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3화. 투항자
*
청란이 탈출 방법을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알 수 없는 힘이 밀려들었다.
‘위쪽이다!’
청란은 바로 그 힘의 정체를 눈치 챘다. 청란의 위쪽에서는 하늘까지 가릴 정도로 커다란 손바닥이 나타나 어느새 머리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의 주름까지 보일 만큼 가까이 접근한 그 손은 곧 다섯 손가락을 힘껏 오므렸다.
이에 청란의 모습을 하고 있던 한립은 곧 전신에 황금빛 털이 돋아 있는 산악거원으로 변했다.
콰악!
한립이 다시 산악거원으로 변한 순간 거대한 손바닥이 그를 움켜쥐었다. 몸을 압박하는 그 거력에 산악거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손바닥은 당장이라도 몸을 찌그러뜨릴 듯한 기세로 산악거원을 조였지만 그래도 다행히 육신이 강한 덕분에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정염지화(精炎之火)도 아무 소용없다니…….’
방금 전 황색 실들을 녹였던 은빛 화염이 거대 손바닥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자 산악거원도 내심 놀랐다.
그때 사방을 뒤덮었던 구름이 양쪽으로 밀려나면서 산악거원을 움켜쥔 채 흉악하게 웃고 있는 황건거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곧이어 거인의 가슴 부분에서 예의 그 황색 빛이 몇 번 깜박거리자 구름 한 덩어리가 잘린 팔의 단면으로 몰려들어 단단히 응집되더니 곧 새로운 팔을 형성했다.
거인은 새로 만들어진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꽉 쥔 주먹을 산악거원의 머리 쪽으로 내리쳤다.
주먹에서 풍기는 기세에 산악거원도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육신이 강하다 해도 저렇게 거대한 주먹이 머리를 가격하면 죽지는 않아도 중상은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수밖에 없겠군!’
한립이 뭔가 결심한 듯 속으로 법결을 운용하자 전신에 자색 빛이 번쩍였다.
쐐액!
있는 힘껏 주먹을 내리치던 거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거인의 왼쪽 주먹은 산악거원의 머리를 산산조각 내기는커녕 손을 관통해 지나간 자색 빛 때문에 구멍이 뚫렸으며, 산악거원을 잡고 있던 나머지 손도 다섯 손가락이 꼭 부러진 것처럼 손등 쪽으로 접혀 있었다.
거인의 손을 뚫고 나간 자색 빛줄기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서고 나자 그 속에서 거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전과는 달리 순금 빛깔 비늘로 덮여 있는 이 거원의 머리엔 청색 뿔이 한 개 돋아 있었고, 어깨 양쪽과 옆구리에는 각각 거원의 머리 두 개와 털이 북슬북슬한 긴 팔 네 개가 자라나 있었다.
한립이 자신의 비장의 무기인 열반성체를 시전한 것이다!
황건거인은 이 육비거원(六臂巨猿)을 보더니 일단 부상당한 두 손부터 원래대로 회복시킨 뒤 다시 굳은 얼굴로 정신을 집중했다.
곧 거인의 주먹 위로 황색 빛과 함께 커다란 부적문 몇 개가 나와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주먹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주먹이 단숨에 두 배로 커지면서 활화산 같은 힘이 그 속에 차올랐다. 아직 공격이 펼쳐진 건 아니었지만, 주먹에서 뿜어지는 기세만으로도 사방의 공기가 덜덜 떨렸다.
육비거원은 이 광경을 보고도 기세 좋게 포효하며 곧장 황건거인에게 다가가 두 주먹을 날렸다.
황건거인 역시 전혀 물러서지 않고 주먹으로 맞섰다.
쿠우우우우웅!
주먹 네 개가 충돌하며 주위 공간이 출렁거렸다!
상대의 주먹과 부딪치고도 육비거원은 멀쩡했지만 황건거인은 휘청휘청 저 뒤로 날아갔다. 거기다 황건거인의 두 주먹의 살점은 뭉개져 있었고 양팔 역시 부러져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황건거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멀리 날아가 어느 산 암벽에 쾅 부딪쳤다.
쿠르르르르릉!
암벽은 물론 산 전체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고도 황건거인의 몸은 계속해서 뒤로 날아가다가, 산을 연이어 몇 개나 무너뜨린 후에야 겨우 멈춰섰다.
그러나 바로 그때, 육비거원이 다시 황건거인 앞에 나타났다.
황건거인은 깜짝 놀라 서둘러 가슴에서 황색 빛을 내뿜어 부러진 두 팔과 주먹을 회복시키고는, 육비거원의 허리를 향해 오른쪽 다리를 힘껏 휘둘렀다. 다리가 지나가는 곳에는 광풍까지 일었다.
육비거원은 가볍게 그 발길을 피하고는 곧장 황건거인에게 달려들어 허리 가장 아래쪽에 돋은 두 팔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놀란 황건거인은 두 팔을 들어 마구 저항했지만, 육비거원은 이번엔 중간의 두 팔로 그런 거인의 팔을 잡아 다시 꺾어 버렸다. 그리고 강철로 만들어진 듯 금속광택을 빛내는 가장 위쪽의 두 팔로는 거인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푸욱!
육비거원의 두 팔이 거인의 몸을 관통한 채 그 속을 거칠게 휘젓자 황건거인의 움직임은 그대로 멈춰졌고,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상처가 회복되던 것도 중단됐다.
황건거인의 얼굴에 어려 있던 누르스름한 사람 얼굴의 허상은 분노의 빛을 띤 채로 흩어져 사라졌다.
뒤이어 육비거원은 황건거인의 가슴에 꽂혀 있던 팔을 빼냈는데, 그 손에는 빛을 발하고 있는 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육비거원의 팔이 빠져나간 순간 황건거인의 몸을 덮었던 빛도 완전히 사라졌고, 비틀비틀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의 피부에는 곧 무수히 많은 균열이 생겨났다.
결국 산산이 부서져 버린 황건거인의 몸은 황색 연기로 변해 바람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육비거원의 기세도 확 줄어들더니 몸에 빛이 번쩍인 순간 거원은 극도로 창백한 얼굴을 한 한립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서둘러 운학초를 꺼내 삼킨 후에야 한립의 안색은 겨우 조금 좋아졌다. 한립은 눈앞에서 점점 옅어지고 있는 황색 연기를 보며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건거인의 법술은 알지 못해도 그 육신의 강함과 거력이 소위 현선에 비해서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립도 열반성체를 시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 신통을 펼치는 데에는 강인한 육신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법력도 필요했기 때문에 현재 한립의 법력 수준으로는 길게 유지하는게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행히 소북두성원공 제6단계를 대성한 후, 본래 대량의 천지영기를 흡수해야 되찾을 수 있었던 오장단원공의 묘용 역시 조금은 회복되어 한립은 그의 오장육부에도 약간의 법력을 저장할 수 있게 됐다.
거기다 한립은 경원관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 채고는 손해를 감수하고 지니고 있던 운학초 대부분을 다 먹어 치워 간신히 이 정도의 시간을 버텼던 것이다.
그러고도 한립이 발휘할 수 있었던 위력은 절정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황건거인의 반응이 느렸던 덕에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만약 황건거인이 한립이 변신하는 걸 보자마자 바로 도망쳐 약간만이라도 시간을 끌었다면 지금 시체가 되어 있는 건 바로 한립이었을 것이다.
운학초의 기운이 계속해서 법력으로 전환됨에 따라 빠르게 기운을 회복한 한립은 쥐고 있던 콩을 보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쓱 챙겨 넣었다.
* * *
선계, 흑수성 내성(内城).
골염 노조와 정명노조는 나란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누런 얼굴의 골염 노조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누구라도 잡아다 씹어 먹을 것처럼 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명노조도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다가 한참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한립은 정체가 뭐기에 내 영영검부(靈嬰劍符)로도 놈을 어쩌지 못하더니 수사까지…….”
정명노조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탄식하자 옆에 있던 골염 노조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건도장(黄巾道將)까지 이용하고도 적선(謫仙) 하나 꺾지 못할 줄은 몰랐군!”
이번에 골염 노조는 기껏 애써서 공간통로를 열어 모두(母豆:어미콩)까지 내려 보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콩과의 연계가 끊기고 말았었다.
“보아하니 십방루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준 게 아니라면, 한립이 무슨 기연을 얻어 원래의 실력을 회복한 게 분명한 것 같소. 어쨌든, 이젠 하계에 있는 우리 두 종문이 오히려 곤란해지게 됐으니 빨리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오.”
정명노조의 말에 골염 노조는 더욱 음산해진 눈빛으로 다짐했다.
“두고 보시오. 난 결코 이대로 곱게 물러서진 않을 것이오!”
* * *
영환계, 경원관.
합산도인은 무표정하게 다가오는 한립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금제만 아니었어도 합산도인은 진작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니 그보다도 빨리 도망쳤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야 멍하니 기다리는 것 외에 뭘 더 할 수 있었겠는가.
한립은 합산도인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그를 쳐다보더니 그의 미간 쪽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한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후배도 그저 명령대로 행동한 것뿐입니다. 진짜 저도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합산도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명령? 누구의 명령을 받았단 것이요?”
한립이 잠시 손을 멈추고 빙긋 웃으며 묻자 합산도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냉큼 대답했다.
“선계 조사(祖師)님의 명이었습니다! 조사님의 명이 아니었다면 후배가 어찌 감히 선배님께 죄를 지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경원관의 조사가 왜 그런 명을 내렸단 말이오. 그가 날 어찌 알고?”
합산도인은 눈알을 굴리며 서둘러 대답을 생각해 냈다.
“그건……. 조사님 말씀에 의하면 선계의 어느 비밀스런 조직이 선배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답니다. 그 대가는 저 같은 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고요. 그래서 수배령에 대해 알게 된 천귀종의 골염 노조가 저희 조사님을 꾀어 이런 몹쓸 짓을 벌이게 된 겁니다.”
“몹쓸 짓? 말은 참 잘하는구려. 골염 노조가 알고 있는 수배령을 경원관 조사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되오?”
한립의 냉소에 합산도인은 얼굴이 굳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변명했다.
“어, 어쩌면 두 어르신께서 같이 계획을 세우신 걸 수도 있습니다. 후배로서는 세부적인 사정까지야 알 수가 없어서 그만……. 아무튼 후배는 정말 선배와 맞서고 싶지 않았으나 어르신께서 그렇게 명하시니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립은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립이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자 합산도인은 그가 자신을 죽일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란 생각에 덜덜 떨며 다시 애원했다.
“이 합산, 아까는 정말이지 선배님의 위용에 진심으로 넋을 잃을 뻔했습니다! 앞으로는 선배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수련에 필요한 재료와 단약도 모두 바치고자 하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경원관의 모두가 선배님을 받들 것이며 어떤 명령도 달게 완수할…….”
한립은 황당한 눈으로 합산도인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날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제법 시세를 아는 자였군.”
사실 한립은 그 성격상 당연히 상대의 목숨 따위는 남겨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채 추혼술을 펼치기도 전에 합산도인이 알아서 술술 사정을 털어놓은 데다 이젠 자신을 주인으로까지 모시겠다고 하니, 꽤 번거로움을 덜게 된 셈이었다.
어차피 한립 역시 고작 이 영환계에서 큰 풍파를 일으킬 마음은 없었다. 거기다 저 합산도인을 보노라니 어쩐지 예전의 손이구 생각도 떠올랐다.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합산도인은 한립이 딱히 거절하지 않자 그가 태도를 바꾸기 전에 냉큼 감사 인사부터 올렸다.
“난 남의 것을 뺏는 데엔 별 관심이 없소. 경원관도 마찬가지지. 앞으로는 그저 그대가 내 분부에 따라 일만 좀 처리해 주면 되오. 하지만 그 전에, 금제부터 펼쳐놔야 안심이 되겠지.”
말을 마친 한립은 한쪽 손바닥을 세우고 다섯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빛을 방출했다.
꼭 수초처럼 허공에서 너울거리던 빛들은 한립이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자 갑자기 철사보다도 더 꼿꼿해졌다.
이를 본 합산도인은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지만 그래도 애써 얌전한 태도를 보였다.
한립은 만족한 표정으로 그 다섯 가닥의 빛을 합산도인의 머릿속으로 날려 보냈다.
빛이 몸속에 들어온 순간 합산도인은 날카로운 침에 찔린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저항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 냈다. 한립은 아까 합산도인의 몸에 펼쳐 뒀던 은빛 화염을 회수하며 천천히 말했다.
“방금 그건 내 의식의 일부요. 이미 그대 신혼(神魂)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니, 앞으로 그대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 즉시 혼백이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오.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이 후배, 앞으로 성실히 선배님을 모실 것입니다!”
이제야 겨우 땅에서 일어난 합산도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 말은 필요 없소. 그보다, 경원관에는 선계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있소?”
“경천봉(敬天峰)과 외산봉(隗山峰)에 하나씩 있는데,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합산도인은 주저 없이 대답하고는 한립을 안내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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