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86화 (1,243/2,000)

1486화. 탐문

*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한립의 물음에 합산도인은 두려움 섞인 눈으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게……. 방금 전 냉염종의 사마 수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저…… 류 소저가…… 끌려갔답니다.”

“더듬거리지 말고 제대로 말하시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한립의 표정이 굳어지자 합산도인은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 무렵, 갑자기 백의 차림 여자가 영염산맥의 금제를 뚫고 들어오더니 곧장 출운봉으로 가서 류 소저를 데려갔답니다.”

“그렇게 대놓고 낙아를 데려가는데도 나서서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오?”

“사마 수사 말로는, 자신도 저지해 보려고 했지만 먼저 펼쳤던 공격은 바로 여자에 의해 막혀 버렸고, 그 뒤엔 여자의 손짓 한 번에 내동댕이쳐져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자도 사람을 상하게 할 뜻은 없어 보였고, 그저 자기가 류 소저의 동족이라 말하고는 소저를 데리고 떠났답니다.”

“손짓 한 번에 사마경명이 내동댕이쳐졌다고?”

한립은 조금 놀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마 수사 얘기론 그랬습니다. 선배님, 경원관 제자들을 풀어 소저의 행방을 알아보라 할까요?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는 그래도 저희 경원관이 제법…….”

합산도인이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한립은 그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 세계에, 손짓 한 번으로 대승기 수사를 물러나게 만들 만한 인물이 있소?”

“그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알았소. 일단 물러가 계시오.”

한립의 분부에 합산도인은 의아해하면서도 공손히 몸을 굽히고는 곧 취성대를 떠났다.

한립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은빛 장막을 방출해 취성대 일대를 덮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합산도인의 피둥피둥한 신형이 다시 구궁봉에 나타났다. 합산도인은 취성대쪽으로 몸을 굽히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후배 합산, 한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합산도인은 매일 이렇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립을 찾아와서 영환계의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보고했다.

이 기간 중 대부분은 한립이 폐관수련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래도 합산도인은 한결같이 새 소식들을 아뢰고는 혹시 모를 분부에 대비해 한 시진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인사를 올리고 떠나곤 했다.

그래도 합산도인은 지치거나 짜증스러운 기색 따윈 조금도 없이 극히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었다.

오죽하면 이 일천여 일 동안 합산도인이 하도 경원관 하늘을 날아다닌 덕에, 원래는 백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던 태상대장로를 이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된 경원관 제자들은 감격하기까지 했다.

물론 대부분의 장로들은 이런 상황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속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꼭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실상에 대해 떠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합산도인은 오늘도 예의 바르게 구궁봉 밖 허공에 서서 빛의 장막에 휩싸여 있는 취성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이상한 느낌이 가슴을 스쳤다.

그동안에는 한립이 폐관수련을 할 때면 취성대 일대에서 출렁이는 성광지력을 멀리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온 사방이 유난히 고요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합산도인은 어쩌면 한립이 다른 종류의 공법을 수련 중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얌전히 기다렸다가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인사를 올리고 물러갔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취성대에선 어떤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감히 한립의 수련을 방해할 엄두는 나지 않았던 합산도인이 인내심을 갖고 하루하루 넘기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달이 지나갔다.

이쯤 되자 합산도인도 거의 한계에 다다라, 오늘은 이를 악물고 반나절이나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취성대는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한 선배님, 류 소저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좀 찾았는데 혹 직접 뵙고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합산도인이 소리 높여 외쳤지만 빛의 장막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선배님!”

다시 한 번 소리쳐 봐도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합산도인은 취성대를 덮고 있는 장막을 향해 서둘러 빛 한 줄기를 방출했다.

쩌쩌쩍 파사사삭!

장막이 깨지면서 취성대의 모습이 드러났지만 그 어디에서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계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백색 옥간 하나만이 합산도인의 시선을 끌었다.

의식으로 옥간을 살펴본 합산도인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얼굴엔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옥간에는 그의 체내에 펼쳐져 있는 금제의 해제법이 기록돼 있었다.

합산도인은 상대가 보든 말든 깊게 몸을 숙이며 저 먼 하늘을 향해 외쳤다.

“한 선배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 *

영염산맥의 어느 대전 안.

사마경명은 종주 및 장로들이 종문의 일 몇 가지를 상의한 후 떠나자 피로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천귀종이라는 영환계 제일 종문이 하루아침에 멸문당한 후부터, 천귀종이 지배해 왔던 기반을 두고 여러 세력 사이에서는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게다가 냉염종은 예전의 3대 종문 중 유일하게 3년 전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더 적극적으로 그 싸움에 끼어들었다.

결국 사마경명은 자신의 수련에는 신경 쓸 새도 없이 하루 종일 종문의 일들을 처리해야 했고, 갑자기 낯선 일을 떠맡으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사마경명이 직접 나서서 냉염종을 지휘해야만 했던 데에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리라 생각했던 경원관이 바로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천귀종에서의 사건 이후 적잖은 위세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마경명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냉염종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 갔고, 선계의 냉염노조도 상당히 기뻐하며 많은 상을 내렸다.

당장은 종문의 일에 묶여 있지만 나중에 다시 폐관해서 그 하사품들을 이용해 수련한다면 실력은 더 발전할 것이고, 어쩌면 선계로 비승까지 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사마경명은 피곤하지만 내심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사마경명이 막 대전 뒤쪽으로 나가려던 순간.

“사마 수사.”

익숙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사마경명은 얼굴이 확 굳어져 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다.

대전으로 날아든 푸른빛이 걷히자 청색 옷을 입은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의 소매 속에서는 은빛이 도는 자색 부적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사마경명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선배님이셨군요. 몇 년 못 뵙는 사이 풍채가 더 헌앙해지신 듯합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별말씀을.”

한립의 목소리에서 한기를 느낀 사마경명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리를 권했다.

“선배님, 어서 앉으시지요.”

한립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이리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누이동생이 냉염종 안에서 누군가에게 잡혀갔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 그게……. 예. 후배의 불찰로 그만……. 하지만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사마경명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한립이 냉담하게 말을 끊었다.

“낙아를 데려간 인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건 없습니까? 그 여자가 무슨 말을 남기거나 하지도 않았고요?”

“그 침입자는 예쁘장한 젊은 여자였는데 흰옷을 입고 있었고, 자기가 류 소저의 동족이라고 했습니다. 류 소저를 돌봐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도 했지요. 하지만 후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여서, 나중에 제자들을 시켜 탐문해 보게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배 생각에는…….”

사마경명은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

“계속 얘기해 보십시오.”

“아, 예. 그래서 후배 생각에는 혹시 그 여자가 원래 영환계에 머물고 있던 자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후배가 단 일 초식도 막지 못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상계의 진선이 아닐는지요.”

“진선이라…….”

한립 역시 진작 이런 추측을 했었기 때문에 사마경명의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고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한립이 알기로는 낙아의 종족인 운호족은 쇠락한 종족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낙아 일가가 혈도회 따위에게 짓밟혔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웬 진선이 그런 약한 종족 출신이라며 등장했다니 쉽게 이해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선계로 비승했던 선조가 정말 우연히 이 시점에 영환계로 돌아온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낙아가 밝히지 않은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은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마 수사는 최선을 다했으니 나 역시 수사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히 낙아를 데려간 자가 동족이라고 하니 낙아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테지요.”

사마경명은 한립이 화를 내지 않자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긴장이 풀리고 나자 비로소 자신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참, 낙아의 일 말고도 사마 수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수사의 가르침을 좀 청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한립의 말에 사마경명은 황송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부디 말씀 편히 놓으십시오. 게다가 가르침이라니요. 후배가 어찌 감히……. 뭐든 아는 대로 다 말씀드릴 테니 편히 하문하십시오.”

“그럼……. 혹시 냉염 수사가 선계로 비승하는 것과 관련된 얘기를 수사에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영환계에서 선계로 비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금해야 할 행동은 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마경명은 한립의 질문을 듣고 살짝 놀랐지만 곧 공손히 대답했다.

“한 선배께서는 역수일맥(力修一脈)의 길을 걷고 계시지요. 그럼 일단 진극의 몸을 이루게 되면 이 세계의 압력에 의해 밀려나게 될 텐데, 그때 공간을 뚫을 정도의 힘이 갖춰져 있다면 비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한립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소북두성원공의 대성이 가까워질수록, 비행하는 데에까지 영향을 받을 정도로 기묘한 힘의 압박이 느껴졌었다.

“영환계는 북한선역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비승하게 되면 북한선역 어딘가의 비선대로 인도될 겁니다. 하계에는 영력이 워낙 희박하기 때문에, 일단 비승에 성공한 자는 누구나 그 자질이 뛰어나고 심성도 강인하다는 게 인정되어 선계에서 상당히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사마경명의 설명에 한립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가슴속은 좀 답답해졌다. 비승한 자를 대하는 선계의 태도는 어딜 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수배령까지 내려져 있는 지금 상황에서 한립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바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이었다.

“아, 참. 사실 우리 영환계에는 비선대를 통하지 않고 몰래 비승할 수 있는 방법도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립이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마경명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덧붙였다.

“그래요? 어디 얘기나 들어 봅시다.”

한립은 귀가 쫑긋해졌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말씀드리기도 부끄러울 만큼 상당히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영환계와 선계 사이의 공간접점이 약한 곳을 찾아서, 공간 속성의 힘을 이용해 강제로 틈을 만들어 선계에 가는 거지요.”

“하지만 그건 정당한 방법이 아니니 적잖은 문제가 따를 텐데요.”

한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그가 인계에서 영계로 비승할 때 이미 떠올렸던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영환계는 선계와 상당히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비승하는데 조금은 덜 위험할 수도 있을 듯했다.

“역시 영명하십니다. 실제로 이건 상당히 위험한 방법입니다. 경계 간 공간 자체도 위험천만할 뿐만 아니라, 용케 무사히 통과한다 해도 썩 좋은 곳으로 전송되진 못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공간접점이 약하다는 건 그와 연결돼 있는 반대편 장소도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이런 방법으로 비승하게 되면 선지(仙池)로 육신을 단련할 수도 없고 신분을 증명해 줄 선패도 없으니 선계에 간다 해도 적잖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사마경명의 자세한 설명에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간 계속 고민해 왔던 비승 문제 해결 방법을 마침내 찾은 것이다.

사마경명이 얘기한 위험쯤이야 지금의 실력이라면, 미리 준비만 잘해두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사마 수사, 감사합니다.”

한립이 정식으로 인사하자 사마경명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한 선배님께서 그리 예를 차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선배님께선 이미 저희 종문에 큰 도움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어르신께서도 한 선배님께 대신 감사 인사를 올려 달라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그래요? 냉염 수사가 아직도 이 몸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한립은 옅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뱉었다.

“그야 당연히 어르신께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사마경명이 서둘러 변명하려 했지만 한립은 바로 말을 잘랐다.

“자,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잘 지내십시오.”

말을 마친 한립은 곧장 푸른 빛줄기로 변해 저 멀리 날아갔다. 그 빛이 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사마경명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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