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화.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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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더는 안개를 흩으려 들지 않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몸을 휘감고 냉기를 뿜었는데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쉭!
순식간에 안개를 지난 한립은 한구 등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다 우뚝 멈춰 섰다. 조신들이 사라진 탓이었다.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한구 등 세 조신이 다른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순간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하얀 안개를 통과할 때 그의 오감에 교란이 일어나 방향이 어긋난 것이다.
거기다 하얀 안개가 아직 몸에 들러붙어 몸을 얼릴 것처럼 뻣뻣하게 만들고 있었다.
흡!
그가 낮게 기합을 넣자 그의 몸에 7개의 별 문양이 떠올랐다. 피부 위로 반투명한 얇은 막이 생겨나 이상한 하얀 안개를 차단했다.
이 모든 일이 찰나에 벌어졌다.
촤앗!
그가 다른 조치를 취하기 전에 물의 장막의 소용돌이에서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다. 전신에 물결 문양이 새겨진 산만한 남색 거인이었다.
머리는 크고 몸은 비교적 왜소한 거인은 추한 생김새에 손발의 크기도 제각각이라 어린 아이가 대충 만들어 붙여 놓은 듯했다.
남색 물 거인이 한립의 앞을 막고 집채만 한 손바닥을 날렸다.
거대 손의 움직임에 허공이 왜곡되고 한립도 돌풍에 휘청거릴 뻔했다. 바로 중심을 잡은 한립은 물러서지 않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무형의 괴력이 뻗어나가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뒤늦은 반격이었지만 무수히 많은 하얀 파문이 뭉쳐 거대 주먹 허상을 이루고, 먼저 남색 물 거인을 타격했다.
그러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거인의 몸에 새겨진 물결 문양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더니 하얀 주먹 허상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른 곳에서 나와 허공을 강타했다.
소용돌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퍽!
한립은 거대 손에 맞아 꽤 멀리 튕겨나가야 했다. 몸을 가눈 그는 안색이 조금 창백해 진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상처는 없었다.
남색 물 거대 손은 멈추지 않고 또 그를 노렸다.
“육곤 수사, 이만여 년 간 못 본 사이에 유수(柔水) 법칙으로 응결한 무상수귀(無相水鬼) 조종이 더욱 섬세해 지셨습니다. 저 현선의 무식한 주먹질과 딱 상극이에요!”
한구가 허허 웃음을 흘렸다.
“과찬이십니다. 수사의 한빙(寒氷) 법칙도 허역(虛域)의 문턱에는 이른 듯합니다.”
육곤노조는 겸손히 답했지만 득의양양한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하하, 아직 멀었어요. 이제 곡골 수사의 신통을 구경할 일만 남았군요.”
한구는 고개를 들어 몇 십 리를 뒤덮은 검은 구름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은색 뱀 같은 뇌전들이 꿈틀거렸다.
곡골부인이 마지막 법결을 던져 넣자 먹구름이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콰르릉 콰쾅!
뜻밖에도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빗방울은 기이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빗물의 실처럼 떨어졌다.
막 남색 거인의 일장을 피한 한립은 위를 올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수백 개의 빗물의 실이 밧줄처럼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부드득.
은색 광채가 도는 두 팔에 불끈 힘을 준 한립이 빗물의 실을 뜯어냈다.
실들은 아주 부드러워 수십 줄기 혹은 수백 줄기라면 쉽게 끊어낼 수 있었지만 만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로 둘러싸이면 낭패였다.
한립은 푸른 둔광을 일으켜 먹구름이 뒤덮지 않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때 남색 물 거인이 번득 그의 앞을 막고 두 손바닥을 날렸고, 한립도 두 주먹을 내질렀다.
쾅! 쾅!
무형의 괴력이 허공을 갈라 만들어낸 하얀 흔적이 거인의 손바닥을 강타했다. 남색 빛을 반짝인 두 손바닥은 괴력을 그대로 통과시켜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당연히 두 손바닥은 그대로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죽고 싶구나!”
한립이 노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리며 횡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도 수백 개의 빗물 실이 들러붙어 속도가 느려졌지만 손바닥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남색 거인이 입을 벌려 열댓 개의 남색 물 구슬을 분출하고 동시에 몸을 날려 쇄도했다.
한립은 물 거인을 상대하느라 빗물 실을 끊어낼 틈이 없었고 점점 더 움직임이 느려졌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구와 다른 조신들이 몸에서 발산하는 빛도 처음에 비해 어둑해져 있었다.
몇 호흡 지나지 않아 한립은 푸른 누에고치처럼 빗물 실에 둘둘 말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 남색 거인은 공격을 멈추고 고치 옆에서 떠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처리하지요!”
신이 난 한구가 하얀 빛 속에서 수많은 부적들을 불러내 하얀 안개에 흡수시켰다.
안개는 강렬한 법칙 파동을 품었고 그의 몸에서 반짝이는 하얀 빛은 급속도로 어둑해졌다.
하얀 안개가 매서운 기세로 한립을 덮쳐 푸른 누에고치가 하얀 안개 구슬에 갇혔다. 냉기가 가득한 안개 구슬 내부에서 법칙의 힘이 번득였다.
얼음 구슬과 그 안에서 움직임이 없는 신형을 보고 육곤노조와 곡골부인은 한시름을 놓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대의 실력이 놀라워 긴장했는데 셋이 힘을 합치니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오몽도 낙가 족인들은 대경실색한 얼굴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류 선배님…….”
낙풍의 얼굴에도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가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류 선배’ 하나였는데 그를 잃은 낙가의 운명은 그물에 걸린 고기나 다름없었다.
“육신의 힘으로 법칙의 힘을 대항하다니 예상치 못한 실력자였습니다. 하하, 두 분과 함께 오지 않았으면 오늘 고생깨나 할 뻔했습니다.”
한구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간 끌지 말고 끝내시지요.”
“곡골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곡골과 육곤의 말에 한구가 하얀빛을 머금은 손바닥을 펼쳤다. 초승달 모양의 검신에 손잡이는 용의 형상을 한 하얀 칼이 떠올라 법칙파동을 일으켰다.
쉭!
하얀 칼이 거침없이 남색 얼음을 파고 들어갔을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던 한립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와 금색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얼음구슬이 현란하게 반짝였다.
퍼석!
맹렬히 진동하던 얼음구슬에 금이 가고 산만한 금털 거원이 펄쩍 뛰어올라 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하얀 칼을 잡아챘다.
칼은 마구 움직이며 벗어나고자 했지만 거원의 손바닥에는 옅은 칼자국도 낼 수 없었다.
“저, 저게 뭡니까!”
한구와 다른 조신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낙풍을 비롯해 전투를 지켜보던 낙가 족인들도 얼음 구슬을 부수고 등장한 거대 원숭이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낙풍의 눈에는 말 못할 반가움이 어려 있었다.
크아앙!
금털 거원은 만황 흉수와 같은 포효를 내지르고는 하얀 칼에 힘을 실었다.
쨍강!
놀랍게도 칼날이 터져나가 반짝이는 먼지로 흩날렸다. 본명법보를 잃은 한구는 부르르 몸을 떨고 기운이 훨씬 줄어들었다.
육곤노조와 곡골부인은 서로의 눈길에서 놀라움을 읽어냈다. 이때 남색 물 거인이 금털 거인에게 달려들어 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집채만 한 남색 주먹 허상이 튀나와 허공을 뒤흔들었다.
크아아아앙!
그러나 거원은 같이 주먹질은 하지 않고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만큼 숨을 들이마신 뒤 벼락같이 포효했다. 투명한 음파가 공간을 왜곡시키며 검은 공간균열들을 만들어냈다.
남색 주먹 허상이 음파에 휩쓸려 사라지고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은 거대한 음파가 남색 물 거인을 집어 삼켰다.
거인이 몸을 덜덜 떨자 그의 몸에서 물빛들이 빠져나왔다.
“안 돼!”
놀란 육곤이 연달아 남색 법결을 던져 넣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물 거인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떨리다 펑 터져 물방울들로 변했다.
육곤노조를 둘러싼 남색 빛이 바로 어둑해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금털 거원은 먹구름으로 솟아올라 냅다 주먹을 갈겼다. 산만한 금색 주먹허상이 날아올라 먹구름을 때리자 금빛 돌풍이 발생했다.
흠칫 놀란 곡골부인이 이미 대비를 하려 했을 때는 늦었다.
치직치직 거리던 먹구름이 마른 장작처럼 쪼개져 없어지고 하늘이 맑아진 것이다. 끙 앓으며 뒷걸음질 친 곡골부인의 검은 기운도 한층 약해졌다.
천천히 몸을 돌려 세 조신을 훑은 금털 거원의 눈빛이 한구에게 닿았다.
거원이 금빛 허상으로 변해 날아들자, 우연인지 고의인지 육곤노조와 곡골부인은 좌우로 피해 한구에게서 멀어졌다.
파아앗!
뒤로 물러선 한구는 열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여 전신을 감싸는 하얀 보호막을 응결했다.
주술문자가 요동치는 하얀 보호막에서 강렬한 법칙파동이 느껴졌다.
한구의 입에서 하얀 얼음구슬이 튀어나와 주술문자들을 흡수하고 빙룡(氷龍)으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금털거원은 코웃음을 치며 한 팔을 뻗었다.
콰릉!
금빛찬란한 빛이 뻗어나가 산만한 주먹형상을 이루고 하얀 빙룡과 맞붙었다. 빙룡도 지지 않고 입에서 하얀 빛기둥을 뿜었다.
냉기가 가득한 빛기둥 때문에 허공에 서리가 맺혔다.
쿠콰콰쾅!
주먹허상과 빛기둥의 충돌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기둥이 일격에 뚫리자 금색 주먹 허상은 잠깐 멈칫하다가 빙룡에게로 곧장 뻗어나갔다.
쩌저정!
빙룡의 몸이 터져 반짝이는 얼음 조각들이 튕겨 나왔다.
한구가 괴력의 여파에 운석에 맞은 것처럼 튕겨나가는데 금털 거원이 바로 허공을 박차고 그 뒤를 쫓으려 했다.
“류 수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불쑥 들려온 사내의 목소리에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피해 있던 육곤노조와 곡골부인이 머지않은 고공에 떠있었다.
“하하, 실력이 참 출중하십니다. 제가 아주 탄복을 했어요!”
육곤노조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수사의 실력이면 흑풍해역의 규정상 오몽도를 관리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수사의 권리를 인정할 테니 오늘 싸움은 오해였다 치고 좋게 넘어가시지요! 계속 싸워봐야 서로 좋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류 수사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곡골부인도 그만 싸울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금털거원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답이 없었다.
“한구 수사, 이만하면 류 수사에게 가르침은 충분히 받은 것 같은데요. 앞으로 오몽도의 모든 권한을 넘기는 것에 이의 없으실 거라 봅니다.”
육곤노조가 겨우 몸을 가누고 기운이 바닥난 한구를 향해 멀리서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한구는 언제 흉흉하게 달려들었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고 말고요. 류 수사의 실력에 오늘 견문을 넓히고 갑니다. 앞으로 오몽도는 류 수사께서 알아서 관리하시면 되겠습니다.”
“…….”
의미심장하게 한구를 바라보던 금털거원이 금빛 속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세 분께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시면 저도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다들 이만 돌아가고 싶으신 듯하니 편한 대로 하시지요.”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머금었다.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그의 미소에 훨씬 편해졌다.
“류 수사,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것 아닙니까! 온갖 세력이 난무하는 흑풍해역에서 우리 네 섬은 비교적 가깝게 위치해 있으니 자주 왕래 하도록 합시다. 낙몽 수사가 있을 때도 그러고는 했습니다.”
육곤노조가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고인의 지도 없이 외롭게 수련하는 처지에 자주 교류를 하면 좋지요. 때마다 모여서 수련상의 깨달음도 나누고 교환회도 하고 그러시지요. 젊은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이렀으니 금선의 경지에 이를 날도 머지 않으셨겠습니다.”
한구도 한립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시간이 되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반짝인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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