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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82화 (1,239/2,000)

1482화. 천외비두(天外飛豆)

*

눈에 푸른빛을 반짝이며 달 표면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던 산악거원은 홀연히 합산도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바닥에는 강력한 흡인력이 생성돼 있었다.

“사, 살려 주…….”

애원을 마치기도 전에 합산도인은 그 흡인력에 의해 산악거원의 손 쪽으로 끌려갔다.

합산도인을 붙잡은 산악거원은 은빛 불새를 방출해 밧줄 형태로 바꿔서는 합산도인의 몸을 칭칭 묶었다. 그런 후엔 합산도인을 한쪽으로 내던지고 다시 소용돌이를 바라봤는데, 그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바닥에 거칠게 팽개쳐진 합산도인은 눈앞에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았지만 밧줄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화염의 힘에 바짝 겁을 먹고는 혹시라도 산악거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그저 얌전히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은빛 거대한 달 표면의 소용돌이는 어느새 처음의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소용돌이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반투명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벽이 나타나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꼭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희뿌연 빛이 비쳐 보였다.

그 순간, 그 반투명 벽이 마치 반대편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받힌 것처럼 번뜩 빛났다.

쩌쩌쩌쩍!

은빛 달이 진동하더니 소용돌이 속 벽의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

휘익.

갈라진 틈 사이에서 눈부신 황색 빛줄기가 빠르게 날아 나왔다. 벽에 생겼던 균열은 금세 다시 봉합됐고, 곧이어 소용돌이가 축소되면서 벽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저건…….’

산악거원으로 변한 한립이 두 눈에 푸른빛을 띠우자 황색 빛줄기에 감싸인 물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 물체는 단인리의 호리병에서 나왔던 콩과 상당히 흡사한 모양이었지만 크기는 훨씬 컸으며 표면에 수많은 부적문이 새겨져 있었다.

황색 콩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자 부적문들도 떠올라 콩의 주위를 함께 맴돌았고, 그에 따라 안개가 자욱하게 방출돼 주위를 반짝이는 금빛으로 물들였다. 꼭 허공에 황금 연못이 생겨난 듯한 모습이었다.

쩍.

곧이어 콩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마치 싹이 움트는 것처럼 머리와 사지가 자라나면서 콩 자체의 크기도 급속히 커졌다.

1장, 10장, 50장, 100장…….

원래 호두만 한 크기였던 콩은 잠깐 사이에 200장도 넘는 거인으로 변했으며 그 전신에는 거인이 내뿜는 금빛이 두껍게 휘감겨 있었다.

이 거인은 예전의 황건도병처럼 상반신을 드러낸 채 허리에 노란 헝겊을 두르고 있었지만 그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근육이 두드러져 보이는 그의 팔다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사람에게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뒤이어 달의 표면이 다시 한 번 흔들리더니 이번엔 단인리의 호리병에서 나왔던 것과 같은 콩들이 튀어나와 마치 폭우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이 콩들은 거인의 몸 주위에 휘감겨 있는 금빛에 닿는 순간 신비한 흡인력에 의해 그의 몸으로 빨려들어 갔다.

콩이 한 알씩 흡수될 때마다 거인의 몸집은 점점 더 커졌다.

결국 만 개도 넘는 콩이 거인에게 흡수되고 나자 거인은 지면에선 머리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거대해졌다.

우뚝 솟아 있는 뭇 산들조차 거인의 옆에서는 앙증맞아 보일 정도였다.

거인에게서는 형언할 수 없이 강력한 기운이 발산돼 사방으로 뻗어 갔다.

“저, 저게 대체 뭐야?”

“아까는 웬 커다란 원숭이가 나타나더니 이번엔 또 무슨…….”

“우리끼리 떠들어 봐야 뭐 할 텐가. 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경원관 제자들이 거인의 모습을 보고는 앞 다퉈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주위 상공에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날아가는 빛줄기들이 어지럽게 그려졌다.

반면에 비교적 대담한 자들의 수도 적지는 않았다. 멀리서 보는 것쯤이야 괜찮을 거라 여기고는 도망치지 않고 구경하는 자들도 꽤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연허기나 합체기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달이 빠르게 축소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운 은빛을 띤 원반으로 변했다.

이 원반은 마치 하늘에 붙어 있던 그림이 벗겨지듯 떨어져서는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괴한 달이 사라진 덕분에, 한동안 빛을 잃었던 별들도 겨우 되살아나 다시 반짝거렸다.

이런 기이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산악거원은 시종일관 거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립은 거인으로 변한 콩이 분명 선계의 천귀 노조와 관련돼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한립이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거인의 얼굴에 파문이 일더니 낯빛이 누런 누군가의 얼굴 허상이 나타났다.

거인은 산악거원을 차갑게 노려보다 곧장 다가와 황색 주먹을 휘둘렀다.

파문이 거친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주위 산봉우리의 나무들이 포말 같이 부서져 흩어졌다.

산악거원은 곧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그래도 그의 크기는 거인의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양팔에 은빛 주술문자가 가득 떠올라 진법을 이루자 팔 전체에 가공할 힘이 차올랐다.

포효와 함께 산악거원의 주먹도 똑같이 날아갔다. 그의 팔에선 은빛 가득한 회오리바람이 빠른 속도로 휘돌며 주먹과 함께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 차이를 보이는 두 개의 주먹이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아앙!

각각의 주먹에서 일어난 황색과 은색 빛이 충돌한 순간 강렬한 폭발이 일어나, 근처 공간마저 일그러졌다.

산악거원의 몸은 팔의 은빛이 산산이 부서짐과 동시에 저 뒤로 나가떨어져, 작은 산을 연이어 서너 개나 부수고 어느 거대한 산 암벽에 푹 박힌 뒤에야 겨우 멈춰졌다.

산악거원에 부딪힌 산은 심하게 떨렸으며 숱한 암벽 파편이 비 오듯 떨어졌다. 산에 있던 전각 같은 건 그 충격으로 단번에 허물어져 버렸다.

하지만 정작 산악거원은 몸에 상처 하나 없이 그 푹 꺼진 암벽에서 날아 나왔다. 다만 그의 눈동자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지금은 법력이 약해 산악거원의 힘을 제대로 다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 점을 빼놓고 보더라도 거인의 힘은 한립조차 만만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쿠우우웅!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는 거인이 다시 돌진해 오려는 듯 발을 세차게 굴러 큰 굉음이 일었다.

뒤이어 거인의 무릎이 살짝 내려앉음과 동시에 몸이 약간 굽은 그 다음 순간.

쐐애애애애액!

하늘로 몸을 날렸던 거인은 이내 유성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산악거원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커다란 두 손을 내뻗었다.

산악거원은 그 속도에 살짝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몸에 푸른빛을 띠워 청색 깃털을 지닌 새로 변했다. 머리에 관을 이고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이 새는, 말할 것도 없이 청란이었다.

청란은 두 날개를 활짝 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거인의 두 손이 청란이 원래 있던 허공을 가로질러 뒤쪽 암벽에 가 꽂히자, 이미 산악거원의 충돌로 인해 약해져 있던 산은 허리 부분이 꺾여 뒤로 넘어가 버렸다.

절단된 산이 또 다른 산들로 기울어져 쓰러지면서 사방에는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렸다.

파앗!

거인의 뒤쪽에 빛이 번뜩이며 청란의 모습이 나타났다. 청란은 날카로운 발톱 위에 푸른빛을 휘감고서 거인의 등을 매섭게 할퀴었다.

거인의 등에는 기다란 상처가 몇 줄기 났지만 그리 깊지는 않았다. 산보다도 거대한 몸을 가진 거인에게는 가려운 수준이었다.

거인은 바로 몸을 돌리며 청란에게 주먹을 날렸다. 산까지 뒤엎을 듯한 힘이 밀어닥치고, 공기 중에선 폭죽이 연이어 터지는 것 같은 폭발음이 울렸다.

그러나 청란은 침착하게 날개를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바로 다음 순간 거인 머리 쪽에 나타나 사납게 날개를 쳐 댔다.

청란의 날개에서 방출된 수백 개의 깃털은 곧 커다란 청색 풍인으로 변했다. 각 풍인의 가장자리는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며 거인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휘휘휙. 서걱!

거인은 몸에 연이어 상처가 나는 걸 보고는 노기등등해져서 미친 듯이 청란 쪽으로 팔을 휘저었지만, 그의 손에 잡히는 건 청란의 잔영뿐이었다.

그런 거인을 가운데 두고서 청란은 그 주위를 번개처럼 오가며 틈틈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 황건거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력을 갖고 있었지만 방어력은 썩 뛰어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란에 의한 작은 상처들이 계속해서 늘어 갔다.

그런데 그때, 거인의 가슴에서 빛이 번쩍 떠올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거인의 몸에 났던 상처들은 그 황색 빛 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물었다.

이를 본 청란은 잠시 멍해졌지만, 곧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려 거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바람 속성의 공격을 퍼부었다.

거인은 청란의 빠르기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새의 깃털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그저 거인의 그 광기 어린 공격 때문에 애꿎은 주위 산들만 무너지고 짓밟혔을 뿐이었다.

거인의 몸은 어느새 다시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그 가슴에서부터 황색 빛이 발산되면 그 어떤 상처도 순식간에 치유돼 버렸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거인은 청란이 움직이는 궤도를 어느 정도 파악한 듯 점점 예리한 동작으로 청란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거인과 청란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싸워 대는 통에 경원관 안에는 파괴된 산과 전각들의 처참한 잔해가 점점 더 늘어갔다.

주위에서는 비명과 흙먼지가 쉴 새 없이 일어났고, 대담하게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몇몇 고수들도 결국엔 놀란 가슴을 붙잡고서 뿔뿔이 흩어졌다.

땅에 쓰러져 있던 합산도인은 그 기세 높던 자신의 종문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결딴나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백만 년의 노력이 정말 하룻밤 새 끝나 버릴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매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존재를 보는 순간 합산도인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렸다.

황색 빛을 휘감은 거대한 손바닥이 흐릿한 청영(青影)을 향해 내리쳐졌지만, 청영은 믿기지 않는 속도로 가늘어져 손바닥을 스치듯 피해 갔다.

퍼어어어억!

큰 손바닥은 태산압정(泰山壓頂)처럼 똑바로 어느 산봉우리 위에 내리꽂혔고, 손에 맞은 산은 진흙 덩이처럼 힘없이 짓뭉개졌다.

청영은 순식간에 그 손바닥의 주인인 황건거인의 등 뒤로 날아갔다.

청영의 머리 위 볏이 크게 번뜩이자 청영 주위에 눈부신 빛이 일어나더니 곧 날카로운 발톱으로 모여들었다.

뒤이어 발톱에서는 강하게 응집된 빛줄기 수십 가닥이 발출돼 청색 그물을 형성했다.

그물은 거인의 오른팔을 향해 뻗어 갔고, 그물이 지나가는 곳의 허공에는 꼭 무수한 검기에 베인 것처럼 가로세로로 교차된 칠흑색 흔적이 생겨났다.

거인은 바로 그물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카아앙!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울리더니 그물과 거인의 오른팔이 닿은 부분마다 청색과 황색 빛이 대결이라도 벌이듯 번쩍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색 빛은 얼마 못 버티고 흐려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촤악!

결국 빛을 잃은 거인의 팔을 그물이 관통하고 지나가자 팔은 두부처럼 잘려졌다.

청영, 즉 한립이 화한 청란의 눈에 희색이 떠올랐지만 그 기쁨의 빛은 금세 사라졌다.

잘려진 거인 팔에서 영문(靈紋)이 빛나더니 곧이어 현황(玄黄) 빛깔의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안개는 곧 저 아득한 곳까지 덮을 만큼 거대한 구름 덩어리로 변했다.

청란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몸을 돌려 날아가기 시작했지만 워낙 커다란 구름이 순식간에 생성됐기 때문에 결국 그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구름 속에서는 어쩐지 공기가 온몸을 죄는 듯해 움직임도 더뎌졌다.

쉬쉬쉬쉭.

구름 안쪽에서 갑자기 황색 실들이 날아와 청란의 몸을 칭칭 묶었다.

청란이 거칠게 날갯짓을 했지만 황색 실은 끊기기는커녕 오히려 부적문들을 발출했다. 그러자 주위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며 청란은 커다란 산에 짓눌린 것처럼 몸을 살짝 비트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청란은 전신에 은빛 화염을 일으켜 황색 실들을 녹여 버렸다.

하지만 또다시 사방에서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실들이 날아와 청란을 단단히 묶었다. 그래도 그 과정 속에서 청란은 아주 조금이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틈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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