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9화. 공간 파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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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경원관 구궁봉 위.
취성대에 서서 북두칠성의 이변을 바라보고 있는 합산도인의 눈빛은 몹시 복잡했다.
예전에 그는 한립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계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진법을 파괴했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정명노조를 배신한 일이었으므로,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한립마저 떠나가고 나면 언젠가 정명노조가 자신을 응징하려 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게다가 요즘엔 냉염종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지금은 경원관과 비슷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한립이 떠난 후엔 이 영환계에 또다시 풍파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자니 합산도인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안 좋은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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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냉염종 성화봉 정상의 광장 위.
사마경명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떠나시려는가…….”
요즘 냉염종은 천귀종을 흡수한 덕에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었지만 한립의 존재는 늘 보이지 않는 산처럼 사마경명의 마음을 짓눌렀었다.
비록 냉염종과 한립이 서로 척을 진 사이는 아니었지만, 하룻밤 새 한 종문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인물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건 곁에 언제 폭발할지 모를 부적을 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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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염종 출운봉의 어느 외진 동부 안.
정원의 석탁 앞에서 여몽한과 마주 앉아 있던 고운월은 고리 모양을 하고 있는 북두칠성을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제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한 장로께서 널 정말 많이 아끼셨던 모양이다. 이 동부는 물론이고 그 많은 법보와 단약까지 네게 남겨 주셨으니……. 다 합쳐 보면 웬만한 소규모 종문 하나가 보유하고 있는 양에 맞먹을 정도 아니냐. 아마 네가 화신기에 다다를 때까지 넉넉히 쓰고도 남을 게다.”
북두칠성에 넋을 뺏겼던 여몽한은 고운월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마 예전에 낙아 동생과 함께 저희 집으로 모셨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나 봐요. 사실 제가 드린 알량한 도움에 대한 대가야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받은 거였는데……. 이젠 제가 한 오라버니께 큰 빚을 진 셈이네요.”
고운월은 그저 미소 띤 얼굴로 여몽한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먼 하늘을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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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운봉 중턱에 있는 동부 안.
동부의 밀실에는 머리에 연화관을 쓴 회백색 도포 차림 노인이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정체는 바로 예전에 여몽한의 집에 머물렀던 백석진인이었다.
백석진인 앞에는 오래되어 종이가 누렇게 뜬 고서가 놓여 있었고, 고서 표지에는 ‘현수연유록(玄水煉幽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고서는 사실 상승 귀도공법이 실린 천귀종의 비급으로, 지금껏 종문 밖으로 전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한립이 갑자기 나타나서 백석진인에게 선물했을 때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었다.
그날부터 바로 백석진인은 이 공법을 익히는 데 전념하기 시작해 지금은 제법 성취를 이뤄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결단 초기에서 드디어 다음 단계로 올라갈 희망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공법을 통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본 백석진인은 잠깐이라도 한립의 곁에 머물 수 있었던 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문득문득 감격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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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새카만 밤하늘의 뭇별들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고리 모양의 북두칠성만이 은자색 태양처럼 빛나며 기이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북두칠성에서부터 설산 위로 뻗어 있던 굵은 빛의 기둥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퍼어어어엉!
설산 일대를 덮었던 빛의 장막도 돌연 터져 나가면서 은색 빛점들이 마치 무수한 반딧불이가 온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처럼 사방에서 아른거렸다.
멀리서 봤을 땐 꼭 은하가 지상으로 내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장관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 은색 빛점들은 누군가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설산 정상을 향해 빠르게 모여들어, 이내 어느 청년의 몸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이 청년은 물론 한립이었다.
빛점들이 거친 파도처럼 계속 밀려들었지만 한립은 시종일관 두 눈을 꼭 감고 앉아 그 빛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한립이 문득 눈을 뜨자 푸른빛 사이로 수많은 별들이 비춰져 있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한립은 참았던 숨을 내쉬듯 은색 빛을 뿜었다. 빛은 반짝거리면서 점차 공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순간, 한립의 흉복부에서는 푸른빛 7개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7번째 현규까지 완성된 것이다!
한립의 몸을 휘감고 있던 찬연한 빛이 점점 가라앉자 피부 바깥에 반투명한 얇은 막이 생성돼 있는 게 보였다. 막 위에서는 은은한 은빛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진극의 막이군. 역시, 소북두성원공을 완성하고 나니 바로 진극의 몸이 되는구나.’
한립은 기뻐하며 이 얇은 막을 살펴보았다.
막을 유지하느라 별도로 법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는 데다 원래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아무런 이물감도 없었다.
한립은 만족한 표정으로 의식을 움직여 막을 피부 속에 녹였다. 그런 뒤 다시 의식을 움직이자 그 얇은 막도 곧장 피부 표면에 떠올랐다.
몇 번 더 이를 반복해 보던 한립은 기쁨에 겨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극의 막을 조종하다 보니 의식의 힘 역시 어느새 완전히 회복돼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의식의 힘만 놓고 본다면 지금의 한립은 웬만한 진선보다 훨씬 뛰어났다. 곧 선계로 돌아갈 한립에게 있어서는 무척 좋은 소식임이 분명했다.
한립의 수련이 일단 마무리됨으로써 사방에 일어났던 난리들도 겨우 진정되어, 용암을 토하던 화산도 다시 잠잠해졌다. 다만 온 산으로 번진 큰 불은 쉬이 꺼지지 않을 듯했다.
한편, 저 멀리서 설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 수사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노인과 얘기를 나눴던 청년이 땀으로 옷이 흥건하게 젖은 채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아마도……?”
옆의 수척한 노인도 썩 자신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설산 위 한립의 얼굴에 떠올랐던 기쁨은 다시 결연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립의 진정한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방금 전 진극의 몸을 이룬 순간, 한립은 꼭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붙는 계면 압력을 느꼈다. 덕분에 지금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숨을 쉬는 것마저 어려워져 있었다.
이런 힘은 한립에게 있어서도 결코 낯선 건 아니었다. 그저 영계에서 비승했을 땐 뇌겁에 대처하느라 바빠 이 힘에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뿐이었다. 한립은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수결과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화아악.
주위 돌기둥들 꼭대기의 영석에서 빛이 일어나더니 곧 기둥의 무늬를 따라 진법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러자 지극히 정교하면서도 복잡한 진법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 진법의 이름은 계공영문진(界空靈紋陣)이었는데, 한립이 경원관 장경각에 보관돼 있던 진법 관련 고서들 속에서 찾아낸 일종의 공간진(空間陣)이었다.
비록 공간을 직접 파쇄할 정도로 위력적인 건 아니었지만 공간장벽을 없애는 데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는 진법이었다. 덕분에 그는 큰 부담을 덜게 되었다.
쿠오오오오오!
수십 개에 달하는 빛의 기둥이 동시에 설산 정상에서 솟아올라 저 하늘의 잿빛 구름을 뚫고 들어갔다.
그 순간 구름은 빛의 기둥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해, 곧 사방에 휘날리던 눈송이들까지 휘감고서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구름 속에선 검푸른 용 같은 번개들까지 기둥 주위를 날며 꽈르릉 소리를 냈다.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설산을 바라보고 있던 수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또 무슨 이변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운 듯 이번에는 아까보다 열 배는 더 멀리까지 날아가서야 겨우 멈춰 섰다.
그때, 진법 가운데 있던 한립이 일어서서 100개 가까운 성월보경을 빛의 기둥들을 향해 날려 보냈다.
공간의 힘을 지닌 이 성월보경들을 제련하기 위해 한립은 천귀종에 보관돼 있던 음진석을 전부 쏟아 부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동인악의 저물대에서 구한 음진석까지 탈탈 털어 넣어야만 했다.
빛의 기둥으로 들어간 성월보경들은 곧 빛을 타고 올라가 역시나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계속해서 수결과 주문을 잇다가 어느 순간 눈에서 파란빛을 번쩍이며 외쳤다.
“폭(爆)!”
쾅! 쾅! 쾅! 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발음이 연이어 수십 번이나 울리더니 무수한 은색 빛점들이 터져 나와 구름의 소용돌이 속에 은빛 구역을 형성했다.
한립은 곧장 몸을 날려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구름의 소용돌이 속은 혼돈 그 자체였고, 특히 은빛 구역 주위에는 길고 짧은 회백색 공간균열까지 가득했다.
균열에선 시시각각 칼날 같이 날카로운 빛이 날아 나왔는데, 그 빛에 닿으면 구름도 번개도 순식간에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빛의 칼날들이 쉼 없이 주위에서 스치고 지나가자 결국 은빛 구역도 점점 침식되어 빠르게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어진 한립은 매섭게 포효했다. 그의 전신에는 금빛이 번쩍였고, 그와 함께 몸집도 급격히 커지면서 한립은 순식간에 황금색 털을 가진 산악거원으로 변했다.
게다가 거원의 미간이 벌어지면서 새까만 눈동자가 나타나자, 눈동자 깊은 곳에서 가느다란 흑색 광선 한 가닥이 방출되었다. 광선은 밖으로 나오자 금세 굵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구름의 소용돌이 전체에 굉음이 울렸다.
굉음이 그친 순간, 온 세상이 돌연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으며 빙글빙글 돌던 구름의 소용돌이마저 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소용돌이 가운데 은빛 구역에는 회백색 빛의 장벽이 흐릿하게 떠올라 있었다.
거원은 두 팔을 몸 앞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곧이어 빛이 번쩍였다 사라진 거원의 주먹에는 어느새 뼈 가시가 돋아 있는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거원의 전신에 퍼져 있던 법력이 팔을 타고 장갑으로 흘러들어 가자 장갑은 두 배로 커졌다. 이와 동시에 한립의 흉복부에서 7개의 푸른빛이 번쩍임에 따라 전신의 근육이 또 한 번 부풀어 올랐으며 두 팔도 자연스럽게 굵어졌다.
거원은 빛의 장벽을 향해 한쪽 주먹을 맹렬하게 뻗었다.
그러자 거원의 주먹에서 빛 한 덩어리가 방출됐는데, 그 빛은 금세 집채만 한 크기의 교룡 머리 형상으로 변해 장벽 쪽으로 날아갔다.
꽈아아앙! 쩌쩌쩌쩍.
주먹의 힘이 빛의 장벽에 꽂히면서 장벽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방금 전 움직임을 막아 뒀던 소용돌이가 다시 요동치면서 은빛 구역의 면적도 또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본 거원은 장벽 바로 앞으로 다가가 다시 한 번 전신에 법력을 일으켜 금빛 비늘을 팔에 띄우고 팔의 근육도 두 배로 키웠다.
또 7개의 현규가 번뜩이는 가운데 주먹 위 파천권갑도 더욱 눈부신 빛을 발했으며, 장갑 위로 떠오른 교룡의 허상에서 묵직한 울음소리까지 퍼져 나갔다.
“으아아아압!”
거원이 기합과 함께 벽을 가격했다.
콰아아아앙!
거원의 오른손을 덮고 있던 장갑의 뼈 가시들이 산산이 부서졌고, 교룡의 허상과 장갑도 함께 터져 버렸다. 벽 앞에서 꼭 은색 태양 같은 빛이 일어나 회백색 장벽을 덮쳤다.
콰차차창!
빛 속에서 맑은 소리가 울리더니, 빛이 흩어지고 벽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였다.
뒤쪽으로 희뿌연 공간이 펼쳐져 있는 그 구멍에서는 한립조차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을 만큼 강력한 공간파동이 전해져 왔다.
한립은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 곧장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이 구멍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몸 뒤쪽에선 수많은 공간균열들과 잿빛 구름이 회백색 장벽을 완전히 삼켜 버렸다.
시간이 흐르자, 설산 위 기둥들도 어두워졌고 허공에 형성돼 있던 소용돌이의 힘도 약해지면서 그 속에 가득하던 공간균열들도 봉합되었다.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눈송이들 역시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한풍에 정상적으로 휘날렸다.
설산 하늘이, 마침내 평온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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