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8화. 이보(異寶) 두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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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계의 천정문(天晶門)은 족히 20~30만 년은 되는 역사를 갖고 있는 곳으로, 비록 냉염종이나 경원관 같은 거대 종파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합체기 수사를 여럿 보유하고 있는 결코 만만치 않은 문파였다.
다만 그간 큰 문제를 일으키는 법 없이 조용히 지내 왔기 때문에 그리 높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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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문 안의 어느 넓은 연무장 안.
눈부신 금빛이 번쩍이고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렸다.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투석기로 던져진 돌처럼 날아가 연무장 둘레의 금제에 부딪쳤다.
“쿨럭!”
노인의 입에서 뿜어진 선혈이 그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노인에게 옅은 금빛 발우 하나가 힘없이 빙빙 돌며 돌아왔다. 표면의 빛이 어두워진 걸 봐서는 발우도 적잖이 손상된 것 같았다.
노인의 앞쪽 허공에는 청색 옷을 입은 수사가 서 있었는데, 얼굴이 푸른빛으로 덮여 있어 정확한 생김새는 볼 수 없었다. 수사는 뻗었던 오른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연무장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합체기 수사 세 명은 서둘러 연무장의 금제를 해제하고는 노인 옆으로 날아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청색 옷을 입은 수사를 노려봤다.
“대장로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저 수사께서 사정을 둬 주셨어.”
노인은 합체기 수사들을 달래고 단약을 꺼내 복용하자 혈색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곧 허공의 청색 옷 수사를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이 늙은이는 수사의 일격조차 막기 힘들군요. 부끄럽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신다면, 약속대로 팔보영롱옥(八寶玲瓏玉)을 내주시지요.”
푸른빛 때문에 그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청색 옷 수사의 목소리는 꽤나 젊었다.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옆의 합체기 수사에게 몇 마디 소곤거리자 수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저 멀리 날아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수사의 손에는 길쭉한 옥합이 들려 있었다.
노인은 옥합을 받아 아까운 듯 어루만지다가 청색 옷 수사에게로 날려 보냈다. 옥합을 건네받은 수사는 곧 푸른빛을 주입했다.
달칵.
옥합이 열리자 그 안의 크고 작은 백색 옥들이 보였다. 언뜻 평범한 옥 같았지만 그 표면에는 여덟 가지 색의 영광이 감돌고 있었다.
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정도 양을 모으는 데에도 무려 만 년이 걸렸습니다. 본문이 갖고 있는 광산들에서 채굴한 옥을 전부 합친 건데도 말이지요. 이젠 그저 수사가 잘 써 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청색 옷의 수사는 옥합을 거둬들이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걱정 마십시오. 가치 없이 낭비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곧이어 수사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노인 앞으로 빛 한 줄기가 날아와 멈췄다.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저물탁이었다.
“나도 귀종의 보물을 거저 가져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물건이라면 팔보영롱옥에 대한 보상이 될 겁니다.”
청색 옷 수사는 담담하게 한마디 한 후, 곧 저 멀리 사라졌다.
저물탁 속 내용물을 확인한 노인은 깜짝 놀랐다.
저물탁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영석과 수령이 얼마인지 가늠도 안 될 만큼 오래 묵은 영초들, 거기다 희귀한 요수의 몸에서나 구할 수 있는 재료들까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저물탁은 노인이 넘긴 팔보영롱옥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 * *
불과 몇 달 사이에, 영환계 곳곳에서는 기이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어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가 여러 종문의 희귀한 재료, 또는 비급 등을 연이어 강탈해 간 것이다.
다만 이자는 그래도 제법 도리를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는지 보물을 빼앗고 나면 항상 상대 종문에 적잖은 보상을 해줬기 때문에 그다지 큰 공분을 사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런 강탈 사건과 무관한 산수(散修)나 다른 종문 제자들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이 얘기를 떠들곤 했다.
이 신비한 고수는 몇 달 동안 비슷한 일을 벌이다가 갑자기 사라져서는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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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또 반년이 지나갔다.
영환계 동남부에는 끝이 안 보일 만큼 길게 이어져 있는 산맥이 있었는데, 이름은 화운산맥(火雲山脈)이라 했다.
산맥을 이루고 있는 건 대부분이 거대한 화산으로, 일 년 내내 용암을 토해 내는 탓에 주변 공기 역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고 사방이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로 가득했다.
산맥은 마치 불에 달궈진 돌처럼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그 덕에 하늘의 구름조차 붉게 물든 듯 보였다. 이 산맥이 ‘화운산맥’이란 이름을 갖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운산맥은 영환계에서 가장 큰 화령의 땅이자 유명한 험지였기 때문에 웬만큼 경지가 높은 수사들도 안쪽 깊은 구역까지 들어가는 건 힘들었다.
이런 화운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용암으로 형성된 큰 강이 굉음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강의 표면에서는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고, 고온으로 인해 주위 공기도 흐릿해진 채 일렁거렸다.
이 용암의 강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암벽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시시각각 온갖 빛이 번쩍였고 때때로 기이한 소리도 울렸다.
그리고 오늘도, 꼭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동굴에서 흘러나오더니 곧 동굴에서부터 굵은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올라 하늘 높이 뻗어 갔다.
빛의 기둥 속에서는 교룡 두 마리와 뼈 갑옷의 허상이 희미하게 보이다 한참 후에야 서서히 사라졌다.
빛을 방출했던 동굴 안에는 청색 옷을 입은 남자, 바로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한립 앞에는 대단한 영력 파동을 발산하고 있는 보물 두 점이 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뼈처럼 하얀 갑옷으로서 표면에 방패, 보산(寶傘), 법륜(法輪) 등을 묘사한 문양 여덟 개가 새겨져 있었다.
나머지 보물 한 점은 은빛이 번쩍이는 장갑 한 켤레로, 그 바깥 면에는 은백색 뼈 가시들이 돋아 있었고 꼭 두 개의 교룡 머리 같았다.
한립은 찬찬히 법보들을 훑어보며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갑옷의 이름은 팔보영롱갑의, 장갑은 파천권갑으로, 둘 다 한립이 천귀종의 비급에서 찾은 제련 방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두 법보 모두 일반적인 법보와는 좀 달라서 마치 역수를 위해 탄생한 법보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강한 육신의 힘이 있어야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건 한립이 편법으로 비승하는 데에 따를 위험에 대비해서 일부러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 제련해 낸 것들이었다.
한립은 갑옷과 장갑을 회수한 후 이번엔 옥책(玉冊)을 꺼냈다. 옥책엔 영환계의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지도 위 몇 군데 지점에는 특별히 따로 표시가 돼 있었다.
이 역시 한립이 여러 종문의 비급에서 찾아낸 것으로 위의 표시들은 바로 취약한 공간접점이 있는 장소를 뜻했다. 다만 그중에 한립이 직접 검증한 곳은 아직 한 곳도 없었다.
잠시 지도를 바라보던 한립의 시선이 동남쪽 지역의 표시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 푸른 빛줄기 하나가 동굴에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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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계의 까마득히 높이 솟아 있는 어느 설산 위.
하늘에는 무척이나 두꺼운 잿빛 구름이 떠 있었고, 그 속에서는 푸른 번개가 쉼 없이 번쩍이고 꽈르릉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구름 아래쪽에서는 광풍이 쌩쌩 불면서 눈송이들을 매섭게 휘감아 온 산을 가리고 있었다.
설산의 정상은 꼭 거대한 칼로 베어 낸 것처럼 널찍하고 평평한 평지로 변해 있었는데, 그 위에는 흑색 돌기둥 수십 개가 두 겹의 고리 모양 진법을 이루며 서 있었다.
진법 안 지면에는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주변의 돌기둥들 꼭대기에는 순도 높은 영석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진법 가운데에 한 청년이 날카롭게 날아드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앉아 있었다. 그는 결코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눈동자가 상대의 마음까지 꿰뚫을 듯 그윽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한립이었다.
한립이 눈을 지그시 감고 소북두성원공을 운용하자 설산 꼭대기가 번쩍 빛났다.
한립의 몸에서 방출돼 곧장 구름을 뚫고 날아갔던 별빛들은 하늘에서부터 다시 일곱 개의 은백색 빛의 기둥이 되어 돌아와 산 정상을 뒤덮었다. 광풍에 휘날리던 눈들도 그 빛에 닿는 순간 금세 녹아 증발해 버렸다.
곧이어 한립은 성월보경 7개를 각각의 빛의 기둥으로 날려 보냈다.
그 직후 한립의 머리 위에는 갑자기 기묘한 소용돌이가 나타나 그 성월보경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소용돌이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속의 흡인력도 강해져 거울들은 결국 소용돌이 쪽으로 향했고 그에 맞춰 빛의 기둥들도 그리로 기울어졌다.
쿠쿠쿠쿠쿠쿠.
빛의 기둥 7개는 마침내 거대한 기둥 한 개로 융합되어 하늘로 뻗어 갔다.
그러자 밤의 장막에 펼쳐져 있던 북두칠성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북두칠성의 천추성(天樞星)에서부터 시작해 천선성(天璇星), 천기성(天璣星), 천권성(天權星) 등 일곱 개의 별이 순서에 따라 아까보다 더 강한 빛을 일으키며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몇 차례의 반짝임이 이어진 뒤, 북두칠성의 별들은 이번엔 위치마저 바꿔 처음에는 원래의 주걱 모양에서 일직선이 됐다가 나중엔 두 끝을 붙여 둥근 고리를 만들었다.
곧이어 고리 속에서는 은자색(銀紫色) 빛이 용솟음쳐 나와 순식간에 밤하늘을 가로질러서 한립의 몸으로 쏟아졌다.
쏴아아아!
은자색 빛에 닿자 한립이 입고 있던 옷은 재로 변해 버렸고, 그렇게 드러난 한립의 피부는 빛 아래 투명하게 반짝였다.
심지어 피부로 덮여 있는 안쪽 근육과 뼈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는데, 그 순간 그의 신체에도 변화가 일어나면서 원래는 옅은 은색 광택이 나던 각 부위가 이제는 마치 은을 녹인 물로 덮인 듯 보였다.
휘오오오오오.
무수한 은색 빛점들이 눈송이처럼 휘날리며 원형 막을 형성해 설산을 덮었다. 빛의 장막에서는 가공스러운 영력 파동이 일고 있었다.
그 파동이 점점 강해지면서 사방으로 뻗어 가자 설산은 물론 주변의 다른 산들까지 위태롭게 흔들렸다. 결국 대지가 요동치며 지면 곳곳에 균열이 일었고, 강바닥이 들썩여 강줄기의 모양마저 바뀌기도 했다.
근처의 울창한 숲 속에서는 뿌연 흙먼지가 일었고 수많은 짐승들이 나무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울부짖었다. 나무 위로는 온갖 새들이 날아오른 바람에 그 날개들로 하늘마저 완전히 가려질 정도였다.
쿠르르르릉.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휴화산마저 이 강한 자극으로 다시 붉은 용암을 뱉어 냈다. 분화구에서는 용암과 함께 검은 연기도 뿜어져 나와 하늘 높이까지 치솟았다.
거기다 불타오르는 돌덩어리들까지 높이 솟구쳤다가 곧 유성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산 곳곳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산에는 금세 불길이 번졌고 어두운 밤하늘마저 붉게 물들었다.
설산 주위 산들에서 연이어 빛줄기들이 날아가, 빛의 장막으로 덮여 있는 구역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 허공에 멈춰 섰다.
빛줄기들의 정체는 난데없는 이변에 놀라서 몸을 피한 수사들로, 이 중에는 용모가 출중한 젊은 남자나 매력적인 중년 부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혼자서 수련하고 있던 산수들 이었는데, 실력들도 결단기에서 연허 중기까지 다 제각각이었다.
몸을 피한 자들 중엔 머리에 뿔이 나 있다든가,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거나 아예 맹수의 머리를 하고 있는 등 좀 특이한 외모를 가진 요족 수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인족 수사든 요족 수사든, 다들 그저 두려움과 의혹이 섞인 눈으로 설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감히 가까이 다가가서 상황을 알아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이런 엄청난 기세라니……. 설마 대승기 수사가 도겁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어느 청년이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수척한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보기엔 그건 아닌 것 같네. 겁뢰 같은 건 내리칠 기미도 안 보이지 않나. 그보단 아마 무슨 현묘한 공법을 수련하는 게 아닌가 싶네.”
“공법을 수련하는데 저 정도 이변이 일어난단 말씀입니까?”
청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하던 순간, 설산 정상에서 무서운 포효가 울리더니 곧 거센 풍랑처럼 높게 일어난 공기의 파문이 설산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 광경을 본 수사들은 깜짝 놀라 뒤쪽으로 멀리 피했지만, 워낙 파문의 속도가 빨랐던 탓에 경지가 낮은 일부 수사들은 얼마 못 가 파문에 덮쳐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수사들은 족히 100리는 날아간 후에야 겨우 도망을 멈추고는 다시 설산을 바라봤다.
설산을 덮었던 빛의 장막은 어느새 두 배로 커져 아까보다도 넓은 범위를 덮고 있었으며, 그 속의 설산은 이제 희미한 윤곽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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