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4화. 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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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조용해졌던 경원관 경내에 다시 두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덕분에 이제 막 경원관으로 돌아와 아직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던 장로와 제자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그저 폭발음이 울린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제로 이곳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경원관이 자리하고 있던 산맥은 거의 3분의 1이 파괴됐고, 태상대장로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경원관의 제자들은 이젠 정말 더 이상은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대략 반 시진쯤 후, 경원관 깊은 곳의 어느 산 정상에 뚱뚱하고 늘씬한 두 개의 신형이 내려서더니 곧장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전 가운데에는 위에 복잡한 진법 문양이 새겨져 있는 옥단(玉壇)이 놓여 있었다.
“이게 천귀종과 이어져 있는 전송진이란 말이지?”
한립의 물음에 합산도인이 즉각 대답했다.
“예. 흑명봉(黑暝峰)과 연결돼 있습니다. 천귀종의 중심 구역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산문 안쪽이긴 하지요.”
“좋소. 그럼 같이 다녀오도록 합시다.”
“예!”
곧이어 둘이 함께 진법에 들어서자 눈부신 흰빛이 피어올라 순식간에 두 사람을 덮었다.
* * *
천귀종, 제유봉(祭幽峰).
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어느 대전의 상좌에는 붉은 비단 도포를 걸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과 병약해 보일 만큼 흰 피부를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꽤 온화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의 그 섬세한 얼굴은 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중년인은 의자 팔걸이를 꽉 잡은 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혼전(司魂殿)에 있던 두 태상대장로의 혼패가 부서진 지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소. 게다가 어떻게 연락해 봐도 아무 대답이 없으니…….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상좌의 아래쪽에는 십여 명의 합체기 고수가 앉아 있었지만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전 안에는 무거운 적막만 가득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구불구불한 수염을 가진 어느 거한이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말했다.
“종주님, 그저 혼패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는지요. 동(童) 대장로께서는 영환계 제일 수사이신데 이 세계의 누가 감히 그분께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분명 혼패의 문제일 겁니다.”
대전은 거한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조금 소란스러웠는데, 그때 붉은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일어나 반문했다.
“부(付) 장로. 혼패는 수사의 혼과 정혈에다 현묘한 제련 비술이 보태져 만들어지오. 수만 년 동안 한 번이라도 혼패에서 문제가 발견됐던 적이 있었소?”
거한은 뭔가 반박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혼패에도 문제가 있을 리 없지만, 그건 두 분 태상대장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럼 혹시 두 분께서 어떤 특수한 진법에 갇히는 바람에 혼패와의 연계가 끊어진 게 아닐는지요?”
장로들 중 곱사등이 노인이 나서서 말하자 짧은 자색 수염의 중년인도 일어나 상좌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종주님, 실제 상황이 어떻든 두 분과 모두 연락이 끊긴 이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종내 모든 방어 금제를 발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상계의 어르신께도 말씀을 올려야겠지요.”
종주는 미간을 잡고 있던 손을 떼며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그럼 금제를 발동시키는 일은 노 장로 그대에게 맡기겠소. 어르신께는 내가…….”
콰아아앙!
종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굉음이 울리며 대전 전체가 흔들렸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가 일제히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대전 밖 하늘에는 저 먼 곳까지 뒤덮고 있는 흑색 빛의 장막이 나타나 있었는데, 바로 천귀종의 호종대진(護宗大陣)이었다.
빛의 장막이 보호하고 있는 수십 개의 산은 모두 풍음산맥 안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구역으로, 천귀종의 중요한 장소들은 거의 다 이 산들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빛의 장막이 지금,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마구 떨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런 장막 밖에서는 황금빛 털을 가진 거원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장막을 향해 막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콰앙! 쾅!
두 번의 굉음이 울렸다.
거원의 주먹 아래 빛의 장막은 격하게 떨렸고, 주먹이 가격한 곳은 움푹 꺼져 버렸다.
“저놈은 대체 뭐지? 어떻게 저런 힘을……!”
“말로만 듣던 산악거원하고 꽤 비슷한 것 같긴 한데. 설마 진짜 그 산악거원은 아닐 테지?”
“어쨌든 감히 이 천귀종에 와서 행패를 부린 이상, 반드시 그 대가는 치르게 해야 할 것이오!”
대전에서 날아 나간 천귀종 수사들은 산악거원을 보고 처음에는 좀 놀랐다가도 곧 저마다 법보를 꺼냈다.
자색 수염을 가진 노 장로 역시 막 몸을 날리려 했지만, 두 눈에 갑자기 의아한 빛이 스치나 싶더니 곧 걸음을 멈췄다.
노 장로처럼 공격을 중지한 사람은 천귀종 종주를 제외하면 곱사등이 노인과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 그리고 외눈박이 거한뿐이었다.
이 네 명은 바로 저번에 마염곡에서 한립을 협공했던 자들로, 다들 자리에 멈춰 선 채 서로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천귀종의 각 산에서는 수많은 둔광과 함께 거의 모든 장로와 제자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서는 근처의 산꼭대기나 광장 등에 내려서서 이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산악거원은 몰려드는 사람들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서 아까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빛의 장막에 주먹을 꽂았다.
쩌쩌쩌쩍.
주먹이 꽂힌 장막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지더니 결국 동그란 구멍이 나고 말았다.
그 구멍을 통해 장막 안으로 들어간 거원은 허공에 도도하게 멈춰 섰고, 제유봉 대전에서 뛰쳐나온 장로들은 그런 거원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그중 맨 앞에 있던 부(付) 장로는 온몸에 붉은 안개를 휘감더니 금세 혈갑을 두른 거귀(巨鬼)로 변해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도끼날이 가르고 지나온 허공 양쪽에는 핏빛 소용돌이들이 만들어졌는데, 그 속에는 주위 모든 것을 도끼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흡인력이 담겨 있었다.
이 혈갑 거귀의 뒤를 이어 색도 모양도 제각각인 법보들이 검은 안개를 동반하거나, 피의 파도를 일으키며 산악거원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하늘은 서늘한 노호와 짙은 피비린내, 괴이한 귀곡성 등으로 가득 찼으며 기온까지 확 내려갔다.
하지만 산악거원은 코웃음을 치며 한 팔을 높이 치켜들더니 손바닥으로 아래쪽 공간을 확 내리쳤다.
퍼허어어어억!
공기가 마치 파도처럼 거칠게 일어났다가 거대한 벽이 덮치듯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이 광경을 본 혈갑 거귀는 자신의 도끼로 맞섰지만,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그 기세에 몸이 뭉개지면서 결국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뒤이어 다가오던 또 다른 수사의 혈무 역시 강한 압력에 의해 흩어졌고 혈무 속에 숨어 있던 해골과 혈환(血環) 같은 법보들마저 폭죽처럼 터졌다.
사방에서는 연달아 비명 소리와 함께 본명법보들이 파괴됐으며 여러 수사들이 선혈을 토하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은 공격을 펼칠 엄두도 못 낸 채 허둥지둥 뒤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던 중 산악거원이 허공에서 근처의 산으로 꼭 운석처럼 강하게 내려서자 지면이 떨리며 먼지가 피어올랐고 단번에 산이 절반이나 붕괴됐다. 산 속에서는 비명들과 함께 순식간에 수백 가닥의 빛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때, 어지럽게 흩날리는 먼지와 핏빛 안개 속에서 손가락 길이의 원영 하나도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원영은 아까 혈갑 거귀로 변했던 부 장로였는데, 다만 지금은 완전히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저 멀리 도망치려는 듯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원영 바로 앞에 뚱뚱한 신형이 나타났다. 바로 합산도인이었다. 무표정하게 내리치는 합산도인의 손 아래, 원영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제유봉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천귀종 종주는 방금 전 장로들이 거원의 손짓 한 번에 목숨을 잃은 걸로도 모자라 합산도인까지 나타나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합산 선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종주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묻자 그에게 다가온 합산도인이 먼 곳의 거원을 흘긋 보고는 말했다.
“석(石) 종주, 솔직히 말하겠소. 귀종의 두 분 태상대장로는 한 선배님 손에 죽었다오. 천귀종은, 이제 끝난 거요.”
합산도인의 말에, 노 장로 등 네 명은 참담한 표정이 됐다.
안 그래도 방금 전 거원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낀 참이었는데, 거기다 합산도인의 말까지 듣고 나자 저 흉포한 거원이 바로 한립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천귀종이 끝장날 거란 합산도인의 말도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노 장로는 길게 탄식하더니 석 종주에게 전음으로 뭔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 종주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국 허공의 합산도인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천귀종의 멸문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저희 역시 헛되이 죽기보다 이대로 투항해서 한 선배님께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 싶습니다.”
“클클클. 한 선배님께 충성을 바치는 건 우리 경원관 하나면 족하오. 여러분들은 그저 한 선배님의 분노나 잘 견뎌 보시구려.”
합산도인은 잔인한 미소를 띠며 대꾸하고는 복숭아나무로 만들어진 검을 꺼냈다.
이 목검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금세 거대한 빛의 검으로 변하더니 표면에 수많은 부적문을 휘감고서 석 종주 등에게 날아들었다.
검이 지나간 곳 허공에는 칠흑 같이 새카만 궤적이 생겼다.
석 종주 등은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깜짝 놀라, 온갖 방어 법보들을 꺼내면서 다급히 몸을 피했다.
한편, 방금 전 이들이 대화하는 사이 산악거원은 다시 몸을 날려 어느 거대한 산에 나타나서는 두 주먹으로 암벽을 세게 쳤다.
쿵! 쿵!
균열이 생긴 암벽은 얼마 못 가 무너졌고,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먼지가 꿈틀거리며 피어올랐다.
곧이어 먼지 속에서 갑자기 신형 하나가 튀어나와 허공에 멈춰 섰는데, 그 정체는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립이었다.
한립은 천귀종 장로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는 모습과, 저 먼 제유봉에서 합산도인이 여유 있게 종주 및 몇몇 수사들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을 흘긋 보더니 은빛 불덩어리를 뱉었다.
그 불덩어리는 곧 팔뚝만 한 길이의 불새로 변했다가 다시 한립의 조종에 따라 몸집을 키워 건물들이 밀집돼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콰콰콰쾅!
거대한 불새가 몸으로 부딪치고 지나가자 건물들은 순식간에 붕괴되면서 화르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천귀종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한립은 이번엔 또 다른 산으로 날아갔다.
사실 한립은 합산도인에게서 천귀종의 중요한 장소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냈었는데, 지금 그가 향하고 있는 장유봉은 장경각이라든가 단약 및 무기 보관고 같은 건물들이 위치해 있는 천귀종의 가장 핵심적인 곳이었다.
한립이 그곳으로 가는 이유야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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