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화 조성(朝聖)
*
며칠 후.
거센 파도가 이는 쪽빛 바다 위를 붉은 빛줄기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안에는 기다란 용의 모습을 한 배와 가면을 쓴 선인들이 타고 있었다.
바로 홍월도로 향하는 무상맹 사람들이었다.
이때, 한립은 한쪽에 서서 멀리 보이는 드넓은 섬 하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말이 섬이지 오몽도보다 훨씬 거대해서 그냥 육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홍월도에 대한 정보다.”
교삼은 한 마디만 하고 하얀 옥간 여러 개를 나눠주었다. 옥간을 받아든 한립은 바로 그것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홍월도의 면적은 과연 그가 예상하던 것보다 넓어 거의 대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교삼 대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장소가 예닐곱 개는 되던데, 홍월도 도주가 있을만한 곳이겠지요? 어디부터 가보면 좋겠습니까?”
양머리 구교가 물었다.
“빠르게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세 무리로 나뉘어 섬의 동, 서, 남쪽으로 향한다. 각 무리는 가까운 예상지점을 확인한 후 섬 중앙에서 다시 모이는 것으로 한다.”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는지 용머리 교삼의 답은 신속 정확했다. 예상한 답변이었지만 되도록 홀로 다니고자 했던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교팔이, 교십삼, 교이십일과 함께 동쪽을 맡아 근처의 예상지점을 확인한다.”
“예!”
원숭이 가면을 쓴 마른 사내가 공수했다. 곰 가면 사내와 부엉이 가면 여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없이 교팔의 뒤로 가서 섰다.
“교구는 교십오, 교십육과 서쪽을 맡는다.”
“최선을 다해 교삼 대인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양머리 가면 교구가 앞으로 나서 공손히 답했다. 한립과 호랑이 가면을 쓴 키 큰 사내가 시선을 마주치고 교구 뒤로 이동했다.
교삼은 당차게 답하는 교구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매 가면을 쓴 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교이십오가 나를 따라 남쪽으로 간다.”
탁한 목소리로 답한 사내가 바로 교삼 뒤로 가서 섰다.
“공수홍은 피의 법칙에 정통하고 굉장히 민감한 편인데다 섬 곳곳에는 탐지용 금제가 깔려있다. 맹에서 주어진 가면으로 기운을 감추었지만 의식으로 함부로 주변을 살피려 들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 섬에 이른 후에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의식을 방출하지 말도록.”
“예!”
교삼의 경고에 다들 한 목소리로 답했다.
“먼저 홍월도 도주를 발견하는 무리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면을 통해 내게 연락을 취한다. 가면을 통한 연락이 들킬 가능성은 낮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함부로 이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삼 대인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교구가 공손하게 답했고, 한립은 슬쩍 얼굴에 쓴 가면을 만져보았다. 해용도에 도착했을 때 교삼이 가면을 통해 전음을 보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출발!”
교삼은 붉은 배를 거두고 교이십오와 홍월도 남쪽으로 날아갔고 교팔 일행도 둔광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양머리 가면을 쓴 교구가 한립과 키 큰 사내를 돌아보았다.
“갑시다.”
먼저 출발한 교구의 푸른 둔광을 따라 한립과 나머지 사내도 빛줄기를 일으켜 따라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 일행은 홍월도 서쪽의 모래사장에 이르렀다.
풀이 무성하고 사람이 사는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홍월도가 수천 년간 봉쇄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래사장에도 침입자를 대비해 은밀히 금제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진선의 경지에 이른 세 명이 피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금제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기운을 숨긴 채 그들의 첫 번째 목적지인 천수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 속으로 이동하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한립은 비행을 하면서 섬의 지형을 봐두었다.
홍월도의 서쪽 구역은 대체적으로 산이 많지 않고 평야가 많았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과 숲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토질이 달라서인지 섬의 수목들은 기본적으로 붉은 색을 띠었다.
바닷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이파리가 흔들거려 마치 불꽃들이 춤을 추는 것 마냥 장관을 이루었다.
숲을 빠져나간 이들은 풍해성(楓海城)이라 적힌 성을 발견했다.
양머리 교구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둔광을 멈추었고, 한립과 호랑이 가면 교십육이 따라서 멈춰 섰다.
“뭐가 있습니까?”
“섬에 들어와서 처음 발견한 성이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교삼 대인이 준 지도가 그리 상세하지 않아 방향을 잘못 잡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교십육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교구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것도 좋겠군요.”
교십육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립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참을 날아왔으니 이때쯤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 옳았다.
그들은 소리 없이 지면에 내려서 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성문에 이르러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규모가 꽤 큰 성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정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습니다!”
교구가 얼른 일행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이에 한립과 교십육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성으로 접근해 금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성벽으로 날아올랐다.
의식으로 성 내부를 조사할 수 없으니 직접 살펴봐야 했다.
“그냥 버려진 성인가 봅니다. 괜히 긴장을 했어요.”
“이상합니다. 성벽이 오래 되어 보이지도 않고, 공격당한 흔적도 없는데 어째서 성 안에 아무도 없는 걸까요?”
성을 살핀 교구와 교십육이 한 마디씩 했고 한립도 미간을 좁혔다. 영목신통으로 살펴보니 건물들이 텅 비어 있었고 점포들도 문을 걸어 잠근 상태였다.
문제는 얼마 전에야 성을 떠났는지 누군가 머물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바람으로 덜그덕거리는 문소리와 길고양이나 들개들의 기척 밖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위치도 확인했고, 우리와는 상관없으니 서둘러 이동합시다.”
교구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들은 성을 돌아 비옥한 초원으로 진입했다.
소와 양들이 도처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었는데 근방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초원의 끝에는 또 다른 성이 있었다.
텅 빈 성을 지나쳐 온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또 다른 성으로 향했다.
“허어, 어찌 성 안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입니까.”
“신경 쓰지 맙시다. 아마 인근에 무슨 일이 생겨서 모두 이주했나봅니다.”
교십육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묻자 침음하던 교구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음 성의 상황도 이렇다면 다른 이들이게 알려야 할 듯싶습니다.”
가만히 있던 한립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한 번 상황을 봅시다. 지도에 따르면 전방에 또 다른 큰 성이 있을 테니까요.”
교구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빠르게 다음 성으로 향했다. 과연 조금 더 이동하자 이전 성들보다 큰 안성(安城)이 나타났다.
예상과 달리 이 성은 아주 평범해보였다.
성문을 드나드는 이들도 많았고, 성 내의 수많은 점포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범인들 외에도 적잖은 저계 수사들이 섞여 있어 이전의 두 성과는 상황이 완전 달랐다.
“이야, 이곳은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이전 성의 사람들이 죄다 이리로 몰려오기라도 한 것인지 원!”
교십육이 표정을 풀고 농담조로 말했다.
‘이전 성들과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한립의 표정은 미미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우니 주변의 빈 성들은 확실히 조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김에 성 안으로 들어가 홍월도에 대한 정보도 얻고요.”
“교십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신중한 것이 무모한 것보다 낫지요!”
한립의 제안에 교십육이 동의했다.
“두 분의 의견이 그렇다면 성에 들러 조사를 해보도록 하지요!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교구가 손을 뻗어 성 중앙의 광장을 가리켰다. 광장에는 핏빛 조각상이 우둑 서서 방원 백 장에 혈홍색 광채를 드리우고 있었다.
조각상을 지나는 이들은 범인과 수사를 가리지 않고 매우 경건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핏빛 조각상은 지선이 믿음의 힘을 모으는 평범한 조각상이었다.
홍월도 도주 공수홍은 지선이기 때문에 원래는 곳곳에 이런 조각상을 놓는 것도 당연했지만, 무상맹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공수홍은 특수한 공법을 수련해서 이런 조각상을 통해 각지의 정황을 감시한다고 했다.
그러니 절대 조각상의 감지 범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립은 이 같은 설명에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적잖은 자료를 살펴본 결과, 이런 조각상들은 신앙의 힘을 모으는 특수한 용기일 뿐 지기화신처럼 오감을 지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상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풀기 위해 직접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성 밖에서 가면으로 가짜 외모를 꾸며내 상인 신분으로 안성에 진입했다. 가면이 있지만 각자 최대한 기운을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립은 그곳의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자 문득 영환계에서 류낙아와 함께 속세를 떠돌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정신이 온전치 못했지만 드문드문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잔혹한 선계의 삶 속에서 어린 소녀는 자신을 정말 가족처럼 돌보았고, 자신도 그런 그녀에게서 희미하게나마 어릴 적 여동생의 모습을 보았다.
낙아는 지금 어찌 지내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교십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주루가 보입니다.”
그의 말대로 머지않은 곳에 3층으로 된 주루가 있었다. 세 사람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영특해 보이는 점소이가 그들을 맞이했다.
“조용한 방으로 안내 하거라.”
“옙!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요.”
교십육의 말에 점소이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2층의 고상한 방으로 안내했다.
“미지근한 술 두 병이랑 이곳에서 잘 나가는 안주 몇 가지를 내 오거라. 서둘러야 할 것이야. 남은 은자는 거슬러 줄 것 없다.”
교십육은 자리에 앉자마자 은자를 던져주며 말했고, 한립과 교구는 그런 교십육을 힐끗 보았다.
속세의 주루에 자주 드나들어 본 듯한 태도였다. 점소이는 얼른 은자를 받아 챙기고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허허,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벽곡을 한 지 오래지만 속세의 술과 음식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교십육도 그들의 시선을 눈치 채고 민망한 듯 말했다.
“아닙니다, 각자 취향이 다른 게지요. 저도 오랜만에 이런 곳에 오니 속세의 산해진미가 그립군요. 오늘 한 번 거하게 먹어 봅시다!”
교구가 마주 웃음 지었다.
점소이는 날랜 걸음으로 술과 안주를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주루의 숙수가 솜씨가 제법인지 좋은 냄새가 솔솔 퍼져 식욕을 돋우었다.
교십육은 잔을 가득 채운 다음 격식 차리지 않고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표정이 아주 흡족해 보였다.
한립도 그것을 보고 작게 미소 짓다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을 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요.”
“잠깐.”
점소이가 몸을 돌려나가려는데 교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손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섬 남쪽에서 올라온 행상인데, 지나다 보니 풍해성이며 묵임성이 다 텅 비었더군. 뭐 아는 것이 있는가?”
교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아, 그 성들은 얼마 전에 홍월성으로 조성(朝聖)을 하러 불려갔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도 없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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