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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97화 (1,254/2,000)
  • 1497화. 시도

    *

    사합원, 밀실 안.

    바닥과 탁자 위에 하얀 종이 뭉텅이들이 놓여 어지러워보였다.

    한립은 의자에 앉아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으며 탄식하다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쥐어짜 원영의 법칙 사슬을 풀어보려 했지만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실제로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법칙사슬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사슬이 함유한 것이 어떤 종류의 법칙인지만 알아도 희망이 보일 텐데.

    쉭!

    이때, 바깥에서 하얀빛이 날아들어 전음부로 변했다. 전음부를 끌어와 의식을 불어넣은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잠시 후 밀실을 나갔다 돌아온 한립은 옥간으로 가득 찬 옥함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열댓 개의 옥간들을 다 살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옥간에 적힌 비술들은 이전 비술보다는 고명했지만 여전히 그의 경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낙풍의 세력이 작다보니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내가 직접 흑풍도를 한 번 다녀와야겠어.’

    그는 다음 푸른색 옥간을 이마에 가져다대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격원천심련(隔元天心煉)이라는 비술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원영을 겨냥한 비술이 아니라 법력 자체를 속박한다는 것을 빼면 원영을 구속한 사슬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옥간 말미에 보니, 과연 격원법련(隔元法鏈)이라 불리는 법칙신통을 통해 만들어진 비술이라고 적혀 있었다.

    “격원법련……. 원영의 사슬들이 혹시…….”

    한립은 얼마 남지 않은 옥간들을 전부 읽고는 격원천심련이 적힌 푸른 옥간만 남기고 넣어 두었다.

    며칠 후, 낙풍은 한립으로부터 몇몇 재료들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고 자신이 그럭저럭 해냈음을 깨달았다.

    또 상대가 요구한 재료들의 가격은 상당했지만 원하는 수량이 많지 않아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

    * * *

    보름 후.

    고요하던 사합원에서 연달아 둔탁한 폭음이 들려왔다.

    쿠쿵. 쿵. 쿠쿵.

    이어서 열댓 개의 우윳빛 빛기둥이 솟아올라 하얀 보호막을 이루고 사합원과 외부를 차단했다.

    게다가 그 둘레로 노란빛이 크게 번져 노란 보호막이 사합원과 하얀 보호막을 둘러싸고는, 8개의 거대 은색 깃발이 바람을 가르고 나타나 은색 안개를 내뿜어 반경 수십 장을 은폐했다.

    해질 무렵이라 오몽도가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을 때였다.

    낙풍과 몇몇 장로들이 높은 탑 위에 서서 멀리 은색 안개로 덮인 사합원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류 선배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이렇게 요란한 현상이 나타나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명을 받아 흑풍도에 비술을 구하러 다녀온 낙한량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우리는 관여할 것 없다. 그저 입 다물고 지켜보면 될 것이야.”

    “예!”

    낙풍의 말에 낙한량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한정족이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지만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그들만은 아니란 것을 다들 알고 있겠지? 우리의 안위는 류 선배님께 달렸으니 결코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없어야 할게야.”

    “예!”

    “전족에 명령을 내린다. 섬을 봉쇄하고 순찰 인력을 늘려 누구도 류 선배님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섬 안의 신분이 의심스러운 자들도 철저히 감시해 선배님의 정체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엄숙한 낙풍의 명령에 장로들은 분분히 일을 처리하러 나가고, 탑 위에는 낙풍 홀로 남아 한립이 있는 사합원을 바라보았다.

    이때 사합원 위로 거대한 진법이 서서히 떠올랐다.

    쿠쿠쿵.

    깜빡깜빡 거리는 은색 문양이 가득한 지면에서 7개의 은색 기둥이 솟아올라 북두칠성의 배열을 이루고 경원관의 취성대 진법과 유사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진법 중심에 앉은 한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석양이 지고, 오몽도에 어둠이 깔렸다. 유독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 시작되었다.

    한립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미소 띤 얼굴로 주문을 외며 진법에 법결들을 던져 넣었다.

    웅웅!

    아득한 빛을 머금은 거대 진법에서 영력 파동들이 퍼져나가 사합원에 삼중으로 펼쳐둔 금제도 그것을 완벽히 막지 못했다.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진법의 운용 속도가 빨라지고 하늘의 북두칠성이 미세하게 반짝여 별빛을 사합원으로 떨구었다.

    일곱 줄기의 별빛 기둥은 진법의 은색 기둥 위로 떨어져 기둥 표면의 문양들을 번쩍이게 만들었다.

    별빛이 모일수록 일곱 기둥의 빛은 강해졌고, 7개의 반짝이는 눈동자 문양을 만들어냈다.

    쉬쉬쉬쉭!

    일곱 개의 눈동자에서 각각 손가락 굵기의 별빛을 뿜어 한립의 배, 가슴, 미간 등 일곱 군데로 스며들었다.

    그는 언뜻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고 배에는 남색 별빛 7개가 떠올랐다. 별빛들은 약하게 반짝거리다 가느다란 은실로 변해 그의 경맥 곳곳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단전의 법력도 유유히 경맥을 타고 흘렀다. 별빛 실과 법력은 같은 경맥을 흐르면서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이에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자 수결 위로 하얀 빛이 방출되었다.

    법력, 별빛의 힘 그리고 하얀 주술문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하나로 합쳐져 미세한 은색 실처럼 그의 경맥을 타고 쾌속으로 돌아다녔다.

    이 빛의 실은 원영의 사슬을 해결하기 위해 비술을 이용해 특별히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게 통해야 할 것인데.’

    은색 빛의 실들은 그의 몸 구석구석을 돌고 단전으로 돌아가 그물처럼 원영을 감쌌다. 한립은 의식을 움직이며 동시에 연신술을 운용했다.

    호방한 의식의 힘이 단전을 가득 채우고 무수하게 많은 수정실로 변해 은색 그물의 틈을 따라 원영으로 파고 들었다.

    은색 그물과 수정실들이 원영과 접촉한 순간 웅! 하고 8개의 검은 사슬들이 떠올랐다. 위기를 느낀 검은 사슬들은 극심하게 떨며 새까만 안개를 뿜어냈다.

    치지지직!

    은색 실과 수정 실이 검은 안개와 만나 서로를 제거해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색 실과 의식의 수정 실이 늘어났고 검은 안개는 차츰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수정 실과 은색 실이 안개를 뚫고 들어가 검은 사슬을 직접 공격했고, 사슬의 빛이 점점 어둑해졌다.

    ‘효과가 있어!’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렸고 의식을 거세게 움직여 수정실들을 응결해 수정칼날을 만들어 검은 사슬을 베었다.

    채채채챙!

    수정칼날도 보광을 잃어갔지만 검은 사슬의 진동이 커지고 있었다.

    파앗!

    8개의 사슬들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맞부딪쳐 검은 주술문자들을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수정칼날은 잘려나가고 은색 실들도 검은 주술문자에 뒤덮여 흩어졌다.

    어둑해졌던 검은 사슬들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갑작스런 난관에 얼굴을 굳혔던 한립이 표정을 풀었다. 검은 사슬은 언제나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그는코웃음을 치며 맹렬히 법결을 운용해 이전보다 더욱 조밀하게 은색 실들을 단전으로 불어넣어 검은 사슬을 공격했다.

    치치지지직!

    은색 실과 검은 주술문자가 충돌해 서로를 갉아먹는 사이 의식으로 형성된 수정칼날이 사슬을 베었다.

    은빛과 의식의 힘이 달려들 때마다 사슬의 검은 주술문자들은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한립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검은 주술문자가 줄고 있었지만 그의 법력도 한계가 있었다. 오장과 단전에 충분한 법력을 채워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한참 모자랐다.

    흡!

    그는 기합을 넣고 마지막 남은 법력들을 전부 끌어 모아 단전 내에서 은색 빛의 실들을 응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8개의 은색 손바닥이 얼마 남지 않은 검은 주술문자들을 격파하고 과격하게 검은 사슬들을 잡고 끌어당겼다.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원영은 극통에 시달렸다.

    한립은 이를 악물었다.

    검은 사슬로 원영이 봉인되고 줄곧 감각을 공유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연계가 된 것이다.

    연신술을 이용해 의식의 힘마저 모조리 단전으로 밀어 넣어 두 자루의 수정 도끼를 만들었다.

    몇 줄기 은색 뇌전이 그의 손끝에서 빠르게 도끼날로 몰려들었다.

    카캉! 캉!

    호된 도끼질에 팽팽하게 당겨진 검은 사슬에 균열이 생겼다. 한립이 기뻐하며 다시 도끼질을 하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웅.

    허공에 파문이 일고 검은 사슬 하나가 더 나타나 미처 한립이 막기도 전에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검은 사슬은 다른 8개의 사슬과 하나가 되어 밝은 빛을 뿜었다.

    9개의 검은 사슬들이 방출한 엄청난 양의 주술문자에 은색 빛의 손 두 개가 흩어지고 수정 도끼가 깨져버렸다.

    * * *

    그 시각, 선계 모처 사막의 대전 안.

    강시 사내가 반짝이는 검은 주술문자들로 가득 찬 새까만 보호막 안에 서있었다. 그 주변에서 사슬들이 촤르륵 움직여 바닥과 벽을 때렸다.

    강시 사내가 손을 내리며 검은 빛을 거두자 미친 듯이 날뛰던 사슬들도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제의 정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일곱째야.”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강시 사내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사합원 안의 한립은 우두커니 서서 남색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동시에 의식도 방출해 오몽도는 물론 주변 수천 리 해역을 뒤졌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조금 전 나타난 검은 사슬은 고강한 실력자가 공간을 넘어 전송시킨 것이었다. 그의 원영을 봉인해 둔 인물의 수행이 예상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섬뜩해진 한립은 서둘러 의식을 움직여 수정빛으로 원영을 겹겹이 감쌌다. 소용이 있을 진 몰라도 외부와의 연계라도 차단해야 안심이 될 듯싶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사슬을 없앨 수 있다는 희망은 찾았다.

    충분한 법력으로 끝까지 공격하면 아홉 번째 사슬이 더해졌어도 언젠가는 사슬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 *

    한 달 후, 오몽도의 정원 딸린 저택.

    밤사이 일곱 줄기의 하얀 빛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져 저택을 감쌌고, 푸른 옷을 입은 한립은 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수많은 반딧불이가 그를 감싸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은은한 별빛이 내려앉았다가 그의 피부에서 튕겨나갔다.

    저택을 감싼 것은 진한 성광지력의 파동이었지만 눈을 뜬 한립은 난색을 표했다.

    “역시 안 되는구나…….”

    한 달 동안 법력을 늘릴 방법을 연구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며칠 전에는 소북두성원공을 수련해서 오장단원공의 위력을 늘여 볼까 했는데 일곱 현규가 이미 가득 차서 더는 성광의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하늘 위의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쉰 한립의 머리에 번득 묘수가 스쳤다.

    본체에 법력을 늘릴 수 없다면 화신을 이용하면 될 일 아닌가? 한립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영이 봉인된 상황에서 화신만이 충분한 법력을 확보해 성가신 검은 사슬들을 제거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화신을 구한단 말인가?

    이전에 수련한 현모화영대법으로 목령(木靈)을 화신으로 제련한 적이 있지만 그러려면 반드시 제2원영이 필요했다.

    제련의 어려움은 둘째 치고 대량의 정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바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그가 익힌 다른 화신에 관련한 술법도 대부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한립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순간 오몽도 금지에서 보았던 조각상 머리를 떠올리고 눈을 빛냈다.

    “그렇지! 지기화신도 화신이니까…….”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섬의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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