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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05화 (1,262/2,000)

1505화. 사정을 파악하다

*

“조성?”

술잔을 내려놓은 교십육이 무심코 되묻자, 교구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눈짓을 했다.

교십육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는데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조성이야 당연히……. 다, 당신들 조성을 모르다니! 설마 외부에서…….”

열성적으로 답하던 점소이가 안색이 확 달라져 무슨 말을 하려 했다.

피핏!

그 순간 두 줄기 수정빛이 점소이의 머리로 쏘아져 들어갔고, 눈이 풀린 점소이는 멍하니 말을 멈추었다.

한립의 반짝이는 두 눈이 점소이를 향해 있었다.

점소이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교구가 진작 두 손을 튕겨 방 안에 남색 보호막을 쳐놔 다행히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이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교십육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닙니다, 교십오의 동작이 빨라서 다행이었어요.”

교구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한립은 반짝이는 눈으로 바로 심문을 시작했다.

“그래서 조성이 무엇이지?”

“조성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1갑자(甲子)를 기준으로 각 성의 모든 이들이 성주를 따라 홍월성으로 가 성주 대인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 해를 조성년(朝聖年)이라 부릅니다.”

“그냥 성주를 보러 가는 것인데 어째서 이주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짐을 싸서 사라졌지?

“다들 선발되기를 바라고 떠나기 때문입니다. 성주께서는 선발된 운 좋은 이들에게 더욱 비옥한 토지를 내리니까요.”

“선발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더냐. 선발이 되지 못한 이들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이고?”

“가장 신실한 사람들이 선발이 됩니다. 아주 영광스런 일이지요……. 선발이 되지 못하면 살던 성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멍하니 답하는 점소이의 얼굴에 부러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한립 일행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야 텅 빈 성들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점소이가 말하는 홍월성의 성주가 바로 홍월도 도주 공수홍일 가능성이 높았다.

“성주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거라.”

이번에는 교구가 질문했다.

“성주 대인께서는 풍요로운 토지를 내려주시어 우리가 대대손손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점소이가 주절주절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외지인을 적대시하는 것도 성주의 가르침 때문인가?”

그때 한립이 점소이의 말을 끊고 다른 질문을 했다.

“예! 외지인들은 전부 먼 바다의 사악한 마귀들입니다. 우리 홍월도의 풍요로움을 탐하는 자들이라 반드시 발견하는 대로 성주에게 고해 전부 죽여 없애야 하지요!”

점소이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 대답에 교십육은 코웃음을 쳤고, 교구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립은 홍월도 도주에 관한 다른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점소이가 아는 바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립은 교구에게 방의 남색 보호막을 거두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의 눈이 번뜩이고 점소이가 부르르 몸을 떨다 맑은 눈을 깜빡였다.

“이제 되었으니 내려가 보거라.”

아연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점소이는 한립의 말에 얌전히 답하고 물러났다. 이전의 기억은 지워진 듯했다.

“성들이 빈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괜한 생각을 했습니다.”

교십육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성 사람들이 전부 조성을 하러 갔다면, 홍월도 도주도 그 홍월성이란 곳에 있는 것 아닙니까?”

한립은 교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교삼이 준 홍월도 지도를 떠올렸다.

간략한 지도라 모든 지명이 적힌 것은 아니었지만 홍월성은 중간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곳은 천수성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범인들의 속도로는 평생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고계 수사들이 특수한 방법으로 그들을 이동시켜야 조성하러 홍월도에 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을 알려야겠군요.”

교십육이 실마리를 알아낸 것에 기뻐하는데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엔, 우리도 이렇게 쉽게 알아낸 정보를 무상맹 사람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홍월도 도주가 있을 것이라 예상한 지점에 홍월성이 빠져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어차피 주루의 점소이가 알고 있는 내용은 다 속세에 떠도는 이야기일 테고요.”

“그럼 원래 계획대로 일단 천수성에 가서 맹에서 잠입시킨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교구가 결정을 내리자 그들은 신속히 안성을 떠났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많은 성들을 지나쳤고 열 개 중 두세 개는 텅 비어있었다.

* * *

3일 후, 광활한 평원에 홀로 솟아 있는 웅장한 검은 성.

성 밖으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큰 강의 줄기가 여럿 흐르고, 그 주위에는 크고 작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강물은 사람들이 뚫어놓은 물길을 따라 푸릇푸릇 벼가 자라는 논으로 이어졌다.

성 주변이 그런 작은 물길들로 가득했고, 강물은 성을 보호하는 해자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해가 떠 성문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바깥에는 수백 수천 명의 범인들이 어깨와 손에 보따리를 들거나 마차에 화물을 가득 싣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파 속에는 무명옷을 입고 삿갓을 쓴 세 사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까지 은밀히 이동한 한립 일행이었다.

대애앵!

해가 떠오르고, 성문 위에 새겨진 천수성이라는 커다란 글자에 빛이 비추자 성 안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덜컹덜컹 소리가 들리고 굵직한 검은 사슬로 연결된 다리가 내려왔다.

진작부터 기다리던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다리를 건너 성안으로 향했다.

성의 유일한 입구 양쪽에는 원영기 수사 여러 명이 서서 검문을 했고, 그 대장은 화신기 수행을 지닌 자였다.

남색 장포를 입은 대장의 가슴팍에 핏빛 실로 만월(彎月)이 수놓아져 있었다.

한립은 굳이 의식으로 살피지 않아도 성안에 문지기 노릇을 하는 이들보다 더욱 높은 경지의 수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성을 관찰하다보니 홍월도도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수사와 범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성 안에서 살아갔다.

원영기 이상의 수사들만 핏빛 만월이 수놓아진 남색 장포를 걸쳐서 동일한 세력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성문을 지나치던 한립은 머리 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천장에는 팔각형의 진법 도안이 새겨져 있고 그 한가운데 동그란 거울이 달려 있었다.

희미한 붉은 빛을 발산하는 거울은 성문을 지나는 모든 이들을 비추었다. 딱 봐도 고의로 신분과 용모를 감춘 수사들을 가려내기 위해 설치해 둔 진법이었다.

하지만 진법은 그리 고명하지도 않았고, 대승기 이상의 수사라면 무난하게 감시를 피해갈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인파를 따라 지나칠 때도 거울은 미세하게 반짝이다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범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번화한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로에는 노점상들이 가득했고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에는 상점들마다 홍보를 위해 걸어둔 깃발들이 펄럭였다.

그러나 너무 이른 아침이라 대부분의 상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대로에는 막 성에 들어온 백성들이 대다수였다.

아침 식사를 파는 작은 가게들만이 가게 문을 열고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수성은 섬에서 보았던 어떤 성보다 컸고 동남과 서북 방향으로 통하는 두 개의 대로를 기준으로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립 일행은 성의 대로를 따라 남쪽 구역으로 이동한 후 약속이라도 한 듯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골목을 걸어갔다.

거의 반 시진 넘게 걸어가자 골목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문을 걸어 잠근 정원 딸린 저택들이 나왔다.

세 사람은 골목 가장 안쪽에 위치한 평범한 저택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암홍색 대문을 본 교구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홍월도에 잠입한 무상맹 회원이 마련한 비밀거점으로 정보를 얻기 위해 들린 것이었다.

교십육이 그 말을 듣고 몇 걸음 걸어가 보통 백성들이 하듯이 구리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들겼다.

텅텅! 텅!

잘 들어보면 처음 두 번은 간격이 좁고, 마지막은 길게 반복적으로 문을 두들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했는데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에 한립은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고 싶었지만 교삼의 경고를 떠올리고 참았다.

교십육과 교구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함부로 의식을 방출하지는 않았다.

문을 두들기던 교십육이 어찌해야 하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한립은 말이 없었고, 교구는 손을 까딱여 혹시 모를 전투를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 안에서 약속된 암호와 일치하는 방울소리가 울렸다.

디링디링디링! 딩!

세 번은 길게 마지막 한 번은 짧게 방울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표정이 달라진 교십육이 화답하듯 문고리로 문을 세 번 두들겼다.

끼익!

잠시 후 암홍색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좁은 길에 너부데데한 중년 사내가 나타나 얼굴을 쑥 내밀었다.

“들어오시죠.”

그는 바깥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한립은 중년인도 거짓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넙데데한 얼굴은 무상맹의 가면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가면을 쓴 무상맹 회원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교구와 교십육도 그것을 보고 중년인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머뭇거리던 한립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중년인은 문밖을 요리조리 살피고 문을 닫아걸었다.

정원이 꽤 넓었는데 오래된 나무 한 그루와 청회색 돌 탁자가 전부였다.

나무 주변으로 흙이 덮인 것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푸른 벽돌이 쫙 깔려있고 나뭇잎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안쪽으로는 안채와 그 양옆으로 곁채들이 있었는데 전부 문이 가려져 있었다.

넙데데한 얼굴의 중년인이 바삐 길을 안내하며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부에서 사람을 보낸 것을 알고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이번 임무는 어느 대인께서 주도하시는 것입니까?”

안으로 들어온 뒤로 그를 주시하던 한립은 그 소리를 듣고 눈빛이 서늘해져 손을 뻗어 상대의 심장을 노렸다.

중년인은 깜짝 놀랐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는지 등 뒤로 붉은 방패를 불러내 주먹을 막았다.

쾅!

은빛이 날아가 방패를 박살내고 중년인은 안채 앞 계단까지 튕겨나가 울컥 피를 토했다. 교구과 교십육도 상대가 수상한 것을 알아채고 다가가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웅웅!

사방의 공간이 왜곡되더니 뜰을 중심으로 붉은 빛이 흘러나와 거대한 핏빛 진법 도안을 만들었다.

한립 일행이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그들은 넙데데한 얼굴의 사내와 핏빛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공간은 실존하는 세계가 아닌 듯했다. 머리 위로 짙은 핏빛 구름이 떠있고 발아래의 토양은 피를 흠뻑 머금은 것처럼 시뻘겠다.

쿠릉!

그들이 피비린내가 나는 공간을 다 살피기도 전에, 핏빛 공간이 울리고 바닥에 크기가 각기 다른 수백 개의 균열에서 짙은 핏빛 안개가 새어나왔다.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무언가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키에에엑!

피부를 한 겹 벗겨낸 듯한 혈귀(血鬼)들이 균열 틈으로 끊임없이 기어 올라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한립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조심하시지요! 저 혈귀만 조심할 것이 아니라 이곳의 기운 자체도 뭔가 이상합니다!”

혈귀를 살피던 교구는 하늘 위의 핏빛 구름을 보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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