
주변 혈귀들을 처리한 교구도 교십육 우측으로 이동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쿠르릉!
남색 물안개가 교구의 전방에서 응결해 짙은 물의 기운을 방출했다.
“가라!”
휘오오오!
물안개가 짙은 남색 수룡의 모습을 하고 교십육 우측의 혈귀 대군을 휩쓸었다.
이때, 한립도 교십육 좌측으로 이동해 두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다.
팟!
교십육은 서둘러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삼각뿔 형태의 검은 송곳을 불러냈다.
깨알같이 작은 난해한 주술문자들이 새겨진 송곳은 공간파동이 느껴져 법칙의 힘을 지닌 저계 후천선기 같았다.
이에 한립과 교구 두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흑풍해역에서 선기를 지니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는데 겨우 산선인 교십육이 그중 하나라는 것이 이상했다.
교십육은 두 손을 포개고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주문을 멈춘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송곳에 그어 일부러 상처를 냈다.
웅!
교십육의 피가 묻은 송곳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은빛을 머금더니 공간파동이 더욱 강렬해졌다.
“끄아악!”
바로 그때, 핏빛 공간 다른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한립과 교구가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보호막을 잃은 넙데데한 얼굴의 사내가 혈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펑!
붉은빛이 치솟고 혈귀들 사이로 중년인의 원영이 작은 핏빛 검을 쥐고 허둥지둥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원영이 얼마 달아나지 못해 이변이 발생했다!
후우웅.
하늘의 핏빛 구름에 난데없이 구멍이 뚫리고, 빙글빙글 도는 자줏빛 바리가 등장해 엄청난 흡입력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던 원영은 즉시 바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원영은 바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괴이한 힘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투명한 붉은빛덩이로 변해 흡수되었다.
팟!
이어서 바리 표면에 이해할 수 없는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검은 빛을 반짝였다.
원영이 바리에 잡아먹힌 순간, 초승달이 수놓아진 보라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핏빛 구름 속에서 내려와 손끝으로 바리를 가리켰다.
웅!
바리 표면의 주술문자들이 반짝이며 세밀한 문양처럼 변해 검은빛을 응결하더니 아래쪽의 교십육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런!’
그 속도는 원영의 순간이동보다 빨라 혈귀들을 막고 있던 한립과 교구도 제때 막을 수가 없었다. 술법이 막바지에 이른 교십육은 더더욱 돌발 상황에 피하지 못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하늘을 가리키고 있던 검은 송곳이 방향을 틀어 검은빛을 노렸다. 적홍색으로 물든 송곳이 막 빛을 뿜어내려는데 검은빛이 먼저 부딪쳐 콰쾅! 하고 폭음이 터졌다.
교십육 바로 앞에 마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붉은빛이 사방팔방으로 몰아쳤다.
주변의 혈귀들은 붉은 돌풍에 휩쓸려 물러났지만 한립과 교구는 기운의 파도를 뚫고 교십육을 향해 접근했다.
그러나 교십육 곁에 도착하기도 전에 붉은빛이 가시고 그들은 움찔 멈춰 섰다. 교십육이 이미 눈을 감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지와 몸통에 검은 빛기둥 몇 개가 못처럼 박혀 법칙파동을 발산했다.
콰르릉 콰쾅! 콰쾅! 콰릉!
이어서 고공에서 연달아 천둥소리가 울렸다.
한립과 교구는 즉시 뒤쪽으로 물러났고 맷돌 크기의 적홍색 뇌화 덩어리가 떨어져 그들이 원래 있던 자리를 폭파시켰다.
한립과 교구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척한 얼굴에 붉은빛이 드리운 자색 장포 노인이 손에 바리를 들고 핏빛 구름 속에 떠있었다.
“으하하, 그 간자 놈들의 일당이 남아 있을 줄은 알았지만 진선이 셋이나 나타날 줄이야. 죽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신이야 말로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노인의 말에 교구가 싸늘히 답했다.
“쯧쯧, 죽음을 앞둔 것들이 오만하기까지 하구나! 그렇다면 노부가 마땅한 대접을 해줘야겠지.”
냉소를 흘린 자색 장포 노인은 들고 있던 바리를 날렸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바리 주변으로 핏빛 구름이 뭉쳐 백여 개의 적홍색 뇌화를 비처럼 떨구었다.
쿠콰콰쾅!
연달아 떨어지는 뇌화에 공간 전체가 흔들렸고, 뇌화가 닿는 곳마다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핏빛 화염이 넘실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이 핏빛 화염으로 물들고 그 속에서 요사스러운 핏빛 연꽃이 피어나 열기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노인이 일부로 그런 것인지 이미 제압된 교십육 근처로는 뇌화가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교십육은 뜨거운 열기와 주변에서 튀는 불꽃으로 인해 끙끙 앓고 있었다.
한립은 두 눈을 남색으로 반짝여 펄쩍펄쩍 뛰어올라 뇌화와 혈귀들을 피해 다녔는데도 불똥이 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현재 그의 육체로도 불똥이 튈 때마다 약간의 고통이 느껴졌고, 이상하게 화염이 날뛰면서 그의 피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한립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단전에서 맑은 기운을 끌어올려 머리 쪽으로 보냈다.
머지않은 곳에서 교구도 남색 호리병박을 꺼내 그 안에서 흘러나온 물빛으로 물의 장막을 만들어 핏빛 화염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위로 떨어지는 뇌화와 사방에서 달려드는 혈귀들의 공격에 상당히 난감해 보였다.
순식간에 공간 전체가 핏빛 화염으로 뒤덮였고, 그들이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점점 좁아졌다.
그동안 지면의 균열에서 기어 올라오는 혈귀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 핏빛 화염 속에서 더욱 미친 듯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몸을 날려 뇌화를 피한 교구는 적잖은 혈귀들에 둘러싸였다. 그는 혀끝을 깨물어 정혈 한 모금을 들고 있던 남색 호리병박 속으로 흡수시켰다.
웅!
남색 빛이 밝아지자 호리병박 속에서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이 반짝이며 홍수가 난 것처럼 거센 물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르!
호리병박 입구에서 세찬 물결이 흘러나와 놀랍게도 남색 갑옷을 입은 병사로 변해 얼음 창을 들고 혈귀 대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겨우 틈이 난 그는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교십오, 더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저 자를 붙들어 둘 테니, 수사는 교십육을 데리고 탈출해 공간을 깨트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눈에서 붉은빛을 번득이고 돌연 수정 빛줄기로 변해 자색 장포 노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한립은 마치 아무 말도 못들은 사람처럼 교구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먹질로 혈귀 몇 마리를 날려버리고 번뜩 이동해 뇌화를 피한 다음, 급격히 방향을 틀어 어딘가로 날아갔다.
막 자색 장포 노인을 향해 공격을 가하려던 교구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다급히 소리쳤다.
“교십오,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색 장포 노인이 바리를 이용해 쏘아 보낸 검은빛이 허공을 뚫고 그의 머리를 노렸다.
교구는 서둘러 남색 호리병박을 발동해 남색 빛 몇 줄기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풍덩!
검은빛이 남색 소용돌이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폭음과 함께 남색 소용돌이가 급격히 축소되자, 엄청난 파공음이 들려왔다.
바리에서 떨어지는 검은빛을 막느라 교구는 한립이 무엇을 하는지 살필 여력도 없이 남색 호리병박에서 부단히 남색 빛을 분출했다.
그러나 눈동자에 어린 붉은빛은 차츰 흐릿해지고, 목에 건 백옥 목걸이도 점점 암담해져 이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크하하, 네 일당은 너를 버리고 달아났다! 허나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이 혈망공간(血芒空間)은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자색 장포 노인은 한립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바리를 조종하며 광소를 터트렸다. 이때 한립은 멀리 날아간 어느 지점에서 멈춰, 주먹을 힘껏 날리고 있었다.
카캉!
핏빛 공간 전체가 부들부들 진동하더니 한립의 주먹이 닿은 곳에서 하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핏빛 공간은 하얀 균열을 시작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사방이 확 밝아졌다.
한립과 다른 이들은 모두 천수성 남쪽의 외진 저택 상공에 떠있었고, 저택 바깥의 골목에 8명의 핏빛 초승달이 수놓아진 장포를 입은 수사들이 흩어져 진법을 조종하고 있었다.
합체기 수사인 그들은 한립이 강제로 공간을 깨고 나온 탓에 반서를 당했는지 몸의 칠공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택 뜰에는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린 교십육이 누런 나무 아래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은 못들은 보이지 않았고 기운이 불안정하기는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쾅!
안채 위쪽에서 요란하게 빛이 터져 나오고, 두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왔다.
눈동자의 붉은빛이 가신 교구는 공간을 빠져나오자 기뻐했고, 자색 장포 노인은 난색을 표하며 한립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세 진선 중 가장 약해 보이던 한립이 진법의 약점을 찾아내 일격에 진법을 무너트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노인이 바리에서 기이한 파동을 퍼트렸다.
퍼퍼퍼퍽!
느닷없이 저택 주변 골목길에 있던 합체기 수사들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원영들이 파동에 빨려 들어가 바리 속으로 사라졌다.
합체기 수사 중 한 명은 특수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지 몸에서 하얀 빛을 발해 괴이한 파동을 이겨냈다.
자색 장포 노인은 조금 의외였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바리의 검은 주술문양이 다시금 눈부신 빛을 발하고 이전보다 굵직한 검은빛 두 줄기가 한립과 교구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교구는 당장 남색 호리병박에서 항아리 굵기의 물기둥을 분출했다.
쾅!
검은빛과 남색 빛이 작열하며 무수히 많은 물방울이 튀었다. 교구는 폭발의 여파로 멀리 튕겨져 나갔다가 겨우 몸을 가누었다.
그리고 한립은 검은빛을 피하기 위해 연신 번득이며 이동을 해야 했다. 그가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자색 장포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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