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5화. 문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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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냉염종 성화봉의 자색 죽림 안.
사마경명은 손에 전신(傳訊) 원반을 든 채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엔 희색이 가득했다.
그가 수행해 온 긴 세월을 생각해 본다면 원래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벽에 걸려 있던 족자에 환한 빛이 일어나더니 곧 냉염노조의 허상이 떠올랐다.
“어르신을 삼가 봉영하옵니다.”
사마경명의 인사를 받은 냉염노조가 담담하게 물었다.
“일은 어찌 되었느냐?”
“예, 어르신. 정말 큰 경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마경명이 희색을 감추지 못하자 냉염노조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사마경명은 기쁨에 취해 태도가 흐트러졌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어르신. 실은 오늘 한 선배님이 소식을 보내 왔사온데, 천귀종을 이미 영환계에서 지워 버렸다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천귀종에 복속돼 있던 일부 국가와 종문은 앞으로 우리 냉염종 아래로 들어오게 될 거라며, 이는 저번에 우리 쪽 비급을 훼손한 데 대한 보상이라 했습니다.”
“일부라……. 그럼 경원관은? 경원관도 본종에 귀속될 거라더냐?”
냉염노조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다시 물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다만 다른 경로로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경원관은 꽤 많이 파괴되긴 했어도 천귀종처럼 완전히 멸문 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사마경명의 말에 냉염노조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처음엔 한 수사가 아무리 애써 봐야 두 종문에 간신히 피해나 좀 입힐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설마 혼자서 천귀종을 평정해 버릴 줄이야. 내가 수사의 실력을 너무 몰랐군.”
“어르신, 이제 우리 냉염종은 일약 영환계 제일 종문이 될 게 틀림없습니다.”
사마경명이 결국 흥분을 참지 못하고 말하자 냉염노조는 차분하게 분부했다.
“그렇다고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도 경원관의 동정을 예의 주시하도록 하고. 참, 내 기억엔 한 수사의 동생도 우리 종문에 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아이에게는 한 치의 소홀함 없는 대우를 해야 할 게다. 또한, 그 아이 외에도 한 수사와 관련돼 있는 모든 종문 내 사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하거라.”
* * *
출운봉 중턱의 어느 동부 안.
깊은 밤, 청량한 달빛이 창문을 지나 여인의 흰 피부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와 함께 반짝이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여인은 뺨의 눈물을 닦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버지, 오라버니. 천귀종이, 천귀종이 드디어 한 오라버니 손에 없어졌어요. 풍국도 다시 냉염종의 관리를 받게 됐고요. 숨어 지내던 가문 사람들도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이렇게 우리 가문의 복수도 이뤄진 셈이네요. 이제라도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이 여인은 바로 여몽한이었다. 드디어 한을 풀었다는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있던 몽한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한립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 * *
보름 후, 경원관 구궁봉 위.
한립은 몸을 숙여 마지막 완성석을 땅의 움푹한 곳에 꽂아 넣고 있었다.
콰득.
완성석이 깨지면서 취성대가 환하게 반짝였고, 곧 안개 같은 은색 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탑을 완전히 덮었다.
그 순간 취성대에 새겨져 있는 모든 별자리 문양에 빛이 일었다.
한립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 * *
선계, 이름 모를 바다의 해변.
그곳에는 구름까지 닿을 만큼 높은 절벽이 솟아 있었는데, 절벽의 끝은 꼭 독수리의 날카로운 부리 같은 모양으로 바다 쪽을 향해 돌출돼 있었다.
이 절벽 윗면에는 높다란 성곽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성이 서 있었다. 성을 감싼 성곽은 시커먼 색을 띠고 있었으며 마치 절벽과 하나 된 듯한 모습이었다.
무척이나 견고해 보이는 성곽이었지만 바다 쪽 성벽에는 오랜 세월 거쳐 온 상처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한편 성안에는 곧게 뻗은 대로 네 개 외에도 좁은 길이 적잖이 종횡으로 나 있었고, 크고 작은 점포들도 길가에 뒤섞여 있었다. 거기다 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제법 많았던 탓에 길 위는 오가는 사람과 마차들로 꽤 시끌벅적했다.
성 남서쪽의 어느 좁은 거리.
상당히 좁은 길이었는데도 양쪽으로 주루며 점포, 기루 등 있어야 할 건 다 갖춰져 있어 사람들의 얘기 소리, 흥정하는 소리 등으로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있는 버드나무 옆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3층짜리 작은 건물이 서 있었다.
이 소박한 건물은 푸른 벽과 붉은 나무 기둥 위로 팔각지붕을 얹고 있었으며 길 쪽으로는 ‘약(藥)’이라는 단 한 글자가 적힌 청색 깃발을 달고 있었다.
점포 안에서는 무명옷을 입은 점원 몇 명이 분주히 오가며 영약을 사러 온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고, 간혹 몇몇 손님이 따로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2층에서 다시 3층으로 나 있는 계단 입구에는 특별히 나무로 만들어진 청색 문이 달려 있었다.
그 청색 문 너머 3층의 어느 별실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고, 융단 위엔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 찻주전자에서 피어오른 향에 방 안은 향긋한 차향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탁자 양쪽에는 사람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흑색 경장 차림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청년, 바로 방반(方磐)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약간 퉁퉁한 몸에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있는 평범한 모습의 중년인이었다.
방반은 별실 주위에 금제를 한 겹 더 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작은 도인은 산속에 숨고 큰 도인은 조정과 시장 거리에 숨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니 귀루에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분타를 세우신 뜻도 이해가 갑니다.”
“하하. 저희 십방루야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에서 정보를 모아 파는 걸 업으로 하고 있으니 자연히 그 장소도 이런 곳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중년인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방반은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그자에 대한 소식을 입수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야 물론입니다. 이렇게 오시라 청한 것도 이 거래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이지요.”
중년인의 말을 들은 방반은 곧바로 저물대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중년인은 저물대를 집어 의식으로 훑어보고는 한층 더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찾고 계시는 자는 지금 영환계에 있습니다.”
중년인은 탁자 위에다 맑은 물이 담긴 발우를 꺼내 놓고는 그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우우웅.
발우 속의 물이 진동하고 그 위로 푸른빛이 한 번 번쩍이고 나자, 수면에 산악거원과 황건거인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산악거원을 본 순간 방반의 눈동자에 강한 살기가 스쳤다. 맞은편의 중년인은 그런 방반을 보면서도 그저 아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중년인이 발우를 살짝 문지르자 수면에 나타났던 장면이 곧 사라졌다.
“이 자는 지금도 영환계의 경원관이라는 종문에 머물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역시 귀루의 능력은 감탄스럽군요. 감사합니다.”
중년인의 이어진 설명에 방반은 감사를 표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어떻게 영환계로 갈지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져 있었다.
“뭘요. 저희야 받은 대가만큼 일했을 뿐입니다. 그저 나중에 또 정보가 필요할 때 잊지 말고 저희를 찾아와 주시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웃으며 얘기하는 중년인에게 방반이 막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허리에서 금빛이 일정한 박자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중년인은 바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별실 주위에는 금제가 펼쳐져 있으니, 방해받을 염려는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말을 마친 중년인이 인사를 하고 별실에서 나가자 방반은 바로 영패를 꺼내더니, 잠시 주저하다 결국 두 눈을 감고 의식을 영패 속으로 들여보냈다.
다음 순간, 방반의 모습을 한 허상이 어느 대전에 나타났다. 별다른 장식물은 없는 곳이었지만 네 벽면에 투각돼 있는 꽃과 새 문양만은 몹시 정교하고 화려했다.
대전 앞쪽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던 궁장 차림 여자는 방반이 나타나자 곧바로 명령했다.
“방반. 요즘 운부계(雲浮界)에 천 년에 한 번 발생한다는 은수(隱獸)의 난이 일어나 성채들이 파괴되고 수십 곳에 달하는 종파가 멸문 당했다고 한다. 당장 운부계로 가 이 일을 처리하고 오라.”
여자의 말에 방반은 얼굴이 굳어진 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사(仙使), 은수의 난을 완전히 수습하는 데엔 적어도 몇 년은 걸릴 겁니다. 속하가 지금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 혹 저 대신 다른 자에게 이 임무를 내려 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다른 자들은 전부 각자의 임무 때문에 바쁘다. 너만 지난번 임무를 완수한 이후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느냐.”
“선사, 하지만…….”
“방반. 설마 네 직분과 선궁의 규칙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는 뭔가 변명해보려 했지만 여인이 바로 말을 잘라 버리자 결국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방반, 명을 받드옵니다.”
영패에서 의식을 회수한 방반은 어두운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놈, 제법 운이 좋구나. 오냐, 몇 년은 더 살게 해주마!”
* * *
3년 후, 경원관.
깊은 밤이었지만 구궁봉은 은빛에 휩싸여 대낮처럼 밝았다.
또한 구궁봉 정상의 취성대는 굵은 은백색 빛의 기둥 7개와 성광지력이 모여 만들어진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어, 밖에서 봤을 땐 결코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은 담장이 취성대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듯 보였다.
취성대의 꼭대기에는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전신은 별빛에 흠뻑 젖어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립의 흉복부에는 6개의 푸른빛이 국자 모양으로 떠올라 반짝이고 있었으며, 그 끝에선 7번째 빛이 아직 약하긴 해도 제법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한립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법결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취성대를 덮고 있던 빛들도 순식간에 사라졌고 사방에서는 성월보경(星月寶鏡) 7개가 한립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예전에 동인악과의 싸움이 끝난 후, 그 기이한 공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원래 갖고 있던 성월보경들을 자폭시켰던 한립은 그 뒤 천귀종에서 다시 음진석을 가져와 새로 거울을 제련했다.
한립은 미소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7번째 현규도 머잖아 완성되겠군.”
3년 전, 그 사건 뒤로 소북두성원공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 더 깊어지면서 한립은 현선이란 개념에 대해 좀 더 확실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덕분에, 조만간 진극(眞極)의 몸을 이루고 나서 다시 한 번 황건거인 같은 적을 만나 싸우게 되면 굳이 범성진마공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육신의 힘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한립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호두 크기만 한 황색 콩을 꺼냈다. 바로 황건거인의 가슴에서 뽑아냈던 그 콩이었다.
선계의 어느 신비스런 조직이 자신에게 수배령을 내렸다는 걸 안 뒤부터 한립은 줄곧 수련을 통해 실력을 키우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았었기 때문에, 이 콩을 자세히 살펴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육안으로는 아무리 관찰해도 그저 평범한 콩보다 크기가 크다는 것만 빼면 별로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의식을 콩 속으로 들여보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콩 안은 놀라운 생기를 지닌 청색 빛으로 가득 차 있어서, 꼭 어느 넓고 깊은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보통 물건은 아니었어.”
한립이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 한립은 다른 사람이 이 콩을 이용해 황건거인을 만드는 걸 구경만 했을 뿐 실제 사용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콩에 담긴 생기를 봤을 때 언젠가는 크게 활용할 수 있을 듯했다.
한립은 콩을 다시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취성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때 새까만 하늘 끝에서 밝은 빛 한 줄기가 빠르게 날아와 한립 앞에 떨어졌다.
그 빛의 정체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합산도인이었는데, 그는 한립에게 인사를 올리자마자 다급히 말했다.
“한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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