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0화. 백목천귀(百目天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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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소?”
동인악의 재촉에 합산도인은 수결을 멈추지 않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내가 저자를 막을 테니 서두르시오!”
동인악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서 걸치고 있던 도포를 찢어 상반신을 드러냈다. 여위어 가는 그의 가슴에는 암홍색 귀물 모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쉼 없이 명멸하는 혈광을 발하고 있어서 꼭 광포한 생물이 거칠게 몸부림치는 듯 보였다.
귀물은 당장이라도 동인악의 가슴에서 튀어나갈 것 같았지만 귀물의 몸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백색의 뭔가가 그런 귀물들의 움직임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동인악은 먼저 수결을 맺은 뒤 손가락으로 백색 물체들을 빠르게 눌렀다.
그러자 그 물체들이 위치해 있는 각 지점 위로 빛과 함께 부적문들이 떠오르더니 동인악의 가슴에서 허연 뼈 못 13개가 튀어나왔다.
뼈 못이 빠지고 나자 귀물은 마침내 굴레에서 벗어나 기쁨에 차 포효했다.
그리고 동인악의 가슴에서는 혈광이 터져 나와 그의 몸을 뒤덮는 핏빛 기둥 10여 개를 만들었다.
무서운 힘이 출렁이는 혈광 속에서 동인악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투두둑.
동인악의 몸에서 꼭 살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동인악은 몸집이 급격히 팽창해 순식간에 흉물스러운 거대한 귀물로 변했다.
이 귀물은 예전에 단인리가 불러냈던 적혈천귀와 언뜻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엄염히 전혀 다른 천귀로 적혈천귀보다 훨씬 가공할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귀물의 피부에는 흑색과 적색으로 이뤄진 신비한 문양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의 가슴과 팔, 다리, 심지어 발등에까지 눈동자가 가득 박힌 채 쉼 없이 깜박이고 있어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눈들 중에서 특히 귀물의 미간에 세로로 난 눈은 그 아래쪽 양옆의 눈에까지 닿을 만큼 유난히 커서 더욱 섬뜩해 보였다. 다만 다른 눈들과 달리 이 눈의 눈꺼풀만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백목천귀가 모습을 드러내자 무서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주위 공간에 파동까지 일었다. 바로 이때, 은빛 번개가 번쩍였다.
드디어 합산도인 등 두 사람 가까이에 번쩍 나타난 뇌붕은 백목천귀를 보고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곧 피부에 무수히 많은 번개들을 휘감고서 천귀에게 날아갔다.
쐐액 쐑!
뇌붕의 두 발에서 갈고리 모양과 똑같이 생긴 번개가 방출돼 백목천귀의 머리로 날아들었지만, 백목천귀는 두려운 기색 없이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몸에 돋아 있던 눈들 중 거의 절반이 일제히 번쩍이며 검은빛을 방출했다.
수십 가닥의 이 빛줄기들은 서로 얽히더니 거대한 새 발 모양의 번개 앞에 그물을 만들었다.
그물과 번개가 부딪힌 순간 흐릿한 법칙의 파동이 그물에서 뿜어져 나왔고, 새 발 모양 번개가 원래의 자리에서 사라져 멀리 떨어진 허공에서 나타났다.
콰콰콰쾅!
번개는 백목천귀에 닿지도 못하고, 강제로 이동된 채 폭발해 버렸다.
“……!”
흠칫 놀란 뇌붕이 다시 날개를 펄럭이자 뇌붕의 날개에서 방출된 반달 모양의 번개가 백목천귀의 양쪽에서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백목천귀의 몸에 난 눈들이 번뜩이며 검은빛을 내뿜어 그 반달 모양 번개에 응수했다.
법칙의 파동이 또 한 번 일어나면서 반달 모양 번개는 역시나 원래의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저 멀리에서 나타나 번개끼리 부딪혀 박살났다.
근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합산도인의 얼굴에 그제야 희색이 번졌다.
뇌붕과 백목천귀가 싸우는 사이, 허공에 나타났던 흐릿한 문양도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뇌붕은 그런 합산도인의 상황은 무시한 채 날개를 접고 백목천귀에게 말했다.
“이 영환계에서 공간의 힘을 활용하는 자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역시 영환계 제일 수사라 불릴 만 하오.”
“한 수사, 사실 우리가 무슨 큰 원한으로 얽힌 사이도 아닌데 굳이 생사를 걸고 싸울 필요가 있겠소. 나 역시 상계(上界) 어르신의 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나섰던 것뿐이오. 단인리도 죽였으니 수사도 웬만큼 분을 푸신 셈 아니오. 만약 수사가 끝까지 영환계를 엉망으로 만든다면 상계의 어른들께서도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백목천귀가 반은 위협, 반은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뇌붕은 냉소했다.
“역시 이 일은 두 종문의 노조와 관련돼 있었던 거로군. 하지만 그자들은 저 먼 선계에 있는데,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어떻게 간섭할 수 있겠소?”
“끝까지 해 보자는……!”
백목천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뇌붕은 전신에 번갯불을 일으켜 두 발끝을 모으더니 커다란 번개의 그물을 만들었다.
그와 함꼐 뇌붕이 신비한 부적들을 방출해 그물 속으로 주입시키자 그물 위에서 번쩍이던 번갯불들이 터지면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분출돼 뇌구(雷球) 두 개로 응집됐다.
표면에 은색 부적문이 가득한 뇌구는 살아 있는 듯 날뛰는 번개 가닥들을 휘감은 채 엄청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바로 제뢰술(祭雷術)이 펼쳐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사용된 건 뇌붕이 갖고 있는 힘이었기 때문에, 한립이 예전에 벽사신뢰로 만들었던 뇌주와는 완전히 다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본 백목천귀는 백여 개의 눈을 전부 동시에 번쩍였는데, 그 사이 뇌붕이 던진 은빛 뇌구 두 개도 쏜살같이 날아와 백목천귀 앞에서 폭발했다.
콰콰콰콰쾅!
허공에 은색 번개로 이뤄진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났다. 태양에서는 무수한 번개 가닥들과 함께 파멸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백목천귀는 한립의 이번 일격이 위력적일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 엄청난 광경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얼굴이 굳어졌다.
이에 백목천귀의 몸에 난 눈들이 눈가가 찢어질 만큼 크게 뜨더니 눈동자에서 검은빛이 방출됐다.
쌔쌔쌔쌕!
아까보다 두 배 가까이 굵어진 검은 빛줄기들은 거대한 그물을 만들었고, 백목천귀의 미간에 난 눈도 갑자기 눈을 떠 먹처럼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쌔액!
세로 눈에서도 굵은 검은빛이 튀어나가 그물에 녹아들었다. 그물은 곧 번쩍이더니 장막의 형태로 변해 백목천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쌌다.
쾅! 쾅!
두 개의 태양이 세차게 돌진해 와 검은빛의 장막을 내리쳤다. 이에 맞서 장막에서는 강렬한 법칙의 파동이 일어났다.
그 탓에 태양을 형성하고 있던 번개의 절반이 갑자기 얼어붙은 듯 응고됐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굉음과 함께 장막을 밀어냈다.
장막은 거칠게 흔들렸지만 그래도 깨지진 않았다.
교착 상태에 접어든 순간, 커다란 포효가 장막 안에서 흘러나오면서 장막이 팽창하더니 그 표면에 수많은 부적문이 떠올랐다.
결국 두 개의 태양이 방금 전의 공격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먼 하늘에서 나타났다.
콰콰콰콰콰쾅!
태양이 터지자 번개 기둥 두 개가 동시에 위아래로 뻗어 위쪽으로는 회색 구름을 뚫고, 아래쪽으로는 커다란 구멍을 내며 땅속 깊이 박혔다.
거대한 힘의 파동이 퍼져 나가면서 사방에는 무서운 회오리바람까지 생겨났다.
그 사이 백목천귀 쪽에서도 검은빛 장막이 결국 깨지면서 그 속에 숨어 있던 천귀의 모습이 드러났다.
백목천귀는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눈꺼풀이 절반쯤 감긴 백여 개의 눈들은 아까보다 흐릿해진 빛을 띠고 있었다.
그 광경에 합산도인은 깜짝 놀랐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공간통로를 여는 주문 역시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합산도인이 계속해서 수결을 맺자 하늘의 흐릿하던 문양이 어느 순간 강렬한 빛을 발했고, 그 빛은 점차 또렷하게 응집되어 은월영공도(銀月映空圖)를 만들었다.
마침내 은월영공도가 완성되자 합산도인은 기쁜 얼굴로 법결을 바꾸면서 은월영공도 속으로 정혈을 내뿜어 흡수시켰다.
이에 은월영공도 속에서 은빛을 띤 안개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와 눈부신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간의 파동이 번지고 굉음이 울리며, 소용돌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그때 백목천귀와 뇌붕의 시선도 그 소용돌이 쪽으로 향해 있었다. 백목천귀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올라 있었고, 뇌붕은 눈동자에 푸른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합산도인은 그들을 흘긋 보더니 꼭 사냥꾼에 쫓기는 토끼처럼 허둥지둥 몸을 돌려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합산도인이 빠져나가자 소용돌이는 금세 거품처럼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공에는 미약한 공간파동만 남았을 뿐이었다.
공간통로가 열리고 다시 닫히기까지 흐른 시간은 고작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쉴 정도에 불과했다.
“합산……!”
백목천귀는 합산도인이 혼자 달아날 뿐만 아니라 공간통로까지 폐쇄하자 분노가 머리까지 어지러워졌다.
반면 뇌붕은 눈동자의 푸른빛을 가라앉힌 뒤 여유롭게 백목천귀를 돌아봤다. 방금 전 뇌붕은 소용돌이가 공간통로를 열기 위해 일으킨 모든 변화를 완벽하게 파악해 냈던 것이다.
“동 수사, 이제 이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구려. 뭐, 이것도 좋겠지. 그럼 우리의 은원부터 먼저 청산해 봅시다.”
말을 마치자마자 뇌붕은 원래의 자리에서 사라졌다.
두려움에 질린 백목천귀는 합산도인에 대한 원망 같은 건 느낄 여유도 없이 서둘러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진득한 느낌의 검은 기운이 그의 몸에서 방출돼 10여 개의 굵은 촉수로 변해 꿈틀거렸다.
그 순간 백목천귀의 뒤쪽에 빛이 번쩍이더니 뇌붕이 나타나 매섭게 발톱을 갈겼다. 하지만 백목천귀의 촉수들 역시 빠르게 반응해서 등 뒤로 날아드는 뇌붕의 몸을 휘감았다.
뇌붕은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곧 전신에서 무수한 부적문을 만들어 냈다.
펑 펑 펑 펑!
부적문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생성된 번개 가닥들은 촉수를 관통하며 수많은 구멍을 만들어 냈고, 결국 조각나 안개로 흩어져 버렸다.
거기다 백목천귀의 등에도 촉수로 막지 못한 번개 가닥들이 떨어지면서 피부의 눈들이 파괴돼 검은 피가 흘렀다.
백목천귀는 신음을 흘리며 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쏜살같이 날아가는 백목천귀의 뒤에서 뇌붕이 또 한 번 은빛 뇌구(雷球) 두 개를 만들었다.
다만 뇌붕은 이번엔 뇌구를 직접 백목천귀 쪽으로 던지는 대신 하늘의 회색 구름으로 날려 보냈다.
뇌구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구름 전체에서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이 울리더니 곧 굵은 번개의 기둥 두 개가 튀어나와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는 백목천귀에게 날아들었다.
백목천귀는 전신의 눈을 억지로 크게 뜨고는 이번에도 공간법칙을 펼치려 했다.
바로 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냉소가 백목천귀의 귀에 울렸다.
그러자 곧 그의 머릿속이 쿵 울리면서 누군가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끄아아아아!”
백목천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두 눈과 입 등에서는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나왔고 전신의 눈에서 방출되던 검은빛도 사라졌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백목천귀의 몸에 마침내 번개의 기둥들까지 떨어졌다.
콰콰콰콰콰쾅!
처절한 비명 속에 백목천귀의 가슴과 복부에 각각 하나씩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백목천귀의 몸은 거의 토막 나기 직전이었고, 두 구멍에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며 튀어나간 살점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스스스스.
결국 백목천귀의 몸이 빠르게 줄어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왜소한 대머리 노인, 즉 동인악의 원래 모습으로 변했다. 동인악의 가슴과 복부에도 큰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채 피를 토하던 동인악은 바로 사나워진 얼굴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동인악의 몸이 빠르게 팽창했다.
“자폭하시겠다?”
허공에 떠있던 뇌붕이 비웃듯 중얼거리며 다시 은빛 뇌구 한 개를 만들어 날렸다.
퍼어어어어엉!
뇌구가 도착하기 전, 동인악이 한발 앞서 자폭에 성공해 격렬한 파동이 일어나자 뇌구가 날아오던 속도도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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