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7화. 살두성병(撒豆成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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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번엔 의식을 회색 구름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나 의식은 구름 속에 들어가자마자 막혔고, 다시 연신술까지 펼쳐 봐도 별다른 수확은 거둘 수 없었다.
구름이 어떤 괴이한 힘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한립의 강한 의식조차 도저히 구름 속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한립이 의식을 회수하고 다른 방법을 동원하려던 순간, 갑자기 구름이 격하게 들끓더니 콰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금색 빛줄기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려 부풀어 올라 황금빛 거한으로 변했다.
이 거한들은 보통 사람보다 큰 체격에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금색 피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허리에는 황색 헝겊을 두른 채 다양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피부색만 빼면 언뜻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이들에게서는 생기라곤 한 올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괴뢰(傀儡)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천 명 가까이로 불어난 거한들은 한립 주위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이 갑작스런 광경에 한립도 조금 멍한 모습이었다.
황건역사들은 손에 도(刀), 검(劍), 창(槍), 부(斧) 등의 병기들을 들고 땅에 착지하자마자 민첩하게 뛰어올라 새처럼 허공을 날거나 혹은 대지가 울릴 정도로 힘차게 땅을 구르며 한립에게 돌진했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밀려드는 무서운 기세에도 한립은 제자리에 선 채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촤촤촤촤!
황건역사 한 명이 다른 자들보다 한발 앞서 나오며 장창을 현란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한립은 눈앞에 펼쳐진 장창의 잔영 속으로 오히려 한 발짝 들어서더니 한 손으로 장창을 잡아챘다.
그 순간, 거친 힘이 팔을 타고 밀려오는 바람에 한립은 저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금세 다시 균형을 잡긴 했지만 한립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황건역사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하지만 한립은 장창을 쥔 손을 뒤쪽으로 확 빼서 황건역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다른 손으로 그자의 가슴을 가격했다.
퍼억!
역사는 들고 있던 장창을 한립에게 빼앗긴 채 나머지 무리 쪽으로 나가떨어져서, 잇따라 수십 명이나 되는 황건역사들까지 덩달아 밀려나게 만든 후에야 겨우 몸이 멈춰졌다.
곧장 다시 일어난 역사의 가슴에는 움푹하게 주먹 자국이 나 있었다. 방금 전보다 움직임이 좀 둔해지긴 했지만 이 역사는 다시 한 번 다른 역사들과 함께 한립에게로 돌진했다.
한립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주먹에 웬만한 산까지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실었는 데도 황건역사 한 명조차 죽이지 못한 것이다.
황건역사들은 순식간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한립은 다시 냉정해진 얼굴로 발을 내딛더니 빙그르르 회전하면서 두 주먹을 맹렬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권영(拳影)은 빈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촘촘하게 사방으로 뻗어 갔다.
쿵! 쿵!
황건역사들은 잇따라 가슴에 깊은 주먹 자국이 패인 채 날아갔고, 뒤쪽 다른 역사들과 충돌해 함께 쓰러졌다. 덕분에 숨을 돌릴 틈 없이 밀려들던 공세도 조금은 약해졌다.
하지만 넘어졌던 황건역사들은 바로 벌떡 일어나서 다시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한립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몸을 날려, 방금 전 주먹을 날린 역사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가슴에 난 주먹 자국을 향해 또 한 번 주먹을 날렸다.
쩌쩌쩍!
역사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피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균열 속에서는 점점 더 강한 금빛이 새어 나왔으며,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폭발해 황색 안개로 변해 흩어졌다.
한립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 황건역사들은 몸이 단단하긴 해도 때려죽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주위에서 다시 황건역사들이 물밀듯이 몰려오자 한립은 근육을 한층 부풀려 흐릿한 잔영을 남기며 사라졌다.
퍽! 퍽퍽!
황건역사 일고여덟 명이 잇따라 나가떨어지면서 그대로 몸이 폭발했다.
한립의 두 주먹이 지나가는 곳에선 빈틈없이 권영이 생겼으며 공기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뒤따랐다. 그와 함께 한립을 둘러싸고 있던 황건역사들은 연이어 몸이 부서져 안개로 사라져 버렸다.
역사들의 몸이 아무리 강해도 소북두성원공의 힘에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 * *
선계,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검은 바다.
먹빛 안개가 자욱한 허공에 거대한 흑색 성채가 위엄 있게 떠 있었다.
그곳은 어느 번화한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성채의 북문에는 고풍스런 서체로 ‘흑수성(黑水城)’이라고 쓰여 있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성채를 빙 두르고 있는 성곽은 커다란 흑색 돌들로 쌓여 있었는데 간혹 햇빛을 받을 때면 수정 같은 빛을 반사하곤 했다. 그리고 성곽 안쪽에는 평범한 세속 도시처럼 강과 밭, 숲 등은 물론 거리를 거니는 수많은 행인들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성의 중심부로 갈수록 점점 지대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건물들의 수도 많아지고, 그 규모도 웅장해진다는 것이다.
이 성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는 내성(內城)이 위치해 있었는데, 흑색 강물에 의해 바깥의 다른 건물들과 뚜렷하게 구분돼 있었다.
내성 안에는 정교한 정자와 누각, 물길을 따라 난 회랑, 정원 등이 적절히 배치돼 있었으며 그 중심 구역의 넓은 기단 위에는 3층 높이의 겹처마 누각이 서 있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이 누각은 위쪽의 주홍색 두공(枓栱)들 위에 유리와 황색 기와로 만들어진 지붕이 얹혀 있는 데다 그 꼭대기엔 용봉 조각까지 자리하고 있어 무척이나 화려했다.
누각의 꼭대기에 난 창문들은 전부 활짝 열려 있는 상태로 내성의 풍경뿐만 아니라 성채 밖의 바다까지도 한눈에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각의 화려한 외곽과 달리 이 실내에는 그저 간단하게 네모난 다탁(茶卓) 하나와 양쪽으로 원형 비단 방석만이 놓여 있었다.
다탁 위에 놓여 있는 암홍색 향로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라 실내 가득 퍼져 나갔다.
다탁 오른쪽에서는 머리에 연화관(蓮花冠)을 쓴 마른 체구의 노인이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푸른 빛깔을 띤 차는 비록 그 향기가 향로의 단향보다 못했지만, 일단 입에 머금고 나자 풍부한 영기와 함께 지극히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감탄한 듯 말했다.
“골염 수사의 이 흑수영차(黑水靈茶)는 역시 명불허전이구려.”
그러자 누런 얼굴에 초췌한 모습의 골염노조가 담담하게 말했다.
“과찬이시오. 정명 수사께서 그리 마음에 들어 하시니 가실 때 조금 선물해 드리도록 하리다.”
“그동안 하계의 일로 서로 소원하긴 했으나, 이번 일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쭉 협력해서 함께 힘을 키워 나가도 좋을 것 같소.”
정명노조의 얘기에 골염노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립을 잡게 되면 그자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계속 힘을 모아야 할 것이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대체 그자의 정체가 뭔지 혹 뭣 좀 알아내신 것이 있소?”
“저번에 수사와 연락을 주고받은 후 나도 나름대로의 경로를 통해 알아봤지만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했소. 수사는 어떻소?”
“나도 비슷하오. 십방루(十方樓) 쪽에서 얻은 정보는 너무 제한적이라, 그저 청부인의 신분이 만만치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 자세한 내막은 전혀 알아낼 수 없었소이다.”
정명노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지만 골염노조는 오히려 빙긋 미소 지었다.
“한립이란 자에게 점점 더 흥미가 생기는구려. 아무래도 그자를 잡고 나면 제대로 고문해 봐야겠소.”
“하하! 수사께서 그리 자신하시는 걸 보니 제자들에게 특별한 법보라도 지원해 주신 모양이구려.”
“그건 수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소만.”
골염노조의 눈빛이 약간 매서워졌지만 정명노조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만에 하나의 실패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 아니겠소.”
골염노조는 정명노조가 자세히 설명하기 싫은 듯 말을 얼버무리자 굳이 더 캐묻는 대신 자신이 마련해 뒀던 비장의 수단을 털어놓았다.
“흠. 실은 예전에 운 좋게 병두(兵豆)를 좀 심은 적이 있었소. 보름 전에야 도병(道兵)으로 성장했는데, 때맞춰 잘됐다 싶어 하사해 주었지.”
정명노조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도병이라니…. 정말 수사께서 기연을 얻으셨구려.”
“별것 아니오. 그래 봤자 하품 도병인 황건도병(黄巾道兵)이라, 언급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라오.”
골염노조는 대단치 않다는 듯 손을 저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범한 법보와는 비할 바가 아니지 않소. 그럼 한립이 제아무리 뛰어난 재간을 가졌어도 잡혀 오는 건 시간문제겠소.”
정명노조가 여전히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추켜세우자 골염노조의 미소도 더 환해졌다. 그때 정명노조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한립은 어쨌든 냉염종의 외문장로 아니오. 혹시 냉염 그놈이 끼어들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닐지?”
“멸문당하고 싶으면 어디 맘대로 해보라고 하시오. 우리 두 종문이 손을 잡았는데 겁날 게 뭐 있겠소.”
골염노조의 냉소에, 정명노조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동천지보(洞天之寶)로 만들어진 기이한 공간 위에 동인악, 합산도인, 단인리가 서 있었다. 그리고 단인리가 손에 황색 호리병을 든 채 뭔가를 중얼거리자 어린애 키만큼 큰 호리병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떠올랐다.
주둥이 쪽에는 호리병 몸체의 글자와 유사한 부적문들이 신비한 기운과 함께 휘몰아쳤다.
단인리의 주문이 이어지는 동안 황금색 안개가 피어오른 호리병 주둥이에선 노란 콩 같은 것들이 잇따라 튀어나와 줄줄이 아래쪽으로 날아갔다.
이 콩들이 회색 구름에 닿자 콩 위쪽에 아주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났는데, 콩들은 그 소용돌이를 흔적도 없이 빨아들여 삼키고는 다시 구름 아래로 내려갔다.
“살두성병(撒豆成兵)! 말로만 듣던 그 선술(仙術)을 펼치실 줄이야!”
합산도인이 단인리를 보며 감탄하자 동인악이 대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과연 식견이 남다르시군. 하지만 이런 선가의 비술을 우리 정도의 경지로 어찌 완벽히 펼칠 수 있겠소. 그저 노조께서 하사하신 저 선보(仙寶) 덕분에 겨우 도병들을 불러내고 있는 것뿐이라오.”
“그랬군요. 한립은 워낙 육신이 강해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상대하기가 힘들지요. 저 황건도병으로 먼저 힘을 빼 놓으면 한결 일이 수월해질 겁니다.”
합산도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지만 동인악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건 합산 수사의 동천지보(洞天之寶)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일 뿐이오. 계획의 첫 단계는 성공했지만 정말 저자를 없애려면 우리 셋이 함께 출수해야 할 거요.”
“대충 때가 된 것 같으니, 합산 수사께서도 다음 계획을 시작해 보시지요.”
주문을 멈춘 단인리까지 돌아보자 합산도인은 곧장 계란 크기의 은색 구슬을 꺼냈다.
세 사람 앞에서 빙글빙글 돌던 구슬이 갑자기 퍽 터지자 은빛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커다란 거울로 응집되었다. 흐릿하던 거울에는 금세 어떤 장면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 장면을 본 순간 세 사람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거울 속에는 황건도병들이 하늘에서 내려가 키 큰 청년을 에워싸고 돌진하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청년은 그저 간결한 동작으로 주먹을 날렸을 뿐이지만 주위의 황건도병들은 주먹에 맞자마자 허수아비처럼 휙휙 날아가 몸이 터져 버렸다. 그렇게 70~80명에 달하는 황건도병이 순식간에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고도 청년은 이깟 황건도병을 없애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청년의 모습을 비추던 거울이 일그러지더니 곧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단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고, 동인악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건도병들은 무슨 공법 같은 걸 익힌 건 아니지만 그 육신의 강함만큼은 고계 역수에 비할 만하오. 나라도 저렇게 많은 수의 황건도병은 쉬이 상대하지 못할 텐데, 한립은 저리 쉽게 없애 버리다니…. 아무래도 우리가 저자를 얕잡아 본 것 같소.”
“설마 그새 부상이 다 나은 건가…?”
합산도인이 거칠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그건 아닐 것이오. 그렇게 쉽게 나을 부상이었다면 왜 굳이 선계를 떠났겠소.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이젠 우리 셋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겠군.”
동인악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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