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7화. 전설이 된 자
*
한립이 냉염종을 떠난 뒤로, 그의 모습은 영환계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한립에 대한 소문은 갈수록 살이 붙어 사람들의 입을 거칠수록 그는 점점 전설적인 존재로 변해 갔다.
한립의 등장으로, 본래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영환의 수도계에 피바람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두고 그간 폐관한 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고인이었을 거라 주장했으며, 또 누군가는 그가 적선(謫仙)이라 우겼고, 심지어는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모를 요수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자도 있었다.
한립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렸다.
그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대마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귀종이라는 악독한 세력을 뿌리 뽑아 영환계에 평안을 돌려준 은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한립에 대한 얘기는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와 함께 천귀종이라는 대종파의 멸문으로 발생한 혼란 역시 수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숱한 각축전과 셀 수 없이 많은 수사들의 죽음으로 새로운 형세가 서서히 자리 잡으면서 영환계도 안정되어 갔다.
물론 이 모든 건 아직 한참 뒤의 일이었다.
* * *
영환계 북쪽 어딘가에는 시시때때로 하늘의 태양마저 가릴 만큼 짙은 검은색 안개가 일어난다고 해서 ‘흑무해(黑霧海)’라 불리는 해역이 존재했다.
이 바다엔 강한 영력 덕분에 적잖은 해수가 살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힘든 영초 등도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해수를 사냥하거나 보물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는 수사들도 꽤 많았다.
* * *
낙아가 실종된 후 몇 달이 지난 햇볕 뜨거운 어느 날.
흑무해 속 어느 무인도 근처에서는 무서운 굉음과 함께 파도가 높게 치솟았다가 쏟아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 탓에 해수면 위의 검은 안개도 거칠게 요동쳤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는 녹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과 흑색 도포 차림의 노인, 그리고 중년의 도사가 꼭 바다소처럼 생긴 해수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화신 초기의 경지로, 수련한 공법은 다 제각각이었지만 벌써 여러 번 손을 잡은 경험이 있었는지 합공에 꽤 능숙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법보에서 발생한 빛은 해수를 가운데 두고서 서로 연결되어 커다란 원을 이룬 채 연달아 해수를 공격해 댔다.
이 해수는 남색 몸 등 쪽으로 검은 줄무늬 두 줄이 머리 쪽에서부터 꼬리까지 뻗어 있었고, 비명을 지를 때마다 몸에서 푸른 구슬 모양 번갯불들이 튀어나와 법보 공격을 막아 냈고, 입에서도 굵은 푸른빛이 방출돼 세 수사에게 날아갔다.
해수는 수사들보다 조금 더 높은 화신 중기 수준의 경지였지만, 혼자 셋을 당해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반 시진 후, 격전이 계속되자 해수의 호체영광(護體靈光)도 결국 깨져 버렸다. 방어력을 잃은 해수의 머리는 흑포 노인이 날린 검광에 의해 꿰뚫리고 말았다.
슬피 울며 꿈틀거리던 해수의 움직임은 얼마 못 가 완전히 멈췄다. 중년 도사가 웃으며 흑포 노인을 돌아봤다.
“하하! 진 수사의 서혼찬심검(噬魂鑽心劍)은 역시 대단하군요. 방어력 좋기로 유명한 흑반현해우(黑斑玄海牛)까지 쓰러뜨릴 정도라니요.”
“과찬이시오, 고목 수사.”
겸손한 척 말했지만 흑포 노인의 눈동자에서는 감춰지지 않은 의기양양함이 번득이고 있었다.
노인은 곧 손을 뻗어 흑반현해우의 머리를 꿰뚫은 자신의 장검을 회수했다. 이 장검은 뱀 두 마리가 얽혀 있는 형상의 기괴한 검으로, 서늘한 검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회수한 검을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은 무척 다정했다.
사실 이 장검은 그가 반평생 동안 모은 보물 전부를 쏟아 부어 만든 것으로, 영보에도 거의 뒤지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노인은 검을 제련할 때, 가죽이 두꺼운 해수를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파갑(破甲) 신통까지 담았었다.
세 사람은 곧 흑반현해우의 사체를 갈라 나눠 가졌다.
“내 생각엔, 우리 셋이 협공한다면 화신 후기의 해수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소. 만에 하나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몸을 피하는 덴 문제가 없겠지. 그러니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소?”
녹의 여인의 제안에 중년 도사도 구미가 당기는 듯 눈을 번쩍였다. 하지만 흑포 노인은 다급하게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두 분은 흑무해에 온 지 얼마 안 돼 잘 모르나 본데,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로 그 악명 높은 성라해안 구역이 있습니다.
그곳 해저에는 연허기며 합체기에 이른 해수들이 가득 살고 있지요. 심지어 그 구역 가장 깊은 곳엔 대승기에 가까운 오조묵교(五爪墨蛟)까지 산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대승기의 해수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중년 도사가 놀라며 묻자 노인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내가 듣기론 그렇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긴 합니다. 그리고 오조묵교가 그곳에 머문 지도 벌써 십만 년이 넘은 데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수천 년 전이었다고 하니, 지금은 그곳에 없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구역의 다른 해수들만으로도 위험한 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놈들이 수면 밖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기서 당장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하긴, 흑반현해우를 쫓다 보니 원래 계획보다 더 깊이 들어오긴 했지요. 역시 수사 말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노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재촉하자 녹의 여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이 막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천지를 흔드는 굉음이 저 먼 바다 쪽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세 사람 주위의 바다에까지 거친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이들이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리며 엄청난 영압(靈壓)이 밀려들었다.
영압으로 인해 바다엔 하늘을 찌를 듯한 바람기둥까지 형성됐는데, 이를 보고 뒤늦게 도망치던 세 사람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바람에 휩쓸려서 낙엽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의 세력이 약해진 덕분에 그들은 서둘러 공법을 펼쳐 바람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번 굉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저 멀리서 해수면이 갑자기 폭발하듯 갈라지며 거대한 검은색 형체가 튀어나왔다. 그 형체가 하늘을 얼마쯤 날다 흑포 노인 등이 있는 곳 근처의 무인도를 세차게 내리치자 섬이 금방이라도 박살 날 것처럼 흔들렸다.
검은 형체의 정체는 바로 먹빛 비늘을 온몸에 뒤덮고 있는 교룡으로, 그 몸길이는 300장에 달했으며 머리에는 산호 같은 긴 뿔이 두 개 나 있었다.
게다가 교룡의 몸에는 커다란 발도 네 개 달려 있었다. 각 발마다 꼭 예리한 도검 같은 다섯 개의 발가락이 차가운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교룡에게서 풍기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세 사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특히 흑포 노인은 제법 규모가 큰 종파의 내문제자로서 합체기인 종문 노조를 직접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 나타난 교룡의 기운이 합체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교룡은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였다.
노인 등 세 사람은 급히 저 뒤로 물러섰는데, 멀리까지 도망친 뒤에야 다시 교룡 쪽을 돌아보자 어느새 교룡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였다. 그 구멍에서 쏟아진 피는 무인도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쌔액.
교룡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청색 신형 하나가 날아왔다. 신형의 속도가 워낙 빨랐던 탓에 노인 등은 그저 그 신형이 교룡을 스쳐 지나가며 남긴 흐릿한 잔영밖에 볼 수 없었다.
차가운 빛이 지나간 순간, 교룡이 몸을 한 번 움찔하는가 싶더니 거대한 머리통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 피의 기둥이 높이까지 뻗어 나갔다가 이내 혈우(血雨)가 되어 쏟아졌다.
쿠우우우웅!
굉음을 일으키며 땅에 떨어진 교룡은 잠시 경련하다 어느 순간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그때, 교룡의 머리 쪽에서 검은 빛줄기가 튀어 나갔다. 빛 속에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교룡이 숨어 있었다.
교룡은 서둘러 도망치려 했지만, 청색 신형은 진작 예상했다는 듯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나 입에서 푸른빛을 뿜었다. 푸른빛에 감싸인 작은 교룡은 저항할 수도 없이 어느 옥병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 광경을 본 흑색 도포 노인과 중년인은 눈이 휘둥그레졌으며, 녹의 여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청색 신형이 멈춰 서자 드디어 그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된 이들은 깜짝 놀란 얼굴이 됐다. 그 신형의 정체는 고작 스물대여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교룡을 죽인 청년은 흑포 노인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교룡의 머리통 쪽으로 걸어가더니 한 손을 뻗었다.
쌔액!
머리 한쪽이 터지면서 그 속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색 구슬이 뽑혀 나왔다. 표면에 현묘한 문양이 가득한 이 구슬은 바로 오조묵교의 요단이었다.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요단을 챙겨 넣더니 이번엔 날카로운 손날을 교룡의 몸통 쪽으로 몇 번 움직였다.
촤악, 촤악.
흐릿하게 오간 잔영이 사라지고 나자 어느새 잘려 있는 교룡의 발 네 개가 보였다. 발까지 거둬들인 청년은 이번엔 교룡의 목 부분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다른 흑색 비늘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은빛 비늘 한 조각이 덮여 있었으며, 역시나 은빛인 뼈 가시도 몇 개 돋은 채 놀라운 영력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이 비늘 조각과 뼈 가시에는 요단의 것과 유사한 문양이 나 있었다.
청년은 조심스럽게 비늘과 가시를 떼어 낸 후, 교룡의 몸에서 몇 가지 재료를 더 모은 뒤에야 흑포 노인 무리를 힐끗 돌아봤다.
청년의 눈빛에 악의는 없었지만 흑포 노인 등의 가슴은 절로 쿵쿵 뛰었으며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청년은 그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고 곧 시선을 돌리더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청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그 오조묵교요?”
중년 도사가 이리저리 잘려 나가고 남은 교룡의 몸뚱이를 보며 묻자 흑포 노인도 겨우 두려움이 진정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마 그럴 거요. 게다가 아까 전 상황을 봤을 때 이 교룡은 대승기 경지였던 게 틀림없습니다!”
중년 도사와 녹의 여인은 그 말에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지만 방금 전의 그자는 맨손으로 이놈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뭐 그리 대단한 힘을 쓴 것도 아니고 무척 느긋한 모습이었지요. 그럼 그자 역시 적어도 대승기란 뜻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냉염종의 사마 선배와 경원관의 합산 선배야 나도 직접 뵌 적이 있어서 그 모습을 알고 있는데, 아까 그자는 분명 그 두 분은 아니었습니다. 대체 정체가 뭔지 모르겠군요.”
녹의 여인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두려움에다 의아함까지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중년 도사가 쉬운 추측을 내놓았다.
“혹 환술로 용모를 바꾼 건 아닐는지?”
“그건 아닐 거요. 교룡에 난 상처로 봤을 때 그자는 역수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마 선배나 합산 선배일 수 있겠습니까.”
흑포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녹의 여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 두 분이 아니라면 그럼 누구란 말씀입니까? 영환계에 그분들 외에 대승기 고수가 또 누가 있습니까?”
“아,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왜 그, 몇 년 전 하룻밤 새 천귀종을 무너뜨린 한립 선배 말입니다. 한 선배가 바로 역수였지 않습니까!”
흑포 노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세상에…….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한 선배가 겉보기엔 상당히 젊은 청년 같다고 했습니다. 분명 그분일 겁니다!”
녹의 여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중년 도사도 설렌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 얘기론 그 분이 선계에서 내려온 진짜 선인이라 했습니다! 내 이 눈으로 그런 분을 직접 뵙다니……!”
얘기를 나누던 세 사람의 시선은 곧 오조묵교의 사체로 옮겨 갔다. 모두의 눈빛은 뜨겁게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교룡의 남은 몸뚱이는 한립에게는 가치 없는 쓰레기일지 몰라도, 이 세 수사에게는 작은 살점 한 덩이만 가져가도 엄청난 소동을 일으킬 수 있는 보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대승기 요수의 살점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