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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92화 (1,249/2,000)

1492화. 급박

*

“깨져라.”

금털 거원이 입에서 푸른 안개를 뿜어 어두운 남색 빛구슬 속으로 흡수시켰다.

웽!

주술문자를 머금은 빛구슬이 쾌속으로 회전하며 짙은 남색 빛을 사방팔방으로 분출해 거대 그물을 만들었다.

명청령안과 파멸법목을 합친 신통을 펼치자 체내의 법력이 순식간에 고갈되는 게 느껴졌다.

짙은 남색그물은 무언가에 닿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거원은 금빛 그림자로 변해 푸른 풍룡을 제치고 힘껏 뛰어올랐다.

이에 풍룡은 노호(怒號)를 터트리며 거원을 따라잡으려 했지만 거원은 거대한 그물이 펼쳐진 곳에서 멈춰 금빛 손바닥을 펼쳤다.

쿵!

격렬한 파동이 일고 대량의 검은 주술문자가 흩어진 자리에, 반인반마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당황한 괴수가 뭔가 대응하려는데 금빛 털이 북슬북슬한 손바닥이 떨어져 내렸다.

“흥!”

기이하게 동작이 느려진 반인반마가 급히 두 팔을 교차해 머리를 보호하려는데 냉랭한 거원의 코웃음 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괴수는 머리에 송곳이 박힌 듯 참혹한 비명을 질렀고 그 순간, 금색 거대 손이 머리를 가격했다.

퍼억!

마지막 남은 머리가 힘없이 터져나가자 반인반마의 거대한 몸뚱이가 추락하며 거원을 바짝 쫓던 풍룡도 애달픈 비명을 남기고 허물어졌다.

파앗.

반인반마 시체에서 푸른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흠?”

한립이 변한 거원이 눈을 빛냈다.

푸른 돌풍에 휩싸인 초소형 반인반마는 온전했고, 혼백 따위가 아니라 수사의 원영처럼 실체화되어 있었다.

중간머리는 검은 빛을 반짝여 잔영만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이에 거원은 낮게 기합을 넣으며 즉시 미간에 파멸법목을 드러내 가느다란 검은 실을 날렸다.

펑!

백여 장 밖에서 강제로 튕겨 나온 초소형 반인반마의 세 얼굴이 겁에 질려 있었다.

촤르륵.

별안간 은빛 불 사슬이 떠올라 교차하며 거대한 불 그물을 만들었다. 이에 초소형 반인반마의 왼쪽 머리가 푸른 돌풍을 일으켜 바람기둥으로 그물의 접근을 막았으나, 거원이 공간을 뛰어넘어 굵은 팔을 휘둘렀다.

쿵!

엄청난 괴력에 푸른 바람기둥이 뚫리고 초소형 반인반마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파삭 으깨졌다.

핏물을 뒤집어쓴 금털 거원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외눈박이 거인을 덮쳤다.

심장에 반인반마 괴수가 응결한 뇌전 창이 관통했는데도 엄청난 생명력으로 아직 살아 있었다.

거인의 상처는 노란 수정 알갱이로 막혀 있었지만 기운이 아주 허약했고 움직임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금털거원이 달려드는 것을 발견한 거인은 헐레벌떡 노란 수정 알갱이로 배를 만들어 자신을 이동시키고, 이마의 눈에서는 하얀빛을 방출했다.

쉭!

하얀 광선이 금털거원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한립은 이 공격의 정체를 몰랐지만 반인반마 괴수가 당했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광선을 피했다.

이에 외눈박이 거인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고 하얀 광선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방향을 틀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그 빠른 속도에 피하려 해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급박한 순간, 한립은 기지를 발휘해 목에 걸린 장천병을 던졌다. 놀랍게도 하얀 광선은 장천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병을 회수하고 외눈박이 거인이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거인은 놀라서 하나뿐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노란 배의 속도를 높였다.

도중에 금털 거원으로 다시 변신한 한립이 입을 벌렸다.

크아아앙!

경천동지할 포효소리가 터져 나왔고, 하얀 음파가 공간을 왜곡하며 날아갔다. 거리가 멀어 거인의 몸에는 부상을 입힐 수는 없었지만, 그가 타고 있는 모래 배는 산산조각이 났다.

외눈박이 거인의 방대한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고 그때 아래쪽에서 금빛이 번득이고 금털 거원이 팔을 휘둘러 거인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거인의 머리가 터지며 붉은 피와 하얀 뇌수가 흘러나왔다.

팟.

그때 거인의 원영인 노란빛이 거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노란빛은 나타나자마자 은색 불 그물에 둘러싸였다.

수많은 은색 주술문자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외눈박이 거인의 원영은 허공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한립이 반인반마를 교훈 삼아 미리 정염불새를 불러내 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쿵!

바닥에 떨어진 거인의 시체는 문양이 빛을 잃고 암석화되어 노란 모래 알갱이로 돌아갔다. 잿빛의 눈알만이 덩그러니 남아 땅위를 굴러다녔다.

머지않은 곳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한 한립이 내려섰다. 녹색 병을 든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원래도 기상천외한 일들을 해내는 병이었지만 오늘과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선계에 와서 변화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외눈박이 거인이 방출한 하얀 빛에 무슨 비밀이?

한참 고민하던 그는 손짓을 해 잿빛 눈알을 불러왔다. 언뜻 보면 평범한 구슬로 보였으나 법칙의 힘을 담은 광선을 분출했으니 특별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한립은 충동적으로 눈알을 장천병에 부딪쳐 보았다.

탱!

맑은 충돌음이 들렸지만 눈알과 병 모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한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소 짓고는 장천병을 목에 걸고 눈알은 청록색 옥함에 담아 넣어 두었다.

이제 은색 화염에 봉인된 거인 원영만 처리하면 되었다. 대승기를 월등히 넘어서고 진선과도 비교되는 괴수 원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은 딱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선계에서도 진귀한 보물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원영에 부적을 겹겹이 붙이고 목함에 잘 담아두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반인반마의 시체는 늘 그러하듯 저물탁에 넣어두었다. 정리를 마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찰과상밖에 입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위험 속에서 격하게 움직였더니 피곤했던 것이다. 그는 살짝 눈을 감고 의식을 퍼트려 난장판이 된 섬을 꼼꼼히 살피고는 눈썹을 씰룩이고 울창한 숲으로 날아갔다.

* * *

푸른 고목들이 울창하게 자라난 밀림 속.

한립은 자신의 눈을 믿기 어려웠다. 눈 닿는 곳마다 영계에서는 백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극상품의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가득했고, 대부분 천년 이상 된 화초에다 수만 년 이상 된 것도 수두룩했다.

알아볼 수 없는 식물들도 많았지만 그것들이 함유한 놀라운 영력과 진한 향기에 죄다 챙겨두었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대충 의식으로 훑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괴수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그냥 떠나지 않은 게 행운이었다.

반 시진 후, 한립은 밀림 속에서 비교적 탁 트인 곳에 멈추었다.

“여긴…….”

그곳엔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고 이렇다 할 영약은 없었지만 대신 커다란 동굴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립은 주변을 살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아래쪽으로 통해있었고 지하 깊은 곳에서 휘휘!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어두운 동굴 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바닥 역시 축축했고, 일각 정도 더 내려가자 주변 벽에 서늘한 빛을 내는 하얀 수정돌이 드문드문 보였다.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던 수정돌이 내려갈수록 더욱 많아져 통로 전체가 그 빛으로 밝아질 정도였다.

다시 일각을 더 이동하여 겨우 동굴의 끝에 이를 수 있었다.

거대한 천장에 빼곡하게 하얀 수정돌이 박혀 동굴은 대낮처럼 밝았고, 그 아래로 맑은 지하수가 흘러 작은 호수로 흘러들었다.

호수 주변에는 노란 수정 모래 알갱이들이 쌓여 있었다.

하얀 수정돌과 맑은 호수 그리고 노란 수정 알갱이들이 어우러져 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한립은 그런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호수 중앙에 불쑥 솟아 있는 암초만을 바라보았다. 꽤 커다란 암초 위 토양에 기이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속세에서 보았던 호두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에는 이파리가 없었지만 가지마다 호두 같은 과실이 맺혀 있었다.

펄쩍 뛰어오른 한립은 암초 위에 올라가 자세히 나무를 관찰했다.

굵직한 나무줄기에는 생전 처음 보는 현묘한 문양이 있었는데 누군가 인위적으로 새겨 넣은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같았다.

나무 열매는 더욱 특이해서 이런 문양들이 오밀조밀 모여 각각 기괴한 얼굴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파파노인이었고, 갓난아이, 중년 부인 등의 얼굴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문양과 상관없이 과실들은 강렬한 흙 속성 원기를 발산했다. 그가 이곳에 내려온 것도 바로 이 흙 속성 원기를 감지해서였다.

턱을 쓸어내리며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이 공간은 원래 외눈박이 거인의 것일 테고, 반인반마 괴수는 이 나무를 노리고 거인과 생사를 건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나무와 나무열매의 정체는 몰라도 진선급 괴수들을 다투게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천지영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의 모든 것이 이제 그의 차지라는 사실이었다.

“하하!”

* * *

선계.

구불구불 이어진 산맥 위로 구름이 가득하고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산맥을 이룬 수십 개의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가득 쌓여 가지가 휠대로 휜 나무들이 하얗게 박제처럼 되어있었다.

천지간에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산맥의 가장 높은 빙산 속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감히 내 영총을 죽였단 말인가! 누구든지 내 손에 잡히면 천참만륙을 낸 다음 혼백을 중음봉(重陰峰) 아래 봉인해 다시는 윤회에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야!”

분노한 여인의 목소리가 폭설을 뚫고 메아리쳤다.

쿠르르르.

얼마나 오랫동안 쌓여 있었는지 모를 눈들이 그 충격으로 갈라져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고 눈덩이가 크게 불어나 산사태를 일으켰다.

* * *

북한선역, 쪽빛 해양 위.

태양과 옅은 구름이 떠있는 하늘 아래 솔솔 부는 바닷바람에 파도가 찰랑였다.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 위에는 수천 리에 달하는 검은 섬이 존재했는데, 기이한 형태의 검은 암초들이 섬을 둘러싸 고공에서 굽어보면 검은 이파리를 지닌 울창한 나무처럼 보였다.

섬 북쪽의 항구에 정박 중인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고, 항구를 따라 섬 내부로 향하는 청석 도로는 곧게 뻗어 울창한 숲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도로의 끝에는 고풍스런 건물들의 촌락이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 위치에 있었다. 불길과 연기가 가득한 촌락 안에서는 함성과 싸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법보가 빛을 내뿜을 때마다 자욱한 연기 속에 피비린내가 퍼졌고, 엉망진창으로 허물어진 담 위에 거의 천 명의 수사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체구가 크고 푸른 피부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녔고, 대부분이 손에 망치나 몽둥이 형태의 병장기를 들고 옅은 하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병사들 중에는 노란 갑옷을 입고 못이 박힌 낭아봉을 든 커다란 이종족 전사들이 있었는데 전신이 노르스름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밀랍 인형처럼 보였다.

그들과 싸우는 쪽은 대다수가 인족과 핏빛 갑옷을 입은 괴상한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혈갑 병사들의 피부는 갑옷과 같은 색깔이었고, 치열한 교전 중임에도 표정이 없어 마치 괴뢰들 같았다.

고지대 중 한 곳에서 혈갑 병사가 풀쩍 뛰어올라 전방의 누런 전사를 장창으로 찌르려 했다. 창끝에서 핏빛 소용돌이와 핏빛 섬광이 일었다.

쾅!

누런 전사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끈끈한 밀랍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물러서던 누런 전사는 두 다리를 굽혔다 빠르게 펴며 낭아봉을 휘둘러 노란 돌풍을 일으켰다.

퍽! 콱!

혈갑 병사는 불시의 공격에 머리가 터졌지만 죽기 직전 장창을 투척해 누런 전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혈갑 병사와 누런 전사가 각각 핏물과 누런 밀랍을 뿜으며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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