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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76화 (1,233/2,000)
  • 1476화. 동천(洞天)의 공간

    *

    늦은 밤.

    경원관 안의 모든 건물들이 고요한 밤빛에 물들어 있는 가운데, 오직 구궁봉 정상만이 대낮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한립 주위로 이어져 있던 굵은 빛의 기둥 6개가 어느 순간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점점의 은빛으로 변해 흩어져 갔다.

    취성대는 꼭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진 그 은빛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취성대 꼭대기에 가부좌를 하고 있던 한립의 피부에선 빛이 흘렀고, 뚜렷한 굴곡을 이루고 있는 근육에선 금속광택 같은 은빛이 윤기 나게 반짝여서 꼭 근육 하나하나가 진짜 금속처럼 강인해진 모습이었다.

    또한 한립의 흉복부에서는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푸른색 빛점들이 쉼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새 거의 다 흩어진 빛의 기둥들에서 검은빛 여섯 줄기가 날아 나왔다.

    검은빛의 정체는 손바닥 크기의 흑색 거울이었는데, 이 거울들은 곧장 한립의 몸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한참 뒤, 한립은 천천히 눈을 뜨며 긴 숨을 내쉬었다. 취성대와 성월보경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북두성원공 제6단계까지 대성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았군.”

    한립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쿠웅!

    굉음과 함께 취성대 전체가 흔들렸고 한립도 몸을 휘청거렸다. 무심코 내디뎠던 한립의 발은 바닥에 종아리 절반 깊이로 푹 박혀 버렸다.

    이를 본 한립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묘한 표정이 됐다. 제6단계를 대성했다고 해서 이렇게 엄청난 육체의 변화가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뚫린 곳이 별자리 문양이 새겨진 곳이 아니어서 취성대의 작동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자칫 취성대를 망가뜨리기라도 했다면 정말 일이 번거로워졌을 것이다.

    한립이 좀 멋쩍은 듯 코를 긁적거리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는 취성대를 지키던 노인들이 방금 전의 엄청난 진동을 느끼고서 놀란 눈으로 합체기 노인을 돌아봤다.

    흰 수염 노인은 흘긋 위쪽을 올려다보더니 나머지 세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소.”

    한립이 이곳에서 수련을 시작한 뒤로, 흰 수염 노인은 그의 행동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일에는 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엄청난 성광지력에 휩싸이고도 태연하게 수련에 임하는 자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한립을 감시만 할 뿐 직접 접촉하는 건 최대한 피하라는 태상대장로의 명령까지 있었던 터였다.

    한편 취성대 위에선 한립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커다란 회색 방패를 꺼냈다.

    이 방패는 천귀종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표면에 현묘한 부적문이 적잖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는 걸 봐서 분명 낮은 등급은 아닐 듯했다.

    한립은 방패에 약간의 법력을 주입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강화 금제까지 전부 발동시킨 후 양손으로 방패 끝을 잡고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콰득!

    살짝만 힘을 줬을 뿐인데도 방패는 찰흙 덩이처럼 찌그러져 한데 뭉쳐졌다. 이를 본 한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힘과 육신의 강도 모두 예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듯했다.

    한립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북두칠성 문양으로 돌아가 앉았다.

    대략 한 시진쯤 운기조식한 뒤, 한립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입으로는 소북두성원공 제7단계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카만 하늘 속 북두칠성이 갑자기 강한 빛을 발했는데, 주위의 뭇별들과는 완전히 다른 푸른색과 은색이 섞인 빛이었다.

    그 빛이 격하게 점멸하는 사이, 이번에는 밤하늘에서 굵은 빛의 기둥 7개가 취성대로 쇄도해 왔다. 그와 동시에 취성대에 새겨진 모든 별자리 문양들도 일제히 은색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멀리서 보면 취성대가 꼭 은을 녹인 물로 주조돼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콰콰콰쾅!

    빛의 기둥이 취성대에 다다른 순간 구궁봉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탑을 덮었던 은색 빛이 확 일어나서 저번보다 10배는 더 위력적인 소용돌이를 만들었으며, 취성대 위에서 미친 듯이 회전했다.

    원래 취성대를 덮고 있던 보호막은 성광지력이 장막을 뚫고 들어온 순간 산산조각 나서 반딧불 같은 빛점들로 변해 사라졌다.

    급작스러운 파동에 휩쓸린 네 명의 노인들 중 연허기 수사들은 무력하게 멀리까지 날아갔으며, 합체기인 나머지 한 명은 다급히 방어 법보들을 꺼내 겨우 그 충격을 막아냈다.

    멀찍이 떨어진 허공에서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합체기 수사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구궁봉 수백 리 밖 상공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바로 합산도인, 동인악, 단인리였다.

    이들의 시선은 저 멀리 밤하늘을 가르고 구궁봉 위로 내려와 있는 빛의 기둥을 향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는데 산바람만이 이따금 스쳐 지나가며 이들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이 정적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졌다.

    “합산 수사, 이게 수사가 말한 완벽한 계획입니까? 마음껏 수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서 저자가 강해지게 만드는 것이?”

    단인리의 말에 합산도인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무래도 저자는 벌써 부상에서 회복될 방도를 찾은 것 같군요.”

    “이 일은 더 미뤄선 안 될 것 같소.”

    동인악이 차갑게 말하자 합산도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동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원래는 세부적인 계획을 좀 더 다듬으려고 했는데, 보아하니 정말 더는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진작 손을 썼어야 해…….”

    단인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매 속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다음 날 아침.

    냉염종 성화봉, 자색 대나무의 바다에 파묻혀 있는 건물 안.

    사마경명은 단향 향로가 놓여 있는 자단목 탁자 앞에서 벽의 화상을 바라보며 공손한 태도로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상 표면에 빛이 일어나더니 사람 신형이 휙 튀어나와 허공에 섰다. 바로 번쩍이는 눈빛을 가진 냉염노조였다. 냉염노조는 조금 놀란 듯 물었다.

    “한 수사가 벌써 제7단계 수련을 시작했다는 말이냐?”

    “어젯밤에 보고받은 하늘의 기현상을 보면 거의 확실합니다. 어르신, 대체 한 장로의 정체가 뭡니까? 어떻게 그런 빠른 성취가 가능한지….”

    “한 수사의 정체는 나도 모르지만, 최근에 듣자니 선계의 어느 거대한 조직에서 한 수사에 대한 수배령까지 내렸다더구나. 나마저 마음이 흔들릴 만큼 대가도 아주 두둑하고 말이야. 결국 오랫동안 폐관하고 있던 정명까지 얼마 전 골염이 있는 흑수성으로 떠났더군. 아무래도 천귀종과 경원관이 뭔가 일을 벌일 것 같구나.”

    뜻밖의 소식을 들은 사마경명은 조심스럽게 냉염노조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럼, 우리도…….”

    “우리도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자 이거냐?”

    바로 말을 자르고 되묻는 냉염노조의 반응에 사마경명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냉염노조는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명과 골염은 한 수사를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난 그와 손까지 섞어 보지 않았더냐. 한 수사는 결코 그리 쉬운 자가 아니다! 네 얘길 들어 보면 한 수사는 이미 소북두성원공을 제6단계까지 완성한 게 분명하니, 내 추측은 더더욱 확실해진 셈이지. 설사 욕심나는 일이 있더라도 상황은 제대로 살피고 끼어 들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니냐.”

    사마경명은 바로 깍듯하게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어르신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 * *

    깊은 밤, 취성대 꼭대기 층.

    한립은 7개의 빛의 기둥 가운데에 가부좌를 하고 있었고, 기둥으로부터 끊임없이 밀려드는 성광지력이 그의 육신을 단련시켰다.

    겉으론 꼼짝도 하지 않고 수련에 전념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 한립은 속으로 여러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북두성원공 수련 때문에 끌어들인 성광지력으로 취성대의 방어 금제가 깨졌고, 근처를 지키던 네 명의 장로들까지 그 힘에 의해 나가떨어진 뒤론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합산도인이 이에 대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었지만, 한립은 최근 취성대 근처 산봉우리의 경원관 수사들이 잇따라 동부를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수행하는 자들이 임무를 위해 오래 자리를 비우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었지만, 비슷한 일들이 보름 동안이나 이어지자 마침내 한립도 점점 더 경계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방금 전, 한립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결국 성광지력을 끌어당기던 의식 일부를 회수한 뒤 주변 수백 리 안의 모든 것을 빠르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한립의 위쪽 허공이 흐릿해지더니 꼭 하늘을 반쪽으로 가른 것처럼 기다란 균열이 나타나났다.

    촤촤촤촤촥!

    촘촘한 은빛 부적문들이 균열 속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더니 세차게 빙글빙글 돌면서 온 하늘을 은백색으로 물들였다. 이 은백색 빛은 곧 엉켜들어 거대한 달의 형태를 이뤘으며, 주위의 별들마저 퇴색돼 보일 정도로 눈부신 광채를 발산했다.

    이를 본 한립은 곧장 몸을 날려 순식간에 구궁봉에서부터 30리 밖까지 날아갔다.

    그런데 그때 구궁봉에서 수십 리 떨어진 어느 산봉우리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면서 그 안에 숨어 있던 거대한 부적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백색 빛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고, 그와 동시에 다른 쪽 산봉우리도 갑자기 흔들리면서 청색 빛의 기둥을 방출했다.

    쿠아아아아앙!

    이와 같은 일이 여섯 번이나 더 잇따라 일어나, 결국 구궁봉 주위 100리 안의 8개 산봉우리에는 각기 다른 색의 거대한 빛의 기둥이 형성되었다.

    기둥 주위에선 색색의 부적문들이 맴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빛의 장막을 만들어서 구궁봉을 중심으로 100리 범위를 완전히 뒤덮었다.

    빛의 장막에선 부적문들이 끊임없이 흘러 다니며 무서운 영력 파동을 일으켰다. 장막 안에 갇히게 된 한립은 결국 비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경원관이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한테 안 좋은 일을 벌이려는 것만은 분명하군.’

    한립은 푸른빛을 띤 눈동자로 주위를 훑어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거대한 금제는 천귀종의 구대귀왕천주진(九大鬼王天柱陣)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현묘해서, 한립조차 당장은 금제의 약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한립은 곧장 빛의 장막 바로 앞까지 날아가 흉복부에서 6개의 푸른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장막의 어느 지점으로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아아앙!

    경천동지할 굉음을 내며 빛의 장막에 주먹 자국이 생겨 움푹 들어갔다. 그러나 자국 주위에 오색 부적문들이 모여 들더니 조금씩 그 함몰된 부분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리며 똑같은 지점에 주먹이 날아갔다. 빛의 장막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심하게 떨렸다.

    한립이 세 번째 주먹을 날리려던 순간, 하늘에 나타났던 거대한 달이 번쩍이며 수많은 부적문들로 형성된 은색 빛줄기들을 방출했다.

    빛줄기들은 한데 응집돼 빛의 장막이 펼쳐진 곳을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굵은 기둥을 만들었다.

    한립이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그는 어느새 낯선 세상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곳은 광활하고 황량한 암석 사막으로, 어느 방향을 바라봐도 지면 가득 크고 작은 회색 돌들이 박혀 있는 황무지뿐이었다. 곳곳에 운석에 부딪혀 생긴 듯한 커다란 구덩이도 보였다.

    그리고 하늘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게 만드는 두터운 회색 구름이 떠 있었다.

    “또 동천지보(洞天之寶)인가….”

    한립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의식을 방출해 사방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한립의 의식이 닿는 범위 안에는 잡초가 돋은 땅과 움푹 팬 구덩이, 커다란 돌덩어리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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