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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03화 (1,260/2,000)
  • 1503화. 지각

    *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될지 모르겠군.”

    한립은 힐끗 소인을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내가 자네를 대신해 임무에 참가하는 것일세. 어떻게 생각하는가?”

    “류 수사, 제가 말씀을 드렸다시피 맹에서 내려오는 임무는 어느 것 하나 위험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정말 그래주실 수 있겠습니까?”

    움찔한 낙봉 혼백이 믿기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나도 솔직히 말하지! 자네의 말에 따르면 무상맹은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네. 가면이 기운과 용모를 완전히 가려준다면 내가 대신 간다고 해도 들킬 일은 없다는 것 아닌가?”

    곰곰이 생각하던 한립은 담담히 속내를 드러냈다.

    “무상맹 수사끼리는 그저 가면으로 알아보게 되어있습니다. 가면에 가려진 사람이 다른 이라는 것을 알아도 가면만 멀쩡하면 묵인해 줄 겁니다. 게다가 맹에서는 수사들끼리 서로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금해서……. 다른 사람이 가도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낙몽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말했지만 가면 갈수록 말이 끊기고 목소리에 힘이 없어졌다.

    미세한 검은 기운이 그의 어깨를 통해 유실되어 물 위를 떠다니는 이파리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류 수사, 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검은 소인은 고개를 돌려 어깨에서 새어나가는 검은 기운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종아리 쪽에서도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알고 싶은 것은 다 알았으니 자네가 남길 말이 있으면 해보게. 능력이 되는 한 들어주지.”

    “제게 약속하셨던 것만 지켜 주셔도 충분합니다. 감히 다른 헛된 희망을 품어 무엇 하겠습니까……. 낙 씨 일족이 다시 부흥할 날이…….”

    한립의 말에 낙몽 혼백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검은 소인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검은 기운이 풀풀 흩날려 몸이 왜곡되다 결국에는 사라져버렸다.

    한립은 낙몽 혼백이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라지면서도 자신의 일족을 걱정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쉬고는 소머리 가면을 끌어왔다.

    이번에는 가면도 허상화 되지 않고 얌전히 그의 손에 들렸다.

    * * *

    한 달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오몽도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해역 위로 잿빛 먹구름이 가득 껴있었다.

    솨아아아.

    광풍이 불고 풍랑이 거센 바다 위를 푸른 유광(流光)이 날카로운 보검처럼 파도를 갈라 은색 물보라를 일으켰다.

    푸른빛 속에는 체격이 좋은 청포 사내가 소머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사이로 드러난 반짝이는 두 눈은 낙몽을 대신해 해용도(海榕島)로 가는 한립의 눈이었다. 전방에 보이는 방원형의 작은 섬이 바로 그의 목적지였다.

    ‘이곳이 해용도.’

    천천히 속도를 줄인 그의 눈에 작은 섬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왔다. 울창한 해용목들이 자라나 섬을 겹겹이 둘러싸고 푸른 나무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빼곡하게 서있는 나무 기둥에서 가느다란 뿌리들이 땅과 바다로 깊이 뻗어있어 멀리서 보면 길게 늘어트린 노인의 수염처럼 보였다.

    한립은 해용도 앞에 멈춰 서서 섬을 바라보았다.

    섬 곳곳에는 회백색 새똥이 가득했는데 정작 바닷새들은 보이지 않았고, 해풍이 나뭇가지를 지나며 내는 바람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냉랭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교(蛟)십오, 왔으면 어서 섬으로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것이지?”

    한립은 내심 흠칫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섬 쪽이 아닌 그의 가면이었다.

    그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가볍게 섬에 내려섰고 천천히 해용목들을 지나 섬 중심으로 들어갔다.

    토양이 부드러워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섬 중앙에는 세 사람이 팔을 벌려 껴안아야 겨우 둘레를 잴 수 있는 커다란 해용목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주위로는 몇 사람이 앉거나 서있었다.

    한립의 시선이 해용목 앞쪽에 앉은 붉은 장포 사내에게로 향했다.

    ‘교삼.’

    사내가 쓴 적홍색 용머리 가면에 기이한 주술문자와 함께 미간에 ‘삼(三)’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용머리 가면 사내도 대충 한립을 훑고 시선을 거두었다. 말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한립은 다른 이들도 차례로 살폈다.

    ‘교구.’

    몸이 약간 구부정하고 보라색 장포를 입은 사람은 구(九) 자가 적힌 남색 양머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바닥만 보며 한립이 등장에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

    ‘교십육.’

    교구와 머지않은 곳에 남색 호랑이 머리 가면을 쓴 체구가 큰 사내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립도 그의 이마에 새겨진 십육(十六)이란 숫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이십일.’

    해용목 왼쪽으로는 치마를 입은 부엉이 가면을 쓴 여인이 아리따운 몸을 나무 기둥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가면에 적힌 숫자는 이십일(二一)이었다.

    ‘교이십오’

    해용목 오른쪽에 이십오(二五)라 새겨진 남색 매 가면을 쓴 자는 그를 힐끗 보고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교팔’

    해용목 가지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마른 사람은 팔(八)이 새겨진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고, 한립이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아채고 노란 눈알을 굴렸다.

    ‘교십삼.’

    그 아래로 곰 가면을 쓴 수척한 사내는 단정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가면에 십삼(十三)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무상맹 규정인지 다들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한립은 구성원을 살피고는 남은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기다림이 여드레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오는 사람은 없었고, 이미 도착한 이들도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아 섬 안의 분위기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 * *

    여드레 날 아침,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 해용목 앞쪽에 앉아 있던 홍포(*紅袍: 붉은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되었다.”

    용머리 가면에서 흘러나온 딱딱한 목소리에 그곳에 모인 이들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여드레 내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원숭이 가면을 쓴 마른 사내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이때 섬 밖에서 유광이 날아들어 바위처럼 쿵! 하고 묵직하게 떨어졌다. 작은 섬이 진동해 나무들이 흔들렸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멧돼지 가면을 쓴 거구였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힘차게 중앙으로 뛰어오는 그가 나무를 전혀 피하지 않아 나뭇가지 기둥이 수없이 부러져나갔다.

    거대한 해용목 앞에 도착한 거구의 사내는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누가 교삼입니까?”

    말을 마친 그는 누가 답할 것도 없이 알아서 용머리 가면을 쓴 홍포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 그쪽이 교삼이셨군요! 어서어서 임무를 공개하시죠. 임무를 마치고 해야 할 다른 용무가 있어 마음이 급합니다.”

    멧돼지 가면 사내가 상대를 아래위로 훑고 우렁차게 외쳤다.

    “교삼십이, 너는 예정된 시각에 늦었다.”

    홍포 사내가 거구의 사내를 마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에이, 겨우 이 정도 늦은 걸로 뭘 그러십니까. 그러지 말고 어서 임무나 공개해 주시라니까요?”

    거구의 사내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때 옆에 있던 한립은 깜짝 놀라 무심코 뒤로 물러섰고, 곧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홍포 사내 주위로 붉은 빛이 일고 화르륵! 적홍색 불길이 치솟았고, 그 뜨거운 열기에 주위의 인물들이 연달아 뒷걸음질 쳤다.

    적홍색 불길 속에서 홍포 사내가 멧돼지 가면 사내의 가슴 쪽으로 손끝을 칼처럼 긋고 있었다.

    그러나 불시의 공격에도 거구 사내의 반응은 극히 빨랐다.

    그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하얀 빛을 뿜었다.

    파앗!

    팔각형의 하얀 수정 방패가 떠올라 거구를 보호했다. 입체적인 꽃문양이 가득 새겨진 방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하얀 광채는 법칙 파동을 품고 있었다.

    매우 급작스럽게 펼친 방어 수단이었지만 굉장히 강력한 기운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푹!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부는 단 한 수로 갈렸다. 투명하게 변한 교삼의 손이 어느새 팔각 수정 방패를 뚫고 거구 사내의 심장을 꿰뚫었다.

    치지지직.

    거구 사내의 가슴에서 살이 연소되어 위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래로는 지방덩어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환 명령을 어기고 도착 시간에 늦었다. 교삼십이의 무상맹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

    교삼이 천천히 손을 거두고 냉정히 선언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거구 사내가 쓰고 있던 멧돼지 가면의 주술문자들이 밝은 빛을 발하고 펑! 하고 터져 가루로 변했다.

    가면 아래 숨겨져 있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푸확!

    거구 사내의 시체에서 두개골이 갈라지고 남색 원영이 다급히 빠져나와 번득 사라졌다.

    홍포 사내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겨 화염 탄환을 쏘아 보냈다.

    섬 십여 리 밖에서 붉은 화염 탄환이 남색 빛덩이를 따라잡았다.

    펑!

    교삼십이라 불리던 이의 원영은 번뜩이는 빛을 남기고 터져 소멸되었다.

    섬의 모두가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았지만 다들 가면을 쓰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교삼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고나 훈계의 의도는커녕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주변 사람들이 돌멩이, 나무 혹은 언제든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물건이나 다름없다는 눈빛이었다.

    “이번 임무를 공표한다! 홍월도로 가서 도주 공수홍을 제거한다.”

    홍포 사내의 얼음장 같은 말에 누군가 놀라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공수홍이라니…….”

    “그건 좀…….”

    몇몇이 머뭇거리는 기색을 드러냈고, 소머리 가면에 가려진 한립의 얼굴에도 주름이 잡혔다.

    공수홍이란 이름을 예전에 몇 번 들어봤는데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진선 중기 수행의 강대한 지선으로 물 속성 법칙의 힘에서 보기 드문 피의 힘을 익혀 손속이 잔인하기로 흑풍 해역에 악명이 자자한 자였다.

    성질이 포악해서 원수를 진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실력이 강하고 수련한 법칙의 힘이 괴이해서 누구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삼 대인, 홍월도는 다른 섬들과 교류도 하지 않고, 수천 년 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봉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고, 대외적으로 함부로 섬을 침범하는 자는 누구든 죽이겠다고 공표한 것으로 압니다.”

    양머리 가면을 쓴 교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맹에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왔다. 원래는 홍월도의 정보를 더 모은 후에 움직이려 했으나 보름 전에, 맹의 고위층에서 홍월도 도주 공수홍을 최대한 빨리 죽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교삼이 교구를 힐끗 보고 천천히 답했다.

    “홍월도 도주는 흑풍해역에서 이름난 강자이고 휘하에 산선 몇 명을 데리고 있어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침묵하던 호랑이 머리 가면도 입을 열었다. 이어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졌는데 부엉이 가면을 쓴 여인이었다.

    “맞습니다. 그런 지선의 근거지인 홍월도에 무턱대고 쳐들어갔다가는…….”

    “헛소리! 지선이라 해도 같잖은 잡다한 기술을 익힌 자에 불과하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수행으로는 너희 흑풍해역에서나 위세를 부릴 수 있겠지.”

    교삼은 냉랭히 다른 수사들의 걱정을 일축했다.

    한립은 줄곧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기에 교구와 교팔이 그 말을 듣고 어깨가 움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교삼의 말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경고하지. 임무를 앞두고 달아나는 자는 교삼십이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야.”

    교삼의 경고에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가면 속 수사들은 서로의 시선을 살폈고, 결국 알아서 살길을 도모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삼은 다른 이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개의치 않고 허공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붉은 빛 속에서 용울음 소리가 들리고 기다란 용의 형태를 띤 배가 떠올랐다.

    붉은 색 배는 앞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었고, 금색 문양과 불 구름 도안이 가득해 한 눈에 보기에도 그저 그런 물건은 아니었다.

    교삼이 먼저 배에 오르고 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직 거기서 뭐하는 거지?”

    “이건, 후천선기(後天仙器)!”

    양머리 가면 교구가 붉은 배를 보고 찬탄하다 뛰어올랐고 다른 이들도 얼른 올라타며 부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한립도 의외라는 시선으로 배를 둘러보고 있었다.

    “출발.”

    모두가 배에 오르자 교삼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배는 붉은 화염에 휩싸여 한 마리 용맹한 화룡으로 변해 빠르게 쏘아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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