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2화. 무상맹(無常盟)
*
“류 수사, 괜히 성가시게 해드렸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나지요.”
곡골 부인이 담담히 말하고는 먼저 검은 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류 수사!”
육곤노조도 한립과 한구에게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이제 싸움이 벌어진 장소에는 한립과 한구 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용건이 있으십니까?”
“실례를 하였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립의 나지막한 물음에 한구가 포권을 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수사의 말씀대로 물을 것이 있어 남았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오래 전 낙몽 수사가 우연히 탄혼화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류 수사 수중에 있겠지요? 어차피 현선의 길을 가실 거면 필요 없는 영약이니 제게 넘겨주십시오.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드리겠습니다.”
한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도 탄혼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한립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대답에 한구의 미소가 굳었다.
“하하……. 그랬군요.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구는 예의상 미소를 짓고는 하얀 빛줄기로 변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섬을 뒤덮은 물의 장막은 사라져 있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섬은 평화로웠다.
“류 선배님!”
낙풍과 낙가 합체기 수사들이 감동한 얼굴로 몰려들어 인사를 올렸다. 그 뒤로는 적잖은 연허기 이하의 수사들도 서있었다.
“오늘 선배님 덕분에 멸족의 화를 피해갔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류 선배님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낙풍이 먼저 대례를 올리자 다른 수사들도 허리를 숙였다.
“오몽도를 비호하겠다 말했으니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세.”
한립은 담담히 답하고 낙몽도 수사들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변한 것으로 보아 다들 그의 신분을 알게 된 듯했다.
* * *
몇 개월이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비밀 공간 안의 목재 건물 옆에서 한립은 손을 뻗어 탄혼화 꽃잎을 매만졌다. 금빛 주름이 하나 더 생겨 총 세 겹의 금빛 주름이 나있었다.
탄혼화는 삼만 년을 넘어가고는 보랏빛 속에 금빛을 품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한립은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조신들의 지기화신과 싸운 경험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들이 져서 떠나기는 했지만 한립도 법칙의 힘을 더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손을 거둔 그가 공간을 떠나려는데 낙몽의 무덤 옆 목재 건물에서 갑자기 빛이 반짝였다. 원래는 사합원 밀실로 가져갔던 조각상 머리가 둥실 떠있었다.
신념의 힘을 시험하는 동안 크고 작은 이상 현상들이 벌어져서 편의를 위해 비밀공간의 목재건물을 보수하고 지난 한달 간은 이곳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각상 머리가 스스로 움직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자세히 살피던 한립은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났다.
펑!
조각상 머리에서 남색 빛이 폭발해 강렬한 기파를 내뿜었다.
힐끗 보라색 꽃을 본 한립은 흠치 놀라 탄혼화 앞으로 이동했다.
교차한 그의 두 팔에서 법력이 흘러나와 푸른 보호막이 펼쳐졌다.
쿠쿠쿵.
푸른 보호막 때문에 두 갈래로 갈린 기파가 주위의 숲을 초토화시켰다.
우직!
목재 건물도 기파에 허물어져 이전보다 더욱 볼품없이 꼴이 되어있었다.
조각상 머리의 남색 빛이 약해지고 기파가 잠잠해질 무렵 소머리 가면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불숙 튀어나와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쉭!
그윽한 남색 가면에는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미간에 일(一) 자와 오(五) 자가 적혀 있었다.
한립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는데, 가면은 허상화 되어 그의 주먹과 팔을 투과해 탄혼화 앞에 멈추었다.
한립이 움찔하면서 뒤를 돌았을 때, 가면의 입에서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십오(蛟十五), 너는 수천 년간 맹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이전 임무에서 받은 면제령이 실효되었으니 한 달 내로 해용도로 가 교삼(蛟三)의 휘하로 모여야 한다. 기간 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무상맹에서 축출되고 그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말소리가 끝나고도 가면은 사라지지 않고 떠있었다.
휙!
서늘하게 탄혼화를 보던 한립은 느닷없이 수결을 맺어 수정실을 뿜었다.
탄혼화의 닭 벼슬 모양 수술 속으로 침투한 수정실이 팽팽하게 검은 기운을 끌어냈다.
꽃을 떠난 검은 기운은 몸부림치다 놀랍게도 손바닥 크기의 검은 소인으로 변했다. 크기가 무척 작아서 그렇지 낙몽 조각상의 모습과 똑같았다.
“너는, 낙몽!”
한립의 중얼거림에 검은 소인은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제 막 모습을 갖춘 몸에서 검은 기운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허물어지려는 조짐이 보였다.
검은 소인은 낙몽의 한 줄기 혼백이기는 한데 너무 허약해서 그냥 놔두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한립은 빠르게 수결을 맺어 낙몽 잔혼에게 푸른 법결을 던져 넣었다. 푸른빛에 휩싸인 소인은 빛의 장막이 생겨 간신히 형체를 유지했다.
“고, 고맙습니다. 수사…….”
검은 소인은 입술을 달싹여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고마워할 것 없다. 탄혼화 속에 숨어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이지?”
무표정한 한립의 어투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수사는 분명 우리 족인이 아닌데……. 단번에 저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를 도와 혼백을 안정시켜 주신 것으로 보아 적은 아닌 듯한데 어찌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우연히 한정족에게서 너희 오몽도 일족을 구해 잠시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오몽도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난풍은 어디 있습니까?”
계속되는 낙몽 혼백의 물음에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말을 믿든 말든 상관없다. 일단 내 질문에 사실대로 답해야 할 것이야.”
“노, 노기를 가라앉히시지요. 어찌된 일인지 저도 분명치 않습니다! 부상이 악화되어 유언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는데, 며칠 전에 정신이 들어보니 혼백이 되어 탄혼화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낙몽 혼백이 한립의 매서운 물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답했다.
“며칠 전에 의식을 찾았는데 어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탄혼화 안에 숨어있었던 것이지?”
“그건, 기운이 너무 약해져서 탄혼화를 떠나는 순간 흩어질 수도 있었고……. 솔직히 류 수사를 경계해서 나서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나를 알고 있다고?”
순간적으로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음, 그것이……. 정신이 들고 족인들이 기도하고 참배할 때마다 섬의 조각상들과 미약하게 남아 있는 연계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사께서 오몽도를 보호해주셨던 것도 대충은 알고 있고요.”
낙몽 혼백은 머뭇거리면서도 솔직히 답했다.
한립은 검은 소인을 보며 말없이 머리를 굴렸다.
상대의 모습으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목숨을 잃은 것은 맞지만 혼백의 일부가 탄혼화에 빨려 들어가 음혼(陰魂)이 된 듯했다.
이제 간신히 기운을 안정시키기는 했지만 뜨문뜨문 말하는 것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낙몽은 한립이 말이 없자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속인 것입니다. 수사가 지선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몸을 회복하겠다는 허황된 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수사께서 앞으로도 족인들을 비호해 주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 놓겠습니다.”
“오몽도에 와 낙 가의 은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능력이 되는 한 그렇게 할 것이다.”
“류 수사께서 그 말씀을 지킬 것이라 믿습니다! 무엇이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시지요.”
“일단 ‘무상맹’에 대해서 말해 보게.”
낙몽의 대답에 한립은 허공의 소머리 가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흐음……. 무상맹은,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굉장히 은밀한 조직으로 구체적인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저도 우연히 그곳에 가담하게 된 것이고요……. 허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것은 무상맹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오, 그게 무슨 말이지?”
“저는 자질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 여러 기연을 얻은 덕에 간신히 합체기에 이르기는 했지만 그 후 수행이 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상맹에서 지원해준 수련 자원과 공법상의 지도를 받아 수행이 급격히 늘었고 단번에 대승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겁에 성공해 선인이 되었지요. 후에 수많은 세월을 고되게 수련했지만 법칙의 힘을 깨닫는데 실패하고 결국 무상맹의 도움 아래 지선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무상맹이 그냥 도움을 주었을 리 없을 텐데?”
“그야 물론이지요. 약속대로 선인이 되고 나서는 지원받은 수련 자원을 갚기 위해 무상맹을 위해 수만 년을 일하고 나서야 겨우 자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회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그 뒤에도 무상맹에 남아 있었고요.”
낙몽 혼백이 탄식하듯 말했다.
“선인이 된 후에도 무상맹의 신분을 유지하려 한 것은 그만한 이득이 있기 때문인가?”
“맞습니다. 무상맹의 강대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고,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무엇이든 거래할 수 있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오래 전, 중상을 입고 몸을 회복하기 위해 탄혼화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무상맹을 통해서였지요.”
“흥미로운 이야기군.”
한립은 턱을 쓸어내리며 침음했다.
“적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무상맹에서 구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심지어 강자를 청해 적을 죽이는 것을 도와 달라 할 수도 있고요.”
“그리 도움이 되었다면 무상맹에 남아 있기 위한 대가도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무상맹이 남고 싶다고 남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요! 규정이 엄격해 회원 자격을 유지하려면 대량의 자원을 맹에 바치거나 아니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상맹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대부분 어떤 임무였지?”
“부끄럽게도 저는 한 번 밖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위험천만한 임무였고, 제 지기(地祇) 화신이 본체를 대신해 치명적인 일격을 맞고 붕괴되어 손상된 머리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본체도 그때 중상을 입고 요행이 목숨만 건졌고요.”
낙몽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줄곧 이곳에 숨어 회복을 하며 탄혼화를 키운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더는 맹의 어떤 임무도 수행할 수 없었기에, 수천 년 동안 자원을 바치는 것으로 가까스로 무상맹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쩌다 목숨을 잃은 것이지? 자네의 지기화신이 완전히 붕괴되었어도 목숨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텐데. 머리가 남아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한립의 말에 낙몽 혼백이 마치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잠시 침묵하다 슬픈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때 본체가 입은 부상은 진작 회복되었습니다. 다만, 화신이 망가져 법칙의 힘을 사용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이곳에 팔천여 년 동안 숨어 있었지요.
그런데 적이 어떻게 이곳을 알았는지 찾아왔고, 어쩔 수 없이 본체로 상대하다 적은 죽였지만 저도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회복해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오래된 부상까지 재발해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려면 평범한 부류들은 아니겠어. 무상맹의 모든 하위 회원들이 전부 자네처럼 조신급이란 말인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임무를 수행했다면서 맹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단 소린가?”
“무상맹 회원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만 만날 수 있고, 평소에는 서로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습니다. 모일 일이 있어도 맹에서 내려오는 특수한 가면을 써야하고요.”
“이게 그 가면이겠지? 확실히 특이하기는 하군. 본체가 진작 명을 다해 혼백 한 줄기만 남아 나조차 발견하기 어려웠는데, 이 가면은 자네를 찾아냈으니 말이야.”
한립은 손을 뻗어 허공의 소머리 가면을 가리켰다.
“더욱 기이한 기능도 많습니다. 가면을 쓴 사람의 기운과 용모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수사들끼리 서로 교류할 수 있게 하지요. 가면을 쓴 사람이 회원 자격을 상실하면 스스로 폐기 처분됩니다.”
“가면을 어찌 처리할 생각인가?”
“이 꼴이 된 제가 뭘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정해진 시일까지 가지 못할 테지요. 맹에서 책임을 따지려 해도 제 혼백은 흩어진지 오래일 겁니다. 그저, 만일 그들이 본족에 해를 끼치려 한다면 수사께서 약속대로 도움을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무상맹이 그렇게 강대하다면 홀로 어찌 오몽도를 지켜낼 수 있단 말인가?”
“저도, 수사께서 그들과 맞서 달라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족인들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게만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냉소하는 한립을 보고 낙몽 혼백이 애달피 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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