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화. 전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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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각이 되지 않아 오몽도 서북쪽 해안 절벽 안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푸른 장삼을 걸친 건장한 체구의 한립과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한 유생 복장의 낙풍이었다.
동부에서 수련하던 그는 한립의 전음부를 받고 급히 이곳에 온 참이었다.
“류 선배님, 이곳으로 저를 부르신 것은 따로 분부하실 일이 있으셔서 입니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네.”
한립은 곧장 제단으로 걸어가 남색 조각상 머리를 들어올렸다.
낙풍은 그가 두 눈에 강렬한 남색빛을 머금고 조각상 머리를 살피는 것을 보고는 무의식중에 막으려다 멈춰 섰다.
한립의 손끝이 조각상 미간에 닿자,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빛이 반짝이고 조각상 머리 위로 물결이 일었다.
‘이건?’
그다지 살상력이 없어 보이는 빛의 출현에 한립은 깜짝 놀랐다. 체내의 원영을 감싸고 있는 사슬과 빛이 미약한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손끝에서 정순한 법력을 뿜어 조각상 머리로 불어넣었다. 머릿속은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신념의 힘으로 혼잡했다.
그 중 남색 법력 몇 줄기가 한립의 푸른 법력과 충돌해 연기처럼 흩어지기도 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얼른 조각상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낙풍을 돌아보았다.
“낙 족장, 오몽도 조신의 지기화신은 법칙의 힘을 사용하는 것 외에 어떤 신통을 부렸었지?”
조각상 머리 위의 파문이 가라앉고, 조각상 머리가 무탈한 것을 보자 낙풍은 안심하고 입을 열었다.
“낙몽 대인의 지기화신은 원영은 없어도 의식의 힘을 약간의 법력으로 바꿔 다른 술법을 펼치는데 쓸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역시 그랬군.”
지기화신은 신념의 힘을 흡수해 법칙의 힘을 응집하는 것은 물론 법력으로 전환해 술법을 보조할 수도 있었다.
지선이 길에 들어서 자신만의 지기화신을 제련해내면 충분한 법력을 모아 본체의 원영이 사슬의 속박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조금 전 조각상 머리의 신념의 힘이 사슬과 공명했으니 지기화신이 그가 생각지 못한 다른 작용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지선의 길에 들어서면 법력이 혼잡한 신념의 힘에 오염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영원히 지선 수행에 묶여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법력이 신념의 힘에 완전히 오염되기 전에 원영이 구속에서 벗어나면 지선의 길을 버리고 다시 대도를 추구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마음속으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장서각의 경전에는 지선에 대해 간단한 소개만 적혀 있었네. 진정으로 지선이 되면 어떤지 알고 있는 바가 있는가?”
“지선의 길을 고려하십니까?”
낙풍은 조금 놀라 물었다.
“일단 알고 있는 바를 말해보게.”
“보통 지선이 되는 분들은 출신 종족의 조신이 됩니다. 자손이 번창해 십여 대 자손까지 볼 정도로 장기간 신념의 힘을 축적하고 일정한 완충 기간을 거쳐야 진정한 지선의 길에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후손들이 제공하는 의식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평범한 사람들의 것도 가능하지만 그럼 워낙 의식의 힘이 난잡해져 응결하기 어렵습니다. 후손들의 추앙이 가장 진실하기에, 자신에게 적합한 신념의 힘을 모으기 위해 시간이 조금 걸려도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쪽을 택하는 것이지요.”
“계속 말해보게.”
“지선의 수련 속도와 응결되는 법칙의 위력은 신념의 힘의 양과 질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빠르게 실력을 키우려면 부단히 장악한 지역을 넓히고 더 많은 족인들을 배출해 세력을 키워야…….”
낙풍은 오몽족 중 가장 수행이 높고, 흑풍해역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만큼 지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들을수록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거대한 종족을 키워낼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해야 필요한 양의 신념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는 주변 세력과 쟁투를 벌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낙 족장, 이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특수한 경우도 있겠지?”
“그게……. 다른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 조신이 되지 않고 그냥 지선이 되는 것이지요.”
“조건이 붙겠군.”
“예, 흑풍해역 전역에서 성공한 사례가 드문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택하시면 전제조건 두 가지를 만족시켜야 하거든요.”
낙풍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들어보지.”
“첫째로 수사의 지기화신에 사용된 재료가 법칙의 힘을 함유한 천지보물이어야만 합니다. 둘째로는, 조신 단계를 건너뛸 만한 강력한 지선 공법을 익혀야 하고요. 즉, 친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신념의 힘도 응결할만한 고계 지선공법이 필요합니다.”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에 고계 지선공법…….”
한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 같은 약소 종족에 고계 지선 공법이 있을 리 없고, 흑풍해역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재료는 낙몽 조신께서 남겨두신 것이 있으나 제가 배움이 짧아 그 중에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원하신다면 선배님께서 직접 살펴보시지요.”
“좋네, 바로 안내해주게!”
* * *
낙풍과 한립은 금지를 떠나 어느 비밀 편전의 지하 밀실로 이동했다.
그리 넓지 않은 밀실 안에는 재료들이 가득 쌓인 나무 선반들이 열댓 개가 보였다.
요수 재료, 영초, 광석 등은 귀한 것들이었지만 겨우 연허, 합체기 수사에게나 유용한 재료들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낙풍은 한립을 가장 마지막 벽옥 선반으로 이끌었다.
짙은 남색 보호막이 쳐진 선반 위에도 여러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조신 대인께서 남기신 물건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말을 마친 낙풍은 남색 영패를 꺼내 빛을 비추었다.
팟!
금제가 가신 선반 위에 놓인 것은 대부분 동그란 검은 암석으로 냉기 가득한 파동을 일으켰는데 특수 재료인 듯했다.
검은 광석들 외에는 향기 나는 주황색 나무토막 몇 개, 은은한 금빛 광석 그리고 부서진 짧은 창 법보 두 자루와 손바닥 크기의 하얀 옥패가 있었다.
한립은 그것들을 일일이 들어 자세히 관찰하다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았다. 주황색 나무토막과 금색 광석은 진귀한 연기 재료였고, 검은 광석은 그도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다들 법칙의 힘은 함유하고 있지 않았다. 짧은 창 두 자루는 이전에는 위력적인 영보였겠으나 너무 손상이 심했다.
한립의 표정을 보고 낙풍도 낙심했다. 그는 진심으로 한립이 지선이 되어 오래도록 낙 씨 가문 일맥을 비호해주기를 바랐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낙 씨 가문에서 새로운 조신이 탄생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이때, 한립이 하얀 옥패를 들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류 선배님, 옥패에 특이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당장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군. 갖고 가서 살펴봐야겠네.”
“예, 그러시지요.”
이곳에 쌓인 물건들은 낙풍도 수차례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나 고계 지선 공법에 대해서는 자네가 소식을 좀 알아봐 주어야겠어.”
“물론입니다, 선배님!”
한립의 분부에 낙풍이 고분고분 답했다.
* * *
잠시 후, 사합원 밀실 안.
방석에 앉은 한립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원영 봉인을 단시간 내로 해결하려면 지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드넓은 흑풍해역에 천지재료나 기이한 요수들이 서식하는 곳이 없을 리 없었다.
고계 수사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위험한 곳일수록 보물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팟.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문득 기포공간에서 격살한 외눈박이 거인의 눈알을 불러냈다. 눈알에서 방출된 광선이 적의 움직임을 늦추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시간이 없어 자세히 연구해 보지 못했는데 만일 거인의 눈알이 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한립의 눈이 남색 빛으로 반짝였고, 미간이 갈라져 새까만 요목이 나타났다.
쉭!
빛을 번득인 세 눈에서 빛줄기가 쏘아져 나와 합쳐졌다. 빛줄기들이 어두운 남색 눈알을 형성하고 괴이한 파동으로 거인의 눈알을 감쌌다. 동시에 한립의 의식도 수정실로 변해 눈알을 투과하고 있었다.
“이건…….”
의식의 힘을 남김없이 사용한 결과 눈알 깊은 곳에 아주 연한 하얀 빛 알갱이 몇 개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립은 기쁜 마음으로 의식의 실을 안개 형태로 바꾸어 빛 알갱이들을 세밀하게 살폈다. 미약하지만 하얀 빛 알갱이 속에 모종의 법칙의 힘이 존재했다.
한립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굴렸다. 그의 추측대로 외눈박이 거인이 발산한 광선은 법칙의 힘이 담긴 공격이었다.
그게 무슨 법칙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인이 주로 흙 속성 신통을 부렸고 중력을 이용해 적을 가두는 수법으로 보아 눈알이 품고 있는 것도 흙의 법칙에 속하는 중력 법칙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상관없겠지…….”
어떤 법칙이든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를 구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눈앞의 어두운 남색 눈알을 흩어버린 그의 얼굴에 옅은 피로감이 떠올랐고, 운학초를 불러내 삼키고서야 안색이 돌아왔다.
한립은 눈알을 저물법기 속에 넣어두고 이번에는 사람 얼굴 문양이 있는 호두를 불러냈다.
쉭!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자 두 눈과 미간의 파멸법목이 다시금 세 줄기 빛을 뿜어 어두운 남색 눈알을 만들어냈다.
파동이 인면(人面) 호두를 감싸자 의식 수정 실이 호두 내부를 투과했다.
주문을 멈춘 한립은 어두운 남색 눈알을 거두고 또 다른 운학초를 꺼내 씹었다. 인면 호두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있었다.
미약했지만 호두도 정순한 흙의 법칙을 함유하고 있었다. 시간을 두고 다른 인면 호두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보니, 전부 마찬가지였다.
“지선이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해결이 된 셈인데, 눈알로 할지 호두로 할지 고민 좀 더 해봐야겠군.”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음했다.
낙풍의 말에 따르면 지기화신이 어떤 법칙을 응결해 내는가는 조각상이 어떤 재료로 제련되는 가와 관계가 깊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호두들을 조심스럽게 넣어두고 하얀 옥패를 꺼냈다. 명청령안을 발동하자, 하얀 옥패 표면에 물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그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남색 물빛이 평범한 금제일 리는 없었다. 물빛 속의 찰랑이는 파문이 여러 가지 허상을 만들어냈다.
이런 금제를 펼쳐둔 것은 분명 낙몽 조신일 것이다.
휘휘휙!
한립은 호기심에 손가락을 튕겨 하얀 깃발 열댓 개를 날려 보냈다.
깃발들이 내뿜은 요란한 하얀빛이 연꽃무늬의 진법을 형성해 웅웅 진동했다.
하얀 옥패가 진법의 힘에 의해 떠올랐고, 연꽃무늬 진법에서 하얀 주술문자들이 새어나와 옥패로 모여들었다.
옥패의 물빛은 하얀 주술문자의 침입을 막으려 했지만 한립의 변화무쌍한 조종에 길을 터주고 말았다.
하얀 옥패에 결려 있는 금제는 꽤 강력해서 강제로 깨려 했다면 어렵겠지만, 줄곧 진법을 연구해 온 한립이 의식의 힘과 명청령안의 힘을 빌려 약점을 알아냈기에 가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옥패의 물빛을 옅어졌다.
“가라.”
한립의 두 손이 빠르게 수결을 맺었고 연꽃무늬 진법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주술문자들이 열댓 자루의 송곳으로 응결되어 옥패를 찔렀다.
캉!
드디어 남색 물빛이 깨졌다.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옥패를 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콰르릉 콰쾅!
옥패 위의 문양들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더니 눈을 찌를 듯한 하얀 빛과 짙은 안개를 발산했다.
‘이게 무슨!’
그 안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천둥소리에 한립은 깜짝 놀라 동작을 멈췄다. 대량의 하얀 안개가 옥패를 중심으로 휘몰아쳐 커다란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소용돌이 중심의 새까만 구멍은 처음에는 주먹만 하다가 이제는 맷돌 크기로 커졌다. 공간파동을 발산하는 소용돌이 너머의 공간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의식으로 새까만 구멍 안을 살피려던 한립은 헛웃음을 흘렸다. 괴이한 힘의 방해로 의식이 단절되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탓!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몸을 날려 새까만 구멍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