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1화. 은월(銀月)의 변화
*
쌔액!
자폭으로 인해 일어난 검은빛 속에서 손가락만 한 원영이 휙 튀어나오더니 금세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원영이 호체영광(護體靈光)을 번쩍이며 다시 도망치려던 순간, 뇌구가 터지며 은빛 태양이 만들어졌다.
태양을 이루고 있는 번개가 급격하게 사방으로 퍼지면서 순식간에 거대해진 태양은 동인악의 원영까지 그대로 삼켜 버렸다.
휙.
태양으로부터 뭔가가 튀어나와 위쪽의 뇌붕에게로 날아갔다.
잠시 후, 무섭게 작열하던 태양이 서서히 사라졌고 동인악의 흔적 역시 깨끗이 지워졌다.
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뇌붕이 있던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한립이 나타났다.
한립의 손에는 방금 전 동인악에게서 거둔 붉은색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승리하긴 했지만 연이은 격전으로 한립의 얼굴도 창백해져 있었으며, 법력 역시 거의 바닥나 있었다.
한립은 붉은색 자루를 거둬들이고는 천 년 수령의 운학초를 꺼내 먹은 후, 하늘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일곱 줄기의 검은빛까지 날려 보냈는데, 그 정체는 바로 음진석으로 제련한 성월보경 7개였다.
성월보경들은 하늘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한립이 다시 성월보경들을 향해 법결을 운용하자 성월보경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반짝이는 별빛을 뿜어냈다. 별빛 속에선 수많은 부적문들이 춤추고 있었다.
법결의 변화에 따라 성월보경은 점점 강하게 진동하면서 그만큼 더 밝은 빛을 내뿜었다.
“폭(爆)!”
한립의 주문이 떨어지자 성월보경들은 일제히 터져서 7개의 거대한 빛 덩어리로 변했다.
한립의 두 손이 빠르게 수결을 맺자 그 빛 덩어리들은 금세 응집돼 별의 허상을 이루었다. 거울로 구성돼 있던 허공의 북두칠성이 이젠 진짜 별로 이뤄져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또 한 번 법결을 바꾸었다. 그러자 7개의 별이 발산하는 빛이 서로 연결돼 진법을 만들었다.
한립은 이번엔 상당히 기이한 수결을 맺었다.
쩌어억!
진법이 꼭 거대한 두 손이 잡아당긴 것처럼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렇게 생긴 틈새 사이로는 짙은 어둠의 빛이 새어 나왔지만, 그 어둠 가장 깊은 곳에서는 밝은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 * *
경원관 취성대 상공의 거대한 달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그 중간 어딘가에 갑자기 생겨난 공간균열 속에서 청색 신형이 날아 나왔다. 바로 한립이었다.
신비한 공간 밖으로 나오는 덴 성공했지만, 이곳에는 취성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금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알록달록한 빛의 장막이 아직도 사방을 덮고 있었고, 아까 도망쳤던 합산도인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빛의 장막 한쪽으로 날아가 연거푸 주먹을 내질렀다. 장막에는 금세 구멍이 뚫렸고, 한립은 아주 쉽게 장막 밖으로 나왔다.
장막 밖의 경원관은 안쪽에서의 소동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모습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펼쳐 사방을 살피며 차가운 눈으로 저 먼 경천봉을 돌아봤다.
한립이 곧장 그리로 날아가려던 순간, 돌연 경천봉 주위의 지면이 들썩이더니 수십 개의 황색 빛의 기둥이 솟아 나왔다.
각 기둥들은 장정 열 명이 팔을 뻗어도 다 못 안을 정도로 굵었으며 그 높이는 구름까지 뚫을 정도였다.
기둥에 가득한 영문(靈紋)에서는 강력한 영력 파동이 일고 있었다.
뒤이어 기둥들이 일제히 번쩍이며 안개 같은 노란빛을 발산하자 빛들은 서로 연결돼 두꺼운 장막을 형성했다. 꼭 거대한 황색 구름이 경천봉을 뒤덮은 듯한 모습이었다.
경천봉 대전 안.
대전 안에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3층짜리 옥단(玉壇)이 설치돼 있었는데, 가장 아래쪽 단은 수십 명이 나란히 앉아도 될 정도로 넓었지만 꼭대기 단은 그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에 불과했으며 윗면에는 부적문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옥단 주위에는 황색 옥기둥 수십 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표면에도 부적문이 빼곡했다.
합산도인은 바로 이 옥단의 꼭대기 층에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합산도인이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수결을 맺자 옥단과 주위 옥기둥이 일제히 번쩍이며 바깥의 대진과 호응하기 시작했다.
옥단 2층에서는 경원관의 합체기 수사 여덟 명도 똑같이 가부좌하고서 주문을 외워 법력을 옥단으로 주입시키고 있었다.
그 무렵 경천봉 밖.
푸른빛 한 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대진 앞에 멈춰 섰다. 빛이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산 전체를 덮고 있는 빛의 장막을 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투두둑.
근육이 팽창하는 소리와 함께 한립의 몸집이 급격히 커졌으며 피부에는 금색 털이 돋아났다. 한립이 다시 한 번 산악거원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다.
산악거원이 맹렬하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자 거친 기운이 폭발하듯 퍼져 나가, 가까이 있던 대진도 그 영향으로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천봉 대전 안에서 빛의 장막 너머로 그 광경을 본 합산도인은 깜짝 놀라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지만, 곧 주위 옥기둥 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허공의 몇 개 지점을 가리키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옥기둥 표면의 빛이 한층 강하게 일어났고, 그에 맞춰 경천봉을 덮고 있던 빛의 장막도 두꺼워졌다.
산악거원은 긴 포효와 함께 금색 털이 북슬북슬한 주먹을 매섭게 뻗었다. 눈부신 금빛을 번뜩이는 주먹의 기세 때문에 그 주위엔 회오리바람까지 일었다.
주먹이 빛의 장막을 가격한 순간.
쿠우우우우우웅!
땅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주먹과 장막이 부딪친 곳에서는 꼭 두 개의 태양이 충돌한 듯 도저히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 폭발했다.
주먹에 움푹 패인 장막 표면에는 곧 균열이 생겼다가 거미줄처럼 빠르게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경천봉 대전 안.
옥단과 그 주위의 기둥들이 격하게 떨리더니 심지어 단상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균열도 나타났다.
단상 네 곳에 나눠 앉아 있던 합체기 수사들은 저마다 선혈을 토했다. 수사들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경천봉에 배치돼 있는 이 진법은 경원관의 진법종사가 정명노조의 가르침을 받아 장장 백 년이나 공을 들여 만든 것이었는데 방금 전엔 적의 단 일격에 파괴될 뻔했던 것이다.
합산도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명령했다.
“다들 집중하시오!”
합산도인 역시 내심 당황하긴 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는 옥기둥에 정혈을 뿜어 흡수시킨 후 옥단에 법력을 주입했다.
이 모습에 합체기 수사들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 법술을 펼쳤다.
그러자 바깥의 대진을 형성하고 있던 빛의 기둥들이 번쩍 빛나더니 비늘 같은 구름 덩이들을 만들어 장막 표면의 균열을 빠르게 복구하기 시작했다.
산악거원은 냉소하더니 또 한 번 주먹에 금빛을 휘감은 채 장막을 후려쳤다.
쿠우우웅!
주먹은 아까의 공격으로 움푹 꺼졌던 지점에 똑같이 꽂혔고, 그곳에서부터 일어난 공기의 파문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한 광풍처럼 매섭게 퍼져 나갔다.
빛의 장막 위 그 움푹하던 곳은 순식간에 두 배나 더 깊게 꺼졌으며 주위의 균열도 다시 더 깊고 넓게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퍼퍼퍼퍼퍼펑!
마침내 진법 전체가 완전히 붕괴돼 버렸다.
그 충격에 대전 안쪽 역시 맹렬히 흔들렸으며 옥단도 가운데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가 결국 두 쪽으로 갈라졌다.
단상에 앉아 있던 합체기 수사들은 죄다 몸을 부르르 떨다가 옥단 아래로 고꾸라지더니 입에서 몇 번이나 피를 내뿜었다.
합산도인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벌떡 일어섰다.
그때 대전 지붕도 무수한 균열이 생기는가 싶다가 금세 부서졌다. 그러곤 곧 집채만 한 금색 권영(拳影)이 하늘에서 내려와 합산도인에게로 날아들었다.
쉬쉬쉬쉭.
합산도인은 은빛 총채를 꺼내 수많은 은색 실을 방출했다. 그 실들은 곧 엉켜들어 기린의 허상을 이루더니 금색 권영과 맞부딪쳤다.
기린과 권영의 빛이 한데 얽히면서 만들어진 무서운 광풍이 사방을 휘감고 지나갔다.
광풍이 지나간 대전 안은 쑥대밭이 됐으며 합체기 수사들도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로 날려졌지만 서둘러 법보를 꺼내 몸을 보호한 덕분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광풍 속에서는 곧 뚱뚱한 신형이 비틀거리며 튀어나왔다.
바로 합산도인이었다.
손에 들려 있는 총채는 반쪽이 나 있었고 합산도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 수사, 잠, 잠시만…….”
합산도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악거원이 그 앞에 나타나 거대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 위력적인 기세에 합산도인은 다급히 흑색 벼루를 꺼냈다. 표면에 흐르는 영롱한 빛을 봐선 꽤 대단한 법보인 듯했다.
벼루에서는 곧 굵은 빛의 기둥이 튀어나와 산악거원의 손바닥을 막았다.
그 틈에 합산도인은 저 멀리 도망치며 백옥 여의(如意)까지 방출했다.
산악거원은 빛의 기둥에 막힌 손에 한층 더 힘을 가했고 손바닥에는 금세 금색 주술문자가 떠올랐다.
산악거원의 손바닥은 방금 전보다 두세 배나 강해진 힘으로 빛의 기둥을 부수고는 벼루까지 꽉 움켜쥐었다.
퍼억.
벼루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박살났다. 산악거원은 다시 합산도인의 뒤를 바짝 쫒아가, 금색 주술문자가 번쩍이는 손을 내뻗었다.
이에 맞서 합산도인도 갑자기 몸을 돌려서 백옥 여의를 홱 던졌다.
적색, 황색, 남색 빛이 어우러져 감돌고 있는 여의의 표면에서는 곧 그 세 가지 색이 섞인 영염(靈焰)이 솟구쳐 오르더니 삼색 봉황의 모습으로 변해 거원의 주먹에 맞섰다.
봉황의 몸에서 일어나는 빛은 주위의 모든 것을 퇴색시킬 정도로 눈부셨다.
콰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발생한 굉음이 경원관 전체에 울려 퍼지면서, 제자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각자 머물고 있던 건물에서 쏟아져 나와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이때 하늘의 한쪽은 산악거원의 황금빛으로, 다른 한쪽은 봉황의 적, 황, 남 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산악거원과 봉황이 서로 공격을 주고받자 뇌성 같은 굉음은 계속됐고 경천봉을 비롯해 저 아득한 곳의 땅까지 심하게 흔들렸다.
공중에는 회오리바람마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 회오리바람 때문에 나무들은 뿌리째 뽑혔고, 일부 거석들도 휩쓸려 날아갔다. 심지어 지면은 바람에 의해 통째로 한 겹이 깎여 나간 듯 낮아졌다.
언뜻 팽팽한 듯했던 이 싸움에서, 하늘을 반씩 차지하고 있던 두 빛의 영역 중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구역이 어느새 커지더니 곧 삼색 구역을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삼색 봉황은 비명과 함께 파괴돼 흩어졌다. 합산도인 역시 그 충격으로 몸이 날아갔고 손에 들고 있던 여의 또한 깨져 버렸다.
맹렬하게 날아간 합산도인의 몸은 어느 산 암벽에 쾅 부딪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하늘에 떠올라 있던 산악거원이 합산도인 앞 지면에 내려서자 두 발이 땅에 깊게 박히며 사방으로 돌의 파편이 튀었다.
산악거원의 차가운 금빛 눈이 땅 위의 비대한 몸뚱이를 내려다봤다.
“한 수사. 아, 아니 한 선배님. 부디 제 해명부터 들어 주십시오. 절대 선배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산악거원이 당장 살초를 펴진 않자 합산도인은 그 틈을 타 다급히 애원했다.
이 순간 합산도인의 마음속은 후회로 가득했다. 동천(洞天)의 공간에서 탈출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말고 경원관을 떠나야 했다는 후회였다. 그랬다면 혹시 살아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저 먼 곳에서 몇 번이나 연속으로 굉음이 울린 것이다. 소리가 나는 방향은 취성대 쪽이었다.
산악거원과 합산도인 모두 취성대를 돌아봤지만, 왠지 합산도인의 눈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취성대 근처에서는 그 주위의 산 여덟 개가 흔들거리고 있었고, 폭발하듯 무너져 내린 산꼭대기에서는 원래 위쪽으로 솟아 있던 빛의 기둥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자 취성대 주변을 뒤덮었던 빛의 장막 역시 깨져 버렸다.
하지만 하늘의 거대한 달은 사라지기는커녕 태양보다 더 눈부신 빛을 발하며 요동쳤다. 그곳에서부터 밀려 내려온 무형의 파문 때문에 공기는 거칠게 진동했고 나무들도 차례로 꺾였다.
곧이어 달의 표면에서 발산되던 빛이 한곳으로 모아지더니, 갑자기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했다.
소용돌이로부터 퍼져 나가는 힘에 의해 주변 구역은 때론 붉게, 때론 푸르게, 여러 가지 색으로 번갈아 물들었고 심지어는 그 색들이 서로 얽혀 번쩍이기도 했다.
경원관 제자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그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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