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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99화 (1,256/2,000)
  • 1499화. 효력을 잃은 녹색 병

    *

    구멍은 원형 통로를 통해 어두컴컴한 출구로 이어졌고, 그곳을 나서는 순간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의식중에 코를 킁킁 거린 한립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숲에 진한 안개가 내려 앉아 있어 신비해 보였는데 천지영기는 흑풍해역과 비슷했다.

    고목들의 나뭇가지가 연결돼 만들어진 지붕 덕에 숲 안은 대체로 어둑했다. 한립은 고목 틈을 통해 광장으로 보이는 탁 트인 공간을 발견하고 걸어갔다.

    수풀을 빠져나오자 광장이 아니라 그저 나무가 없는 너른 공터였다.

    공터 중앙에는 이상하게 생긴 보라 색깔의 커다란 꽃이 외로이 피어있었다.

    목란을 닮은 보라색 꽃은 연잎만큼 컸고 이파리는 길쭉길쭉 했으며 수술은 닭 벼슬처럼 괴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가 공간에 들어서서 맡은 기이한 향기의 근원이 바로 이 꽃이었다.

    꽃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2층 나무 건물은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지 창틀이 썩고 지붕이 내려 앉아 푸른 이끼가 껴있었다.

    그 건물 입구에 회백색 해골이 앉아 무엇을 갈구하듯 앙상한 두 손을 뻗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손은 보라색 꽃이 있는 방향을 향해 있었다.

    잠시 해골을 살피던 한립은 이채를 띠고 다가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의복은 벌써 삭아 먼지처럼 뼈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골격만은 희미하게 보광을 반짝였다.

    한립은 손을 저어 가벼운 바람으로 뼈에 붙은 먼지와 의복 잔해들을 날려 보냈다.

    달그락!

    해골에서 옥간 몇 개와 저물 반지 한 개가 굴러 떨어졌다.

    한립은 옥간 중 하나를 먼저 집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

    “낙 가의 후인이여 당황하지 말라. 너희의 조신이었던 나 낙몽은 중상을 입고 구천여 년 간 요양하다 명을 다한다. 본래 탄혼화(誕魂花)를 키워 지기화신을 새로 주조하려 했으나 꽃이 피기 삼천여 년을 앞두고 강적을 만나, 그를 죽이기는 했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아마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잠시 후 눈을 뜬 한립은 작게 탄식했다.

    이 글에 따르면 낙몽은 이미 천여 년 전에 명을 달리했는데 족인들은 아직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도 낙몽이 죽은 것을 몰랐기에 그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립은 옥간을 들고 눈앞의 낙몽 유골을 바라보았다.

    오몽도 조신이 죽으면서 그 사실을 직접 알리지 않고 이곳에 유언을 남겨 놓은 것도 족인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혹시나 나중에 도겁에 성공한 족인이 그가 남겨 놓은 재료로 지기화신을 제련해 오몽도의 새로운 조신이 되어 후대를 비호하기를 바라면서.

    수사들이 무정하다고는 하지만 혈연에 관해서 만큼은 어느 정도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낙몽 수사, 내가 오몽도의 새로운 조신이 되어주지는 못하지만 능력이 닿는 대로 당신의 족인들을 돌봐주겠습니다. 이 재료들은 그 대가로 여기지요.”

    한립은 담담히 말하며 남은 세 개의 옥간 중 하나를 들어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곳엔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바로 지기화신 제련법이었다.

    옥간의 내용에 따르면, 지기화신은 제련 과정이 복잡한 것은 물론 필요한 재료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결코 빠질 수 없는 재료가 바로 탄혼화였다.

    온전한 탄혼화 한 송이에서 탄혼액을 추출해 다른 재료들과 섞어 제련을 해야만 지기화신 주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오래 자란 탄혼화 일수록 효과가 좋았는데 최소한 만년 이상은 되어야 분혼을 응결하는 효과를 지녔고 십만 년 이상 된 것을 최고로 쳤다.

    옥간 말미에 탄혼화의 구체적인 모습이 서술되어 있었다.

    백년이 안 된 탄혼화는 꽃 없이 이파리뿐이었고, 백년이 넘어야 하얀 꽃을 피웠다.

    천년 후에는 하얀 꽃이 붉게 물들다가, 오천년 후에는 보랏빛으로 바뀌어 팔천년 후에는 수술이 닭 벼슬 모양을 띠게 된다.

    만년이 지나면 꽃잎에 금색 주름이 생기고 그 후 만년마다 주름이 추가된다.

    10만 년이 지난 다음의 탄혼화에 대해서는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워낙 드문 경우라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어떤 이야기도 적혀 있지 않았다.

    탄혼화는 지기화신을 제련하는 것 외에 지선이 수련의 고비를 넘어서는 데도 큰 효험이 있어 천년 된 탄혼화를 찾는 것조차 어려웠다.

    흑풍해역 시장에서는 만년은 고사하고 오천 년 된 것도 나오는 족족 누군가 그 자리에서 사가곤 했다.

    낙몽 유골 근처에 피어있는 보랏빛 꽃은 의심할 여지없이 팔천 년 이상이 된 탄혼화였다.

    한립은 다음 옥간으로 넘어갔다.

    사용된 언어가 다른 옥간과 다르고 내용도 굉장히 난해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찬찬히 연구해 보니 신념의 힘을 제련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신념의 힘을 어떻게 법력으로 전환하는지와 법칙의 힘을 어떻게 응결하는가에 대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옥간은 낙몽의 수련 기록과 다른 조신들에 대한 분석이었다. 한립은 그 안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다.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해양 면적이 육지 면적을 훨씬 초월하는 흑풍해역은 물 속성 천지원기가 가장 충만했다.

    그래서 물 속성 법칙을 응결하는 것이 다른 법칙의 힘을 얻는 것보다 쉬웠고 전투를 벌일 때도 물의 법칙을 사용하면 3할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해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물의 법칙에 관련된 지선 경전을 찾는 이들이 많았고, 흑풍해역에서 물의 법칙에 관한 자원은 다들 앞 다투어 차지하려 들어 항상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세 옥간을 거둔 한립은 시선을 저물 반지로 옮겼다.

    예상대로 그 안에는 물 속성 지기화신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담겨 있었고, 머리만 남은 조각상에 사용된 남색 수정 돌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침없이 그 안의 물건들을 챙긴 한립은 탄혼화로 걸어갔다.

    “흠…….”

    잠시 생각을 해본 그가 장천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녹색 액체 한 방울을 꽃에 떨구었다.

    영환계를 떠나기 전에 모아둔 것으로 흑풍해역에 온 후로 사슬에서 벗어나는데 집중하느라 사용할 기회가 없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장천병이 있으니 만년 이상 된 탄혼화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만 충분하면 십만 년까지도 숙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남는 시간 동안 한립은 건물은 물론 숲까지 샅샅이 뒤져 별 다른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공간통로를 통해 밀실로 돌아왔다.

    그가 빠져나오고 소용돌이 속 구멍은 웅웅 진동하다 소실되었다.

    한립은 다시 나타난 하얀 옥패를 끌어다 저물탁 안에 넣어 두었다. 옥패가 바로 낙몽 노조의 신비한 공간으로 통하는 열쇠였다.

    한립은 밀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기화신 제련 방법이 적힌 옥간을 꺼내 연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 어둑해 지고 오몽도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걸렸다. 밀실에 앉아 있던 한립은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밝은 보름달을 본 그는 목에 걸어둔 장천병을 풀어 바닥에 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빛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작은 병으로 몰려들었다.

    하얀 빛 알갱이들이 거대한 빛무리를 이루고 요란하게 반짝였다. 그것을 본 한립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천병이 선계에서 달빛을 흡수하는 광경이 영환계에서보다 요란하다는 것은 훨씬 더 빨리 녹색 액체를 응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영환계에서는 이틀에 한 방울을 모았으니, 선계에서는 하룻밤이면 충분할지도 몰랐다.

    그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푸른 법결을 날려 장천병이 일으키는 이상 현상을 가리고 그 옆에 주저앉아 옥간을 들었다.

    하룻밤은 금방 지나갔다.

    그러나 장천병을 들어 올린 한립이 멈칫했다. 병뚜껑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해 녹색 액체가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선계에서도 이틀이 걸린다는 건가…….”

    한립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옥간 연구를 계속했다. 다시 밤이 오고 장천병을 꺼내 둔 그는 이튿날 병을 들고 난색을 표했다.

    병이 여전히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선계의 천지영기가 영환계보다도 옅단 말인가?’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 다음날도 병을 여는데 실패한 한립은 조금 불안해졌다.

    오늘 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신중한 성격과 더불어 장천병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갑자기 녹색 액체를 얻을 수 없게 되면 당장 만년 이상 된 탄혼화를 구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시도는 4일, 5일 그리고 6일간 계속되었다. 7일 째에도 장천병에 녹색 액체는 모이지 않았다.

    한립은 밀실에 앉아 작은 병을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인계에서도 길어야 8일이면 녹색 액체 한 방울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그는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이곳이 진선계이기 때문이다. 하계에서 진선 마량이 한 말에 따르면 장천병은 선계 구원관의 보물이었다. 선계로 돌아온 병에 그가 모르는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계면의 틈에서 외눈박이 거인과 싸우며 법칙의 힘이 담긴 지연 광선을 병에 담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차차 평정을 되찾았다. 장천병은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지만 그것이 없다고 생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매일 밤 달빛을 잘 흡수하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녹색 액체를 생산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있었다.

    한립은 매일 밤 달빛의 힘을 모으며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지기화신 제련에 필요한 탄혼화를 구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는 낙풍에게 말해 잠시 빌려온 오몽조 조신 조각상의 머리를 띠우고 춤을 추듯 두 팔을 움직였다.

    그의 동작은 독특하면서도 야만족이 하늘을 숭배하는 듯한 동작을 담고 있었다.

    파앗.

    조각상 머리 표면에 남색 광채가 떠오르더니, 동작이 빨라짐에 따라 반짝거렸다. 허공에 남색 빛 알갱이들이 쉼 없이 머리로 모여들었다.

    남색 광채는 지기화신이 오몽도 전역에서 모아온 신념의 힘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형의 힘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밀실과 사합원을 진동하게 만들었다.

    한립은 담담히 주문을 외웠다. 남색 머리가 발하는 빛은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만년 가까이 모아온 신념의 힘은 방대했지만 낙몽이 죽었기에 그의 지기화신 머리로는 조종할 수 없었다. 그도 옥간에 적힌 방식에 따라 신념의 힘을 이해하고 감응하기 위해 연습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때, 밀실 사방의 금제를 뚫고 하얀 부적이 날아들었다.

    부적을 불러와 의식을 불어넣은 한립은 동작을 멈추고 남색 조각상 머리를 탁자에 올려놓은 채 밀실을 나섰다.

    사합원 밖에서 낙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낙 족장, 고계 지선 공법 때문에 급히 보자는 것인가?”

    “맞습니다. 친분이 있는 수사들과의 모임에서 얻은 정보인데, 다음번 흑풍도 경매회에 고계 지선 공법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예를 취한 낙풍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수고했네. 다음번 경매회면 10년 후라……. 그간 다른 고계 공법과 탄혼화의 소식이 없는지 계속해서 알아봐 주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낙풍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려 했다.

    “잠깐.”

    “다른 분부가 있으십니까, 류 선배님?”

    “아닐세. 나를 위해 정보를 알아보느라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수고는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한립의 칭찬에 낙풍은 손을 저었고 몇 마디 한담을 하다 물러갔다. 한립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 밀실로 몸을 돌렸다.

    낙풍에게 비밀공간과 그 시체에 대해 말하려다 그만 둔 것이다.

    탄혼화의 존재 때문에 함부로 밝히기 꺼려졌다. 욕심이 있는 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오몽도에 화가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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