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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93화 (1,250/2,000)

1493화. 조신(祖神)

*

또 다른 곳에서는 땅딸막한 노인이 무너진 담 뒤쪽에서 번득 나타나 다른 인족 수사를 뒤쫓는 이종족 수사를 향해 핏빛 옥병의 입구를 기울이고 있었다.

핏빛을 발한 옥병 입구에서 선홍색 실들이 튀어나가 빛기둥으로 뭉치더니 이종족 수사의 등으로 날아갔다.

이상하게도 선홍색 빛기둥은 이종족 수사가 두른 하얀 빛에 이르러서는 속도가 줄고 위력도 3할이나 약해졌다.

펑!

한방을 맞고 비틀거린 이종족 수사는 피를 퉷 뱉어내고 노기 어린 얼굴로 노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촌락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누런 밀랍 전사나 혈갑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으로 열심히 싸웠지만 쌍방의 실력과 수가 비슷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종족 수사들은 괴이한 하얀 빛의 비호를 받아 법보나 술법 공격을 약화시켰기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인족 수사들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하며 촌락 가운데로 몰렸다.

그 시각, 촌락 안 백석 광장에서는 검은 장포를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조각상을 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묵묵히 난해한 주술을 읊고 있었다.

흑포 수사들 중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있었는데 다들 창백한 얼굴로 한 손을 앞으로 뻗은 채 팔목에 그은 가느다란 상처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지면으로 스며들었다.

바닥에 고인 핏물들은 복잡한 진법 도안을 따라 스산하게 조각상으로 흘러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보다 열 배는 큰 청년 유생 조각상의 머리에는 푸른 비단 두건을 두르고 손에는 서책을 든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청년 유생 조각상의 모습이 그와 살짝 닮은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백발노인은 조각상 앞에 서서 두 팔을 자신의 어깨 앞에서 교차하고 절실하게 기원했다.

“위대한 조신이시여! 제발 혈맥의 간절한 소환해 응해 강림해 주소서!”

수십 명이 흘린 피가 실개천을 이루어 졸졸 조각상 밑으로 스며들었다.

우웅! 웅! 우웅! 웅!

백발노인의 떨리는 음성과 함께 조각상이 박동을 하듯 길고 짧게 핏빛 기운을 내뿜었다.

휘웅!

핏빛 소용돌이가 일고 그 안에서 혈갑 병사가 나타나 멍하니 광장 밖을 바라보다가 날아올랐다.

잠시 후, 핏빛 소용돌이 속에서 또 다른 혈갑 병사가 나와 또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이때, 조각상 주위에 둘러앉은 이들 중 여자아이 하나가 쓰러졌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었고 갈라진 손목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백발노인은 참담한 얼굴을 하면서도 뒤쪽으로 손짓을 했다.

대기 중이던 십여 명의 사람들 중 베옷을 입은 거한이 걸어 나와 아이를 안아 옮기고는 붉은 단약을 먹여주었고, 그 자리는 다시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로 채워졌다.

겁이 많게 생긴 아이는 앉자마자 주저 없이 오른팔 소매를 걷고 단도를 꺼내 들었다.

아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분명 겁을 먹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단도로 손목을 그었다.

상처를 따라 붉은 피가 진주 구슬처럼 똑똑 떨어져 내렸다.

* * *

제단 쪽에서 일정 시각마다 새로운 혈갑 병사를 불러내 전장으로 보냈으나 인족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전의 소리는 가까워졌고, 광장 안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광장에 설치된 청년 유생 조각상과 그 둘레의 제단 진법은 인족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일족의 근간이었다.

이종족 공격에 이곳이 함락되어 조신(祖神) 조각상이 파괴되면 멸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많은 인족 수사들이 이종족에게 몰려 광장 주변으로 모여들어 둥그렇게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전투에 대비했다.

고공에서도 굉음이 끊이지 않고 십여 개의 빛줄기가 격렬하게 맞붙고 있었다. 그중 여섯 명은 푸른 피부 이종족으로 호전적인 눈빛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득였다.

이종족 수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색 장포 사내는 안 그래도 체구가 다른 동족보다 더 커서 허공에 작은 철탑이 서있는 듯했다.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주색 도포의 사내는 대승기 수사였고, 그 뒤쪽의 다섯 명은 합체 중후기에 이른 수사들이었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하얀 빛은 다른 이종족 수사들보다 훨씬 불투명했다.

그 반대편에 선 인족 수사 다섯은 푸른 장삼을 걸친 토실한 유생 사내가 합체 후기인 것을 제외하면 다들 합체 초기 수사라 밀리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인족의 멸족 위기에서 유생 사내는 꾹 참아내며 수시로 광장의 조각상을 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곧 최악의 상황이 곧 벌어졌다.

하얀 빛이 아무 징조도 없이 유생 사내와 다른 인족 수사들 앞에 나타나 폭발했고, 무수히 많은 광선이 쇄도했다.

콰콰콰쾅!

강대한 기파가 폭발의 중심에서부터 퍼져나가 돌풍을 만들어냈다. 흐릿한 신영들이 하얀 빛 속에서 빠른 속도로 광장에 쿵! 하고 떨어져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재빠르게 구덩이 속에서 솟구친 인족 병사들은 옷이 다 찢어지고 체내의 기운도 혼란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 금박을 입힌 듯 누렇게 뜬 유생 사내도 핏빛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가 나선 덕에 인족에서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그가 적잖은 대가를 치른 듯했다.

“족장님……!”

주위 인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생 사내는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는 손을 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종족 수사들이 바로 쫓아오지 않자 그는 바로 조각상 아래 백발노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조신께서 답이 없으십니다.”

노인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신 대인! 정녕 우리를 버리시는 것입니까!”

유생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사이, 자색 장포의 이종족 사내가 동족 장로들을 이끌고 광장 상공으로 내려와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낙풍, 아직도 너희 조신에게 애걸하며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냐?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 한정족(寒晶族) 조신께 빌어보지 그러느냐?”

“거만 떨지 말거라, 도합! 너희 조신은 애초에 우리 오몽도 조신의 손에 패하지 않았더냐!”

“흐흐, 그 옛날 일을 꺼내서 뭘 하려고? 원래가 이기면 왕이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다. 우리 조신께서는 아직도 한정족을 비호해 주시지만 너희는 어떠냐? 만 년 전에 중상을 입고 깊은 잠에 빠졌다고 알려진 후에 깨어난 적이 있던가? 아마 진작 죽었는데 너희가 모르고 있는 것일 테지!”

자색 장포의 이종족, 도합은 자신의 몸을 둘러싼 하얀 빛을 가리키며 유생 사내를 조롱했다. 낙풍은 울컥해 반박하려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거의 만 년 간 그들의 조신은 줄곧 잠에 빠져 있었고, 최근 천년 동안은 족인의 부름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력한 이종족의 침입에 족인들의 정혈을 모아 조신을 소환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신이 남겨둔 조각상으로 조위(祖衛)들을 소환하기는 했지만 물 한 잔으로 큰불을 끌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겨우 혈갑 도병들을 불러내 토혼족(吐渾族)을 막을 생각이라면, 헛꿈꾸지 말고 투항 하거라!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너희 전종족을 도륙하겠다!”

도합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주위의 한정족 병사들이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하자,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게 버티던 오몽도 병사들의 전선을 뚫고 한정족 병사들 몇몇이 광장으로 침입했다.

‘이제,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낙풍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음에는 절망감이 차올랐다.

웅!

그 순간, 어디선가 낮은 진동소리가 들리고 푸른 조각상이 흔들렸다. 조각상이 요란하게 검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건……. 조, 조신께서 강림하신다!”

제단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백발노인이 먼저 이상을 감지하고 기쁨에 차 외쳤다.

우와아아아!

오몽도 병사들은 깜짝 놀랐지만 곧 희색에 가득 차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다.

틈이 생겨 붕괴되기 직전이던 전선이 복구되고, 인족 병사들은 적의 공격에 더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었다.

반대로 신이 나서 진공을 하던 한정족 병사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말 상대편 조신이 강림하면 그들의 대승기 족장이 나서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불가능해!”

한정족 족장인 도합은 조각상을 내려다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가면 갈수록 밝은 빛을 발산하던 조각상이 콰릉, 터져나가며 새까만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콰르릉 콰쾅!

소용돌이 속에서 허공을 찢고 검은 뇌전이 튀어나와 우렁찬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쾌청하던 하늘에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고 먹구름이 몰려들어 주변 백리의 천지영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천기현상에 교전 중이던 쌍방의 병사들이 안색이 달라져 분분히 공격을 멈추었다.

소용돌이 속의 검은 뇌전은 빠르게 증가했고 한곳으로 뭉쳐져 검은 뇌전 구슬을 이루었다.

콰치치칙!

뇌전 구슬이 비틀리며 길쭉하게 늘어나 칠흑 같은 공간균열을 만들어냈다.

슁!

흐릿한 인영이 그 안에서 튀어나와 비틀거리다 허공에서 중심을 잡았는데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였다.

그가 나타나고 공간균열은 순식간에 닫혀 소실되었고, 검은 소용돌이가 줄어듦에 따라 밀려든 천지영기도 안정을 되찾고 먹구름도 걷혀갔다.

푸른 장포 사내는 힘들어 보였지만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뭐야?’

그는 몸을 가누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고 새까맣게 몰려든 인파에 미간을 좁혔다.

사내는 바로 갖은 방법을 쓰다 겨우 계면 틈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한립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광경이 이해가 갈 리 없었다.

“조신 대인! 드디어 와주셨군요!”

재빨리 푸른 장포 사내를 살핀 족장 낙풍의 눈가에 의문이 스쳤지만, 겉으로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넙죽 엎드렸다.

“조신, 조신 대인!”

오몽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족장의 행동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얼른 뒤로 물러나 한립에게 절을 올렸다. 나이가 비교적 많은 족인들이나 원로들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다들 뭐하는 게냐! 어서 조신 대인께 예를 올리지 않고!”

“예, 예! 조신 대인을 뵙습니다!”

낙풍이 눈을 부라리며 원로들을 질책했고, 연배가 있는 이들도 화들짝 놀라 한립을 향해 절을 했다.

‘조신?’

무표정하게 허공에 뜬 한립은 내심 움찔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어찌된 일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유생이 이끄는 인족들은 자색 장포 거한이 이끄는 이종족의 침공을 받아 패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어렵사리 선계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대편에 대승기 수사외에 고계수사들이 많았다면 즉시 이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머지않은 허공에서 도합이 불쑥 등장한 한립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몽도 인족들을 죄다 잡아 죽이기 직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족장님, 어찌해야 할까요? 족인들을 물리고…….”

팔(八)자 수염을 지닌 합체기 거한이 도합에게 다가와 전음으로 물었다.

“어렵사리 빌어먹을 인족들을 궁지로 몰았는데 그냥 돌아가자고? 우린 끝까지 싸울 것이다!”

도합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하지만 저 자가 정말 오몽도 조신이라면 우리 힘으로는…….”

“나타난 방식도 이상했고 저렇게 어려 보이는데 오몽도 조신이 맞겠느냐? 게다가 부상을 입었는지 기운이 약해진 상대를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가 협공해 저놈만 죽이면 오몽도는 완전히 끝이다!”

도합은 서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대답을 마치고 몸을 날렸다. 팔자수염 거한과 다른 합체기 이종족들은 도합의 뒤를 따라 한립을 포위했다.

뒷짐을 쥐고 그런 도합을 쳐다보는 한립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이에 광장 주변을 둘러싼 한정족 병사들은 폭발적으로 함성을 내지르며 거센 공격을 재개했다.

한립의 등장으로 사기가 오른 오몽도 쪽도 지지 않고 그들과 맞섰다.

주변 상황을 보며 낙풍이 한립을 향해 무슨 말을 하려는데 도합이 먼저 움직였다.

남색 광채를 터트린 도합의 등 뒤로 언덕만한 남색 구렁이 머리 허상이 나타난 것이다.

머리에 커다란 굽은 뿔이 자라난 구렁이 괴수의 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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