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6화. 선기(仙器)
*
“산선(散仙)이라 해도 지선이 되기를 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잠자코 있던 마광이 한 마디 덧붙였다.
“산선은 또 무엇입니까? 선인의 일종인가요?”
“하계 수사들은 선계의 모두가 진선인 줄 알지만, 사실 진선계에서 진정으로 진선이라 불리는 자들은 법칙의 힘을 장악한 선인들입니다. 법칙의 힘을 장악하지 못한 이들을 통상적으로 산선이라 부르지요.
산선의 수는 꽤 많아서 열에 아홉은 산선이라 보시면 됩니다. 산선들은 법칙의 힘을 깨닫지 못해 오직 선령력에 의지해 수행을 쌓아야 하고 도겁의 어려움이 진선보다 훨씬 크지요.”
“산선과 진선…….”
“역선(力仙)또는 현선(玄仙)이라 불리는 수사도 산선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선도 법칙의 힘을 장악하려 들지 않고 주로 육신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니까요. 육체적 힘을 강조하는 현선은 지선보다 더욱 드물다고 들었습니다.”
“그랬군요. 의혹을 풀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잔혼밖에 남지 않았지만 선계의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기억합니다. 이후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마광은 말을 마치고 한립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한립은 가볍게 숨을 쉬고 장서각 이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기(仙器)는 천지법칙의 힘을 운용해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 만물을 없앨 수도 다시 살아나게 할 수도, 과거와 미래를…….’
경전의 글귀를 읊조린 그의 머릿속에 현천여의인과 현천참령검이 떠올랐다.
현천참령검은 혼돈만령방 3번째 줄에 이름을 올린 보물로 일계의 천지법칙을 무시하는 강대한 신통을 발휘했으니 선기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한립은 더욱 집중해서 경전을 살폈고 서책을 덮을 때쯤에는 선기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이 잡혔다.
현천의 보물처럼 계면의 힘에 감응해 탄생한 보물들은 본래 선기의 일종으로 선계에서는 선천선기(先天仙器)라 불렸다.
선천선기들은 처음 세상에 나타날 때는 종종 나무의 형태를 띠는데, 천지정화를 흡수해 천지법칙을 경시할 만한 꽃이나 과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나무들은 십만 년에서 수십만 년을 주기로 꽃이나 과실을 맺고 며칠 만에 시들어 사라진다. 경전에는 선천선기 외에 후천선기(後天仙器)라는 것도 적혀 있었다.
천지가 길러낸 것이 아닌 선인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법칙의 힘을 함유한 보물을 뜻했다.
둘 사이에는 강약의 차이는 없었고, 각각이 함유한 법칙의 힘이 얼마나 큰지, 부릴 수 있는 힘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위력이 갈렸다.
물론 선기를 사용하는 이의 실력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선천선기는 후천선기에 비해 수가 훨씬 적었고 배양을 통해 성장할 수 있어 고계 선인들이 선호했다.
당연히 선천선기와 후천선기 모두 선계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라 산선 중에서는 선기를 지닌 이가 거의 없었으며, 후천선기를 제조할 수 있는 선인은 봉황의 털과 기린의 뿔만큼 귀했다.
한립은 입술을 달싹여 소리 없이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낙풍이 장서각 이층으로 올라와 예를 취했다.
“류 선배님, 찾으셨습니까.”
“오몽도에도 선기가 남아 있나?”
“선기 같은 보물은 안타깝게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전 조신 대인께서도 선기를 구하고 싶어 하셨지만 원을 이루지 못하셨거든요. 솔직히 오몽도가 아니라 흑풍해역 전역을 뒤져도 선기를 지닌 조신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낙풍이 멋쩍게 답했다. 크게 기대는 안했지만 실망스런 답변이었다.
“고서에 조신은 신념의 힘을 축적해 법칙의 힘을 응집할 수 있다고 했네. 이전 오몽도 조신은 어떤 법칙을 손에 넣었지?”
한립의 질문에 낙풍은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낙몽 대인께서 장악하신 것은 흑풍해역에서 비교적 흔한 물의 힘이었습니다. 인근 세력이 모시는 조신들도 대부분 물의 법칙의 힘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물의 힘……. 장서각으로 오다보니 적잖은 족인들이 조신 조각상에 참배를 하더군. 그게 오몽도 조신의 지기화신(地祇化身)인가?”
“아……. 바깥의 조각상과 섬 곳곳의 조각상들은 신념의 힘을 모으기 위한 평범한 조각상들입니다. 조신 대인께 연락을 취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지기화신은 아니지요. 조신의 지기화신인 조각상은 금지구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낙풍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곳이 어디지? 안내하게.”
“낙몽 조신의 지기화신은 강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훼손되어 지금은 머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류 선배님께서 살펴보시기를 원하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크게 흥미를 보이는 한립을 보고 낙풍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 * *
오몽도 서북쪽의 험준한 해안 절벽.
촤악! 촤악!
새까맣게 튀어나온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며 하얀 물거품을 일으켰다. 절벽에 파여 있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海蝕洞屈)에는 푸른 바다 이끼와 하얀 소금의 흔적이 보였다.
이때, 절벽 위에 한립과 낙풍이 나타났다.
“류 선배님, 이곳이 낙몽 조신의 지기화신 잔해가 있는 곳입니다.”
낙풍은 해안 절벽의 커다란 해풍동굴을 가리켰다. 새까만 암벽이 파도에 침식되어 만들어진 동굴은 평범해 보였으나 의식을 방출해 살피니 특별한 면을 찾을 수 있었다.
의식이 동굴 입구에 닿자 기이한 힘이 미세하게 방향을 틀어 다른 쪽 암벽을 훑게 만들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거나 의식 방면에서 무척 민감한 그가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다.
“재미있구나!”
한립은 작게 중얼거리며 눈동자에서 남색 빛을 반짝였다. 동굴 깊은 곳에서 하얀 물안개가 유유히 소용돌이치며 미약하게 법칙의 힘을 발산하는 게 보였다.
“오몽도 조신은 만 년 전에 중상을 입고 깊은 잠에 든 후에 깨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원(水元) 봉인도 나날이 약해졌고 천 년이 지나면 더는 이곳을 숨길 수 없게 될 테지요.”
낙풍은 탄식하듯 설명하고는 동굴로 들어갔다.
두 팔을 교차한 그가 연달아 동굴 속 소용돌이를 향해 남색 법결을 날리자 소용돌이가 진동하며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원형 통로를 만들어냈다.
“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선배님.”
소용돌이 입구는 청석을 깎아 제련된 구불구불한 통로로 연결되었다. 일정 간격으로 하얀 형광석(熒光石)이 박혀 있어 앞길을 밝혀 주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물 속성 영력이 짙어졌다.
일각 정도를 걸어 들어가 지하 깊은 곳에 이르자 낙풍이 푸른 영패를 꺼내 슬쩍 문질렀다. 그러자 영패가 통로 끝의 푸른 석문으로 푸른빛을 날렸다.
쿠쿵.
석문이 서서히 열리자 네모난 석실이 드러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공적인 석실이라기보다는 굴곡이 심한 천연 종유동굴에 가까웠다.
천장에는 반투명한 남색 석순들이 잔득 매달려 있었고, 사방 벽도 비슷한 재질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 수시로 넘실거리는 해류가 보였다.
석실을 살핀 한립은 한가운데 위치한 검은 제단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복잡한 고랑이 파여져 있는 제단 위에는 낙풍의 말대로 조각상 머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한립과 조금 닮은 오몽도 조신 낙몽의 모습이었다.
이전 조각상들과 달리 특수한 수정으로 조각한 듯 조각상 머리는 남색이었고 짙은 물 속성 영기를 발산하는 하얀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걸음을 남겨두고 멈춰선 한립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눈앞의 조각상 머리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살짝 눈을 감자 그의 의식이 석실을 가득 메웠다.
‘헛!’
뒤에 서있던 낙풍은 방대한 의식의 힘에 억눌려 휘청거렸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제야 남색 머리 주변으로 미세한 역량이 모여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역량이 석실을 빼곡하게 채우고 석상 머리끝으로 모여 호흡하듯 깜빡였다.
“이게 신념의 힘이란 것인가…….”
의식을 거둔 한립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때 낙풍은 창백한 낯빛으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평범해 보이는 남색 석순으로 다가가 몇 군데를 짚자, 달칵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그 아래쪽 지면에서 작은 석함이 놓인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석함을 연 낙풍은 낡은 옥간을 들고 한립에게 다가가 바쳤다.
“류 선배님께 도움이 될지 모를 경전입니다. 받아주십시오.”
“경전이라고?”
옥간을 살핀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낙몽 조신께서 이전에 수련하던 만수선결(万水仙決)입니다. 하계에서 비승한 선인은 반드시 진선 공법을 수련해 체내의 법력을 선령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비승대를 통하지 않고 비승하셨다면 마땅한 공법이 없으실 테니 만수선결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낙풍 족장이 생각이 깊군.”
“아닙니다. 이곳은 영맥이 교차하는 곳이자 물 속성 영력이 농후해 만수선결을 익히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니, 폐관수련을 하시기에도 적합할 겁니다.”
한립의 눈길에 낙풍이 씩 웃음 지었다. 그러나 한립은 옥간을 대충 읽어 본 후에 다시 낙풍에게 넘겼다.
만수선결은 물 속성 진선 공법으로 진선경 후기까지는 수련을 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원래 수련하던 공법과 충돌하는 바가 많았다.
“어째서…….”
“만수선결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공법이나, 난 물 속성 공법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네. 흑풍해역에서 다른 진선 공법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겠나?”
“흑풍해역은 워낙 외진 곳이라 전해지는 선가 공법 자체가 얼마 없습니다. 그마저도 조신들이 손에 쥐고 공개하지 않고요. 어쨌든 자신이 익힌 공법이 다른 이에 손에 들어가면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으니까요.
인근에서 다른 선가 공법을 얻을 곳은 흑풍해역 중심의 흑풍도 뿐입니다. 그곳에서 백 년에 한번 열리는 경매회에 선가 공법이 경매품으로 나오고는 했습니다.”
“경매회까지 얼마나 남았지?”
“10년 후면 다음 경매회가 열릴 것입니다. 경매회에 나오는 물품들은 전부 무척 값이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10년이라, 알겠네. 자네가 나를 도와 해줘야 할 일이 있네.”
“무엇이든 분부를 내려 주시지요, 선배님!”
한립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낙풍이 서둘러 답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네다섯 달이 지나갔다. 그간 한정족 쪽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어 오몽도 사람들도 한시름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족장 대전 안에서 낙풍이 약간 초조한 얼굴로 배회하며 연신 입구를 살폈다.
몇 달간 한립의 요구에 따라 원영을 안정화 시키는데 연관된 비술과 공법을 모아 서너 종류의 비술을 전달했는데 한립이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다급해진 그는 족내의 합체기 장로에게 거액의 영석을 들려 흑풍해역 중심의 흑풍도로 보냈다.
흑풍해역 내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으로 다른 섬의 수사들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곳으로 향하곤 했다.
그게 오늘로 벌써 사흘째였는데 파견한 장로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팟!
그때 하늘 끝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고 둔광이 날아들었다. 낙풍은 매우 반가워하며 직접 대전 밖으로 나가 중년 사내를 맞이했다.
“한량 장로, 왔는가!”
“도중에 사소한 문제가 있어 길을 돌아오느라 늦었습니다. 주신 영석을 거의 다 쓰고서야 겨우 구한 물건들입니다.”
중년 사내는 옥간 열댓 개가 들어있는 옥함을 꺼내들었다.
“잘했네! 아주 고생했어. 어서 돌아가 휴식을 취하게.”
낙풍은 중년인의 손에서 급히 옥함을 받아 한립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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