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화. 지기화신(地祇化身)
*
반나절 후.
오몽도에서 수만 리 떨어진 쪽빛 해역 위의 하얀 섬.
면적은 오몽도와 비슷하지만 버들잎처럼 가느다란 섬에는 식물이 거의 없어 회백색 암벽이 햇빛을 반사했다.
섬 위에 동그란 하얀 건물들이 둘러싼 산은 산꼭대기 쪽으로 갈수록 건물이 적었다. 그리고 섬에서 가장 고지대이자 중심부에는 다른 건물 없이 산등성이를 따라 방원형의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광장 표면에 호선과 복잡한 문양들이 각인되어 아름답지만 난해한 진법을 이루었다.
그 진법 가운데 우뚝 솟은 장발의 회백색 조각상은 체격이 좋고 꽃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었고, 갑옷 옆으로는 길쭉한 송곳니가 뻗어 나와 있었다.
그 조각상 주변으로 한정족 족인들이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 양손을 교차해 두 어깨에 얹고 낮게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모종의 의식을 치르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백색 조각상의 얼굴 갑옷 아래에서 남색 빛 두 개가 번득이고 윙윙!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되었느냐? 왜 도합이 보이지 않는 게지?”
비대한 몸을 지닌 한정족 장로가 비통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
“조신 대인께 아룁니다. 도합 족장은…….”
한참 후에야 이야기를 마친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덧붙였다.
“그렇게 족장과 몇몇 장로들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조신 대인께서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낙몽이 진신강림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만 년 전의 중상을 벌써 회복했다면, 그 성격에 너희를 살려 보냈을까? 게다가 너희가 본대로라면 수호의 힘도 방출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냐.”
“그럼 다시 전력을 정비해 오몽도를 쳐야 하겠습니까?”
한정족 장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다. 낙몽이 아니라도 도합과 다른 장로들을 그리 쉽게 죽였다면 보통 놈은 아닐 터. 너희가 다시 쳐들어가 봐야 자살하는 꼴 밖에 되지 않겠지. 일단 잠자코 기다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존명!”
한정족 장로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다른 족인들과 함께 물러났다.
그들이 멀어지고, 조각상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곡골, 호돌, 육곤노조 당신들도 오몽도를 노린다면 숟가락은 얹게 해줄 수 있지만 그 물건은 내 것입니다. 내가 다음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그것에 달렸…….”
드문드문 들리던 목소리가 조각상의 남색 불빛 두 개가 꺼지며 사라졌다.
* * *
사합원 안.
웅!
한립이 두 손을 연달아 튕겨 푸른 깃발들을 날리자 푸른빛의 장막이 펼쳐져 사합원을 가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하늘은 어두워지고 밤하늘에는 별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운기 조식을 하고 있던 한립은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을 보고는 단약을 꺼내 삼키고 소북두성원공을 운용했다.
그의 가슴과 배에 남색 빛 7개가 어린 후, 밤하늘의 별빛들이 모여 일곱 줄기의 별빛 기둥을 이루고 그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창백했던 한립의 안색이 점차 밝아졌다.
해가 뜰 무렵, 눈을 뜬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육신의 피로는 물론 계면의 틈새를 통과하며 얻은 손상도 회복되었다.
그는 기지개를 펴고 정원 옆에 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청죽으로 짠 장롱, 단향목 탁자와 의자를 제외하고는 방석 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고 먼지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방석에 앉아 옥함을 불러내 안에 들어 있는 노란 호두를 꺼내 보았다.
주글주글한 문양이 사람 얼굴을 닮은 흙 속성 파동의 호두는 기폭공간에서 얻은 과실이었다.
이제껏 찬찬히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가 여유가 생겨 바로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의식을 호두알 속에 불어넣은 그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흙 속성 영기가 압축되어 있었다.
장천병 덕에 한립은 각종 영초와 재료들을 감별하는데 능통했고, 특히 몇 년 된 영약인지 금방 알아맞힐 수 있었다.
호두의 정체는 모르지만 이 정도 천지원기를 품으려면 십만 년 이상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겨우 그것만으로 진선급 요수 두 마리가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흠?”
조금 더 세밀하게 호두 속을 살피던 한립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흙 속성 영기가 무질서하게 압축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구불구불하게 휘어 있는 모양을 보니 무언가 규칙이 있었다.
“설마 이건…….”
한립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굴곡이 지닌 특수한 기운은 법칙의 힘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침음하던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목갑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여러 부적이 붙은 노란 소인이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기포공간의 주인인 외눈박이 거인의 원영이었다.
한립은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원영을 잡아 손끝에서 검은 빛을 뿜었다. 인면(人面) 호두 비밀을 알아내는데 추혼술보다 빠른 길은 없었다.
거인 원영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노란빛이 반짝거렸다.
괴이한 힘이 원영의 혼백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의 의식의 힘이 진입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파앗!
코웃음을 친 한립은 검은 빛을 더욱 강하게 일으켰다. 이에 원영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부적에 제압당해 아무소리도 내지 못했다.
의식의 힘이 강제로 원영의 괴이한 힘을 뚫고 혼백 내부에 접촉하려는데 눈부신 노란빛을 뿜어낸 원영이 터져 노란 태양빛으로 한립을 덮쳤다. 그와 동시에 한립은 반투명한 막으로 전신을 감쌌다.
한립은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원영의 괴이한 힘이 이렇게 패도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알아낸 것은 거인이 만년에 한 번씩 인면 호두 한 알씩을 복용해 수행이 빨리 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한립은 작게 탄식하며 인면 호두를 거두었다. 어차피 정체를 알아낼 수 없다면 더 중요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그는 표정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합원을 나섰다.
“류 선배님을 뵙습니다.”
사합원 밖에는 유생 복장을 한 낙풍이 그를 기다리다 인사를 했다.
“낙 장로가 이곳까진 무슨 일인가?”
“거처가 머물기 편하신지 확인도 할 겸 찾아뵈었습니다. 아, 저번에 구하라고 시키신 물건들은 시간이 촉박해 일단 일부만 모아왔습니다. 나머지 물건들도 최선을 다해 구해올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낙풍은 상대가 자신이 건네는 검은 팔찌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마침 잘 와주었군. 이곳에도 장서각은 있겠지? 조사해 볼 것이 있네.”
“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낙풍은 서둘러 답하고 허공으로 떠올랐고 한립도 곧장 날아올랐다.
날아가면서 섬을 내려다보니 수많은 범인들과 수사들이 모여 전쟁으로 무너진 건물들을 보수하거나, 오몽도 조신 조각상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었다.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것치고 범인들은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저희 섬 말고 다른 흑풍해역의 섬들도 수많은 범인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통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피해를 줄이고 있지요. 각 섬들끼리 분쟁이 빈번하지만 범인들을 노리고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낙풍은 한립의 시선이 범인들에 머무는 것을 보고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문득 난성해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꽤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2층 건물 앞에 내려섰다.
“조신 대인!”
“족장님!”
누각을 지키던 연허기 수사들이 낙풍과 한립을 보고 화들짝 놀라 예를 올렸다.
낙풍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바로 한립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책장들에는 각종 서책과 두루마리 그리고 옥간 등이 놓여 있었다.
냉염종 장서각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보유한 서적들이 많았다.
“본족의 세력이 약해 소장한 서적의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1층에는 주로 공법과 야사(野史)에 관한 서적들이, 2층에는 보물과 단약 등에 대한 경전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낙풍은 겸손하게 말했다.
“알겠네. 혼자 돌아봐도 되니 자네는 돌아가 일을 보게.”
“예.”
한립의 말에 낙풍이 몸을 돌려 누각을 나섰다.
번득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려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누각 옆에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립은 책장의 책들을 훑어보았다. 강대한 의식의 힘으로 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서책들을 살필 수 있었다.
낙풍의 말대로 1층의 서책들은 흑풍해역에 대한 이야기와 대승기 이하의 수사들이 수련할만한 공법들이 주를 이루었다.
지선의 자료를 보고 싶었는데 선인에 대한 자료 자체가 드물었다.
그러나 헛걸음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1층을 거의 다 살폈을 무렵 지선에 관한 소개가 되어 있는 낡은 옥간 몇 개를 찾을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마지막 옥간까지 내용을 확인한 한립은 눈을 떴다.
그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대충 조신과 지선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소위 지선은 선계의 잡다한 선인들 중 하나로 수련 방식이 비교적 특수했다.
옥간에는 신념의 힘이라 불리는 대중의 신앙의 힘을 이용해 법칙의 힘을 응집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다만 이렇게 응집한 법칙의 힘을 사용하려면 제약이 많았다. 지선은 오직 신념의 힘이 속한 지역에서만 법칙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신념의 힘을 모으기 위해 지선들은 특수한 재료로 조각상을 제작했다.
축적한 신념의 힘을 법칙의 힘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또 지선 특유의 지기화신을 제련해야 했는데, 이런 화신이 발휘하는 법칙의 힘은 본체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보통 지선 본체 대신 지기화신들이 바깥을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했고, 화신이 망가지면 본체도 중상을 입어 법칙의 힘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지선 그리고 신념의 힘이라!”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지선이 되면 신념의 힘이라는 특수한 경로를 통해 법칙의 힘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정보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계에 있을 때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법칙의 힘, 특히 현천참령검이 함유한 천지법칙의 힘은 일반적인 공법과 비술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그 대신 법칙의 힘은 관련 보물을 지니고 있더라도 깨닫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만일 지선이 되어 수행을 쌓을 수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 오몽도 조신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를 대신해 이곳 지선이 되면 뒤탈도 없을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파동이 일고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곳은? 한 수사, 다시 진선계로 돌아온 것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아주 외진 곳으로 비승하였는지 천지원기가 희박합니다.”
마광은 담담히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북한선역 극히 외진 곳에 위치한 흑풍해역입니다.”
“흑풍해역……. 들어본 적은 있는데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외진 곳이면 한동안은 신분이 노출될 걱정이 없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군요.”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습니다.”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외진 지역이라 이곳에 남기로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를 소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선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지선이요? 신념의 힘으로 법칙의 힘을 응집하는 선인들로, 선계에서도 드문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어째서 물어보십니까?”
눈빛이 달라진 마광이 반문했다.
“드물다고요? 무슨 약점이라도 있는 것이군요.”
“신념의 힘을 모으는 것으로 법칙을 응집해내기는 하지만 한계는 명확합니다. 소속된 지역을 떠날 수 없는 것을 물론이고 체내에 불순한 신념의 힘을 응결하는 탓에 법력이 동급 선인에 비해 훨씬 정순하지 않지요. 게다가 신념의 힘을 응집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워낙 오래 걸려서 다른 선인들보다 수행 속도가 느립니다.”
“그렇게 제약이 많았군요…….”
흑풍해역에는 지선이 꽤 있었다. 이곳의 특수한 지리적 특성 탓일 것이다. 경전을 통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흑풍해역은 거대한 낙백흑풍(落魄黑風) 때문에 바깥과 차단되어 외부 선인이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흑풍해역 중심에 위치한 전송진을 통해서만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수사에 딸린 족인들과 범인들만 바글바글하다보니 조신을 자처하는 지선들이 널렸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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