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화. 조신들
*
보름이 지난 어느 새벽.
붉은 태양이 해수면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반사된 빛이 물결을 따라 찰랑였다.
오몽도 전역 몇몇 낙몽 조각상 앞에 대량의 범인과 수사들이 모여 똑같은 의식을 치르고 기도했다. 한립이 기거하는 사합원에도 빛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낙몽이 남겨 놓은 지기화신 머리를 통해 어떻게 신념의 힘을 응결하고 그걸로 법력을 응결하는지 연구를 마친 상태였다.
자신만의 지기화신과 적합한 고계 지선공법만 확보되면 오몽도 사람들이 제공한 신념의 힘을 이용해 원영을 속박한 사슬을 풀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장천병이 녹색 액체를 모으지 못하기에 탄혼화와 고계 지선 공법 모두 십여 년 후의 경매회를 노려봐야 했다.
“10년은 너무 길어…….”
생각에 잠겨 밀실을 나선 한립은 무심코 암녹색 병을 들다 움찔했다. 손끝에서 이전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힘들이지 않고 뚜껑이 열렸고 병 바닥에 콩알 만하게 암녹색 액체가 굴러다녔다. 이전과 달리 색깔이 훨씬 진하고 조금 더 검은빛을 냈다.
작은 병을 들어 올려 요리조리 살피던 한립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음을 편히 가지려 했지만, 장천병이 효력을 잃으면 앞으로 법보나 단약 제련에 타격이 컸다.
그런데 이제 보니 모든 것이 괜한 걱정이었다.
보름이 넘게 걸려 응집한 단 한 방울의 녹액(綠液)은 대체 어떤 효과가 있을까?
한립은 당장 밀실로 돌아가 금제를 발동하고, 옥패를 꺼내 비밀공간으로 통하는 구멍을 만들었다.
비밀 공간 내부는 여전했다.
연잎처럼 커다란 보라색 탄호화는 홀로 공터에 피어 있었고, 낙몽의 유골은 한립이 목재 건물 옆에 묻어주어 작은 묘가 있었다.
보라색 꽃 앞에 선 그는 주저 없이 장천병을 기울여 녹색 액체를 떨구었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액체가 탄혼화 수술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녹색 액체의 효과를 시험하던 때처럼 기대감이 넘쳤다.
꼬박 하루를 기다린 한립은 아침 일찍 비밀 공간 안으로 들어가 탄혼화 앞에 섰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꽃의 변화는 놀라웠다.
꽃잎 가장자리를 따라 금색 주름이 생겨나 금테를 두른 듯했다. 낙몽이 남긴 기록에 적힌 만년 이상 된 탄혼화의 모습이었다.
녹색 액체 한 방울이 2천 년의 숙성 효과를 보인 것이다. 한립은 만족스런 결과에 미소를 지었다.
선계로 온 후 녹색 액체를 모으는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그 효과는 영환계의 수십 배에 달했다. 그는 장천병이 한 달 만에 다시 녹색 액체를 모아낸 것을 보고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지기화신 제련법에서 아직 명쾌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연구하며 어느덧 세 달이 지나갔다.
탄혼화 꽃잎에는 두 번째 금색 주름이 생겨났고, 한립은 선계에서 한 달 동안 모은 녹색 액체 한 방울로 3천년 정도 숙성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대로 3, 4년 후에는 십만 년 이상 된 탄혼화를 얻을 수 있었다.
* * *
석양 아래, 오몽도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숲속의 범인 촌락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항구에 정박한 배들은 점점 많아졌다.
오몽도 도처를 돌며 순찰하던 수사들은 평화로운 모습에 흡족해했다.
반년 전, 대규모 전쟁에서 낙 씨 가문은 멸족을 당할 뻔했지만 조신의 비호로 위기를 넘겼다.
그들은 큰 욕심 없이 무사히 생계를 꾸리고 수련에 매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엇!”
순찰을 돌던 중,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멈춰서 바다 먼 곳을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다른 수사들이 같은 방향을 주시했다. 먼 바다에서 갑작스레 언덕만한 파도가 오몽도 방면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쪽뿐 아니라 그들이 볼 수 있는 모든 방향에서 거대한 파도가 넘실넘실 몰려왔다.
솨아아아.
땅이 흔들리고 은은하게 굉음이 들리고 있었다. 안색이 급변한 우두머리 수사가 다급히 원통 형태의 물건을 꺼내 연결된 줄을 당겼다.
쉬익!
그러자 찬란한 빛이 하늘 높이 놀라갔다. 그때 오몽도 전역 백리 밖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낙 씨 가문 주전 안의 낙풍은 의식으로 섬 주위를 살피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섬의 합체기 장로들도 급히 도착했다.
다들 섬 주변의 이상을 느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물의 장막을 이루고 섬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족장님,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설마…….”
“적의 침공이다. 어서 류 선배님을 청하도록!”
낙풍의 분부에 한 장로가 두말 않고 한립의 거처로 날아갔다.
“섬 전역의 금제를 개방하라!”
낙풍은 이어서 몇 가지 명령을 더 내렸다. 순식간에 빛이 반짝이고 섬의 중요한 거점들이 금제로 둘러싸였다.
바로 그 순간, 더없이 밝은 둔광 세 줄기가 낙가 주전 위에 도달했다.
꽃이 새겨진 하얀 갑옷을 입은 기골이 장대한 거한은 투각(透刻) 가면을 써 얼굴을 절반만 가렸고 그 아래로 길쭉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백갑 거한 옆으로는 피부가 새까만 편인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 눈에서 남색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색 장삼을 걸친 여인은 우아해 보이는 용모에 약간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셋 다 표정이 어색해서 공들여 제련한 꼭두각시 같다는 점이었다.
“다, 당신들은!”
낙풍은 섬을 둘러싼 물의 장막 너머로 그들을 보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 다른 장로들도 매한가지였다.
“한구조신……. 육곤조신……. 곡골조신!”
낙풍은 겁에 질려 있었고, 그의 떠듬거리는 소리에 낙가의 젊은 수사들도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육곤과 고골은 오몽도와 먼 섬의 조신들로 크게 교류가 없었지만 한구조신은 얼마 전 오몽도를 침략한 한정족의 조신이었다. 철천지원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조신들은 백여 장 거리를 두고 덜덜 떨고 있는 오몽도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한구수사, 낙몽이 죽은 것은 확실하겠지요? 어째 얼마 전 한정족이 대패해 퇴각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만.”
흑포 노인은 서늘한 눈빛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낙몽이 살아 있다면 만년 가까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겠습니까? 얼마 전 있었던 일은 오몽도에 새로 나타난 선인 때문입니다.”
백갑 거한이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뭐라고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 않습니까!”
깜짝 놀란 여인이 따져 물었고, 흑포 노인도 불만스럽게 백갑 거한을 쳐다보았다.
“다 조사를 해두었으니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막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로 어째 이곳에 왔는지는 몰라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오몽도에 아무도 없으면 제가 두 분과 함께 올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한구는 차분히 답했다.
“이제 막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요?”
남색 장삼 여인이 머뭇거리는 기색을 드러내자 흑포 노인도 이렇다 할 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시지요. 제가 사정을 미리 설명하지 못했으니 약속한 보수에 자우명신단(子牛明神丹)을 한 알씩 더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한구는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수사께서 그리 성의 표시를 하시는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흑포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고, 남색 장삼 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 막 비승한 수사가 우리 셋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어서 움직이지요. 시간 끌어 좋을 것 없습니다.”
말을 마친 흑포 노인이 먼저 손을 저었다. 물의 장막에서 열 줄기의 굵직한 물기둥이 튀어나와 떨어져 내렸다.
중간에서 하나로 합쳐진 물기둥들은 거대 손으로 변해 낙풍 등이 있는 일대를 으깨버리려 했다.
쿠쿠쿵.
거대 손이 땅에 닿기 전에 광풍이 몰아치더니 섬의 요지를 보호하는 보호막이 격렬하게 흔들리다 몇 개는 터져나갔다.
낙풍은 피할 방도도 없어 거대 손에 깔리기 직전이었다.
쐐액!
그 순간, 멀리서 푸른 둔광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낙풍 무리 앞에 섰다.
후웅!
푸른 인영은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고, 무형의 괴력이 허공을 찢고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한 파문을 방출하다 물의 거대 손과 충돌했다.
콰아앙!
물의 거대 손이 주먹에 깨져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이 튀었다.
충돌로 인한 충격파가 돌풍을 일으켜 인근의 산과 나무를 가루로 만들었다.
다행히 범인들과 수사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한구 등 허공의 조신들은 푸른빛을 거둔 한립을 보고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조신 대인!”
죽다 살아난 오몽도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낙풍도 한시름은 놓았지만 아직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한립이 아무리 강해도 상대는 조신 셋이었다.
“세 분들은 누구시고, 오몽도에는 무슨 일이신지요?”
한립이 주먹을 거두고 큰 소리로 물었다.
“류 선배님, 저들은 다른 섬의 조신들입니다. 중간의 하얀 갑옷을 입은 거한이 한정족 조신 한구이고, 검은 장포 노인은 육곤노조, 중년 여인은 곡골부인이라 불립니다.”
한립 곁으로 다가가 낙풍이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한구 수사, 이건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상대는 현선입니다. 어딜 봐서 수사가 말하던 약골이냔 말입니다?”
육곤은 서늘하게 한구를 노려보며 전음을 보냈고, 곡골부인의 표정도 당연히 어두웠다.
“그렇다고 해도 비승을 한지 1년도 안된 자입니다. 체내의 법력을 아직 선령력으로 전환하지 못했을 텐데 뭘 두려워해야 한단 말입니까?”
한구는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육곤과 곡골은 시선을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류 수사시겠군요! 오늘 우리 셋이 찾아온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을 하실 겁니다. 오몽도는 우리 세 가문과 오래된 원한이 있어 낙가를 멸하려 하니 아무 상관도 없는 수사는 괜히 나서지 마시고 떠나시지요. 그러면 일전에 본족의 족인 몇 명을 죽인 일은 눈감아 드리리다.”
한구가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낙풍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한립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 낙가 사람들의 표정도 급변했다.
장로급과 나이 많은 수사들을 제외하면 어찌된 일인지 상황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이거 그렇게는 안 되겠군요. 제가 약속한 것이 있는데 오몽도를 버리고 어찌 그냥 가겠습니까? 세 분이야 말로 괜히 감정 상하는 일 만들지 마시고 그만 물러가시지요.”
한립은 상대의 협박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우리 보고 물러나라? 막 비승한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말이 통하지 않자 본색을 드러낸 한구가 손을 뻗어 하얀 안개 덩어리를 불러냈다.
안개 속에서 하얀 얼음송곳이 나타나 빛이 깜빡거릴 때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쉬쉬쉬쉭!
별안간 수백 개가 된 하얀 얼음송곳이 하늘을 뒤덮고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육곤노조와 곡골부인도 공격을 시작했다.
남색 빛에 둘러싸인 육곤노조는 다섯 손가락을 벌려 남색 빛을 아래쪽 물의 장막으로 날려 보냈다.
쿠릉.
물의 장막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 말 수 만 마리가 달려오는 듯한 굉음을 내고 있었다. 곡골부인은 눈을 감고 수결을 맺어 검은 안개를 일으켰다.
안개는 새까만 구름으로 변해 정체모를 파동을 발산했고 방원 천리 내의 물기가 모여들었다.
이때 푸른 기운을 일으킨 한립은 떨어지는 얼음송곳도 아랑곳 않고 푸른빛으로 변해 한구노조 등 세 수사가 있는 곳으로 솟구쳤다.
가슴과 배에서 7개의 별빛이 반짝여 3할은 커진 몸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힘이 허공을 갈랐다.
채채채챙!
눈에 보이는 하얀 파문이 주먹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하늘을 뒤덮고 떨어지던 얼음송곳이 터져나가 얼음조각을 흩날렸다. 그걸 본 한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법결을 날렸다.
얼음조각들이 터지며 만들어낸 하얀 안개가 한립을 감싸고 강렬한 법칙파동을 뿜어냈다.
시야가 뿌옇게 변한 한립은 소매를 털어 광풍을 일으켰지만 주변의 하얀 안개는 출렁일 뿐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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