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75화 (1,232/2,000)

1475화. 수배령

*

반년 후, 경천봉 내의 어느 석실 안.

3층짜리 석단 위에 가부좌한 채 수결과 동시에 주문을 외우던 합산도인이 문득 손을 멈추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기이한 바람 한 줄기가 석실 안을 훑고 지나가자 단상의 등이 잇따라 켜지면서 백색 연기가 피어올라 허공에 한 덩어리의 안개를 만들었다.

안개 표면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연화관(蓮花冠)을 얹은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는데, 노인은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며 금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정명노조(淨明老祖)를 봉영하옵니다.”

합산도인은 피둥피둥한 살이 출렁거릴 만큼 땅에 엎드려 인사 올렸다.

“일어나거라. 오늘 온 것은 몇 가지 시킬 일이 있어서 이니라.”

정명노조의 말에 합산도인은 그제야 일어서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예. 분부 내려 주십시오.”

“지난번에 네가 바쳤던 호원석(昊元石)은 꽤 품질이 괜찮았다. 10년 안에 다시 최대한 더 모아 놓거라.”

“예.”

“그리고 본 좌가 전에 창안했던 ‘참성전현공(參星轉玄功)’에 관해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 공법을 수정했으니 받아서 장경각에 보관해 두거라. 또…….”

정명노조는 계속해서 몇 가지 일을 더 분부한 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으니 잘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합산도인은 한층 더 긴장한 표정으로 정명노조의 분부를 기다렸다. 정명노조는 두 뼘쯤 되는 금종이를 합산도인 앞으로 날려 보내며 말했다.

“이 자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거든 즉시 아뢰거라.”

종이를 받은 합산도인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다. 그 금종이에는 바로 한립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왜, 뭐가 잘못됐느냐?”

정명노조가 담담히 묻자 합산도인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게 아니오라, 이자가…. 이자가 바로 지금 우리 경원관에 와 있는지라….”

“같은 인물인 게 확실한 것이냐?”

정명노조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말은 조금 빨라져 있었다.

“화상 속 인물이 그자에 비해 조금 말라보이긴 하나, 얼굴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확실합니다. 그자입니다!”

“이 자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이냐?”

“용서하십시오. 사실 그자는 냉염종의 장로로서…….”

합산도인은 한립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자세히 얘기했다. 얘기를 다 들은 후에도 정명노조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합산도인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았지만 방해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얌전히 명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잠시 뒤, 정명노조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자는 아마 선계의 적선(謫仙)일 것이다. 선계에서 이자를 찾겠다고 수배령을 내린 자가 있거든. 일단은 본 좌의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타초경사(打草驚蛇)하지 말고 조용히 있거라. 단, 무슨 일이 있어도 이자가 계속 우리 경원관에 머물게 해야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선계의 어느 해역.

이곳의 바닷물은 기이하게도 먹물처럼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으며, 저 수평선까지 이어진 바다 전체에서 거친 파도가 일고 있었다.

바다 위 상공에는 흑색 산이 일백 개 가까이 떠 있었는데, 산 위에는 모두 팔각 거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탑들은 높은 것은 무려 일만 장에 달했으며, 낮은 것은 일백 장밖에 안 될 정도로 높이가 제각각이었지만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새카만 색이었고 팔각 처마를 갖고 있었다.

그중 어느 작은 탑 꼭대기의 대전 안에서는 머리에 연화관을 쓴 노인이 네모난 법단(法壇) 앞에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경원관의 정명노조였다.

법단 위는 진법이 밝은 흰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명노조는 진법의 운행을 멈춘 뒤 꼭 뭔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를 악물더니 손가락 크기의 수정 구슬을 꺼내 눈앞에 띄웠다.

곧이어 법결이 주입된 구슬 둘레에서는 자그마한 부적들이 떠올라 진법을 형성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법은 계속해서 아른거리며 맴돌았지만 1각이 지난 뒤에도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명노조는 초조한 기색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다시 또 반각쯤 흐른 뒤, 마침내 진법이 돌연 밝게 빛나더니 그 위로 소인의 허상이 나타났다. 이 소인은 흑색 도포를 입고 있었고 꼭 말라 죽은 나무처럼 낯빛이 누런 게 중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염 수사, 천년 만에 만나는데도 수사의 풍채는 예전 그대로구려.”

정명노조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서 인사했지만 ‘골염 수사’, 즉 천귀종의 골염노조는 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대꾸했다.

“할 말이 있으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하시오.”

“수사께선 혹시 지금도 흑수성(黑水城)에 계시오? 빈도가 쓸 만한 소식 하나를 들어서 말이오.”

“어디 얘기해 보시오.”

“십방루(十方樓)의 수배령에 대해서는 수사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오.”

“무슨 뜻이오? 혹시 그 쓸 만한 소식이라는 게 수배된 자에 관한 거요?”

골염노조가 드디어 흥미가 생겼는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자, 정명노조도 눈을 날카롭게 번쩍이며 대답했다.

“맞소. 그자가 지금 영환계에 있다고 하오!”

“사실이오?”

골염노조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못 믿겠으면 하계의 제자에게 물어보시구려.”

정명노조의 자신 있어 하는 태도에 골염노조는 눈을 지그시 뜨며 말했다.

“그럼 혹시 내게 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가….”

정명노조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그자가 영환계에 숨어 있는 건 우리한테는 천재일우의 기회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 두 종문이 힘을 합쳐 놈을 잡은 뒤, 십방루(十方樓)로부터 받을 대가를 똑같이 반으로 나눠 갖자는 거요. 어떻소?”

“십방루로부터 수배령이 내려질 정도라면 그자도 보통 실력이 아닐 것이오. 적어도 고작 대승기 수사 두세 명이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테지.”

잠시 침묵하고 있던 골염노조가 신중한 태도로 말하자 정명노조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전혀 없소. 빈도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자는 부상 때문에 실력이 약해져서 그저 평범한 대승기 수사보다 약간 더 강한 정도라고 하니 말이오.”

“그래도 하계의 종문 제자들이 선인을 상대하게 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오. 그보단 그자가 영환계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가 직접 손을 쓰는 게 낫지 않겠소.”

“빈도 생각에 이 일은 되도록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소. 미루다간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까 말이오. 십방루에서 그렇게 높은 대가를 걸었다는 건 그자에게 뭔가 큰 비밀이 있다는 뜻 아니겠소?

그자를 잡으면 뜻밖의 수확까지 덤으로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십방루가 내건 대가만으로도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기엔 충분하고 말이오.”

정명노조의 계속된 설득에 골염노조 역시 마음이 흔들린 듯 눈을 반짝이더니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일단 나도 알아본 뒤 모든 게 다 사실로 확인되면 손을 잡도록 하겠소. 자세한 건 내가 흑수성으로 돌아간 뒤 다시 의논해 정하도록 합시다.”

정명노조는 만족한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훌륭한 판단이시오.”

* * *

며칠 후, 영환계의 경원관 심처에 있는 어느 대전 안.

텅 빈 대전 한가운데에 있는 옥단(玉壇) 위 전송진이 윙윙거리며 움직이더니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옥단 앞에서 합산도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전송진의 빛이 사그라지면서 부적문이 솟구쳐 올라 눈부신 빛과 함께 빙글빙글 춤추기 시작했다.

그 빛 속에서 두 개의 신형이 나타났는데, 곧 빛이 흩어지면서 둘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둘 중 작은 쪽은 흑색 도포를 입고 있는 대머리 노인으로, 약간 등이 굽어 있었고 키가 옆 사람의 어깨 높이에도 미치지 못했다.

노인의 얼굴은 검었으며 전신에서 형용하기 힘든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또 다른 이는 역시나 흑색 도포 차림에 반듯한 외모를 가진 중년인으로 바로 단인리였다. 합산도인은 두 사람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동 수사, 그리고 단 수사. 어서 오십시오. 오래 못 뵀는데도 두 분의 풍채는 여전하십니다그려. 특히 동 수사께선 엄청난 성취를 이루신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대머리 노인은 바로 천귀종의 또 다른 대승기 수사인 동인악(童人堊)으로, 천귀종에서뿐만 아니라 영환계 전체에서도 제일의 수사라고 칭해지는 자였다.

하지만 동인악은 성격이 괴팍해서 평소엔 종문 안에 머무는 법이 없었으며, 그가 대체 어디에서 폐관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인악은 합산도인을 향해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으며, 단인리는 그나마 옅게 미소 지으면서 인사했다.

“합산 수사, 오랜만입니다.”

“여긴 얘기를 나누기 적합지 않으니 편전으로 가시지요.”

합산도인은 환한 웃음과 함께 손짓으로 둘을 청하고는 앞에서 길을 안내해 걸어갔다.

잠시 후 편전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은 동인악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합산 수사, 한립은 지금 어디 있소?”

동인악의 목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지 않은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본종의 취성대에 있습니다. 취성대에 들어간 뒤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는데, 시간을 따져 보니 벌써 반년이나 됐더군요.”

합산도인의 말에 단인리가 신중한 태도로 물었다.

“그 대단한 진선이 취성대를 빌려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요. 혹시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저도 수상하게 여겨 몇 번이나 밤새 관찰해 보기도 하고, 본종의 수사들에게도 호법이란 명분으로 가까이에서 그자를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수련하는 모양새라든가 그로 인한 하늘의 변화 등을 봐서는 아마 성광지력을 빌려야 하는 특수 체련 공법을 수련하느라 그런 것 같았습니다.”

합산도인의 얘기를 들은 단인리는 그제야 좀 이해가 간다는 듯 말했다.

“어쩐지 이상할 만큼 육신이 강하더라니. 사실 그자는 기괴한 비술들까지 펼쳐서 무슨 산악거원이니 청란이니 하는 것들로 화신까지 했었지요. 그런데도 육신을 계속 수련하는 걸 보면 혹 무슨 문제가 생겨 하계로 피한 현선(玄仙)이 아닐는지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저희 조사께서는 그자가 부상과 경계 간 압력으로 인해 실력이 많이 떨어져서, 지금은 그저 반선(半仙) 수준밖에 안 될 거라 하셨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겁니다.”

단인리와 합산도인의 말을 듣던 동인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반선이라도 일반적인 대승기 수사보다는 훨씬 강할 테니 결코 방심해선 안 될 거요.”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흔한 상황은 아닌 데다 워낙 중요한 일이니만큼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겠지요. 제가 두 분을 청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합산도인의 얘기에 동인악이 살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우릴 불렀다는 건 수사께서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뜻 아니겠소. 어디 고견이 있으면 들려주시구려.”

그러자 합산도인이 히죽 웃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사실 졸견이 있긴 합니다만, 영명하신 두 분의 고견에 비할 수야 있겠습니까. 제 계획에 부족한 부분이 있거든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