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74화 (1,231/2,000)
  • 1474화. 취성대(聚星臺)

    *

    고운월은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려 그런 여몽한을 보면서 옅게 미소 지었다.

    “이 사부는 자질이 대단치 않아 특별한 기연이 없는 한 앞으로도 이 정도 경지에 머무는 게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몽한아, 넌 영체를 타고난 데다 오성(悟性)도 뛰어나 입문한 지 두 해 만에 벌써 축기기에 이르지 않았더냐. 별다른 문제만 없다면 분명 이 사부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어쩌면 연허기 이상의 경지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지.”

    “모두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거기다 스승님께선 그 귀한 단약들까지 아낌없이 주지 않으셨습니까. 제자는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다 한 장로 덕분 아니겠느냐. 그 덕에 당분간 단약 재료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고운월은 문득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두 해 동안 이 스승도 한 장로를 한 번 뵈러 간 적이 있긴 했다만. 이젠 한 장로의 동부 일대가 금지로 정해졌으니 앞으로는 쉽게 찾아가지도 못하겠구나.”

    * * *

    얼마 지나지 않아, 냉염종 출운봉에서는 갑자기 산수 한 명을 외문제자로 거두었다.

    그는 자질도 평범했고, 꽤 나이가 있는데도 아직 결단기에 불과해 입문 조건에 전혀 맞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한동안 제자들 사이에 불만이 일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제자가 백석이라는 자로, 한 장로와는 꽤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동은 점차 가라앉았으며, 오히려 다른 산의 장로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또 세월은 얼마쯤 흘러갔다.

    경원관 경천봉에는 비취처럼 푸른 데다 영기도 짙은 연못이 있었는데, 수면 위에 하얀 안개가 자욱했고 그 사이로 종종 금빛 비늘이 반짝이는 잉어가 뛰어올랐다.

    연못가 풀밭에서는 생기 넘치는 학 10여 마리가 목을 맞대고 장난치며 땅 위의 영초를 쪼아 먹으면서 이따금 고개를 들고 즐거운 울음소리를 냈다.

    휘익!

    자색 빛 한 줄기가 하늘에서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연못가로 내려왔다.

    빛이 가라앉고 나자 금관을 쓴 자색 도포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큰 키에 검은색 긴 수염을 휘날리고 있는 모습이 제법 신선다워 보였다.

    옆의 학 무리를 흘긋 본 남자는 이끼가 잔뜩 낀 청흑색 석벽으로 눈을 돌리고는 전음부를 꺼내 석벽을 향해 날려 보냈다.

    잠시 뒤, 석벽에 은은한 금빛 막이 떠오르더니 사람 키만 한 구멍이 나타났다.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그 구멍으로 날아들었다.

    석벽 안쪽엔 상당히 넓은 석실이 펼쳐져 있었다.

    이 석실 가운데에는 각 층마다 현묘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는 3층짜리 석단이 놓여 있었으며, 단상의 수많은 황색 등(燈)으로 이뤄진 대진에서부터 놀라운 영력 파동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석단 꼭대기 층 중앙에는 통이 넓은 황금색 도포를 가슴이 다 드러나도록 헐겁게 걸친 뚱뚱한 남자가 가부좌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꼭 살덩어리로 이뤄진 작은 산처럼 보였다.

    자색 도포 차림의 남자는 이 뚱뚱한 남자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태상대장로님, 오늘 냉염종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 장로라는 자가 우리 경원관의 취성대(聚星臺)를 빌려 수련하고 싶어 한다며, 청을 들어주면 크게 보답하겠다고 했습니다. 뭐라 답을 보내면 좋겠습니까.”

    태상대장로는 자색 도포 남자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전에 한 장로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시킨 일은 어떻게 됐느냐?”

    태상대장로의 낭랑한 목소리가 석실에 메아리쳤다.

    “예. 대강의 조사는 끝났습니다. 그자는 두 해 전에 갑자기 풍국에 나타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냉염종의 외문장로가 됐답니다. 하지만 그동안엔 별다른 이상한 점 없이 조용히 지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냉염종에 심어 둔 간세조차 천귀종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랍니다.”

    “됐다. 사마경명 그 늙은 여우라면 분명 그자에 대한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해 놨겠지. 그럼 요즘 천귀종 쪽 움직임은 어떠하더냐?”

    “그 일이 있은 후 천귀종 제자들은 죽은 듯 지내고 있습니다. 불만을 터뜨린다거나 보복하려는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고요.”

    수하의 보고를 들은 태상대장로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흥, 그 두 노귀의 성질을 내가 모르겠느냐? 둘 다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고야 마는 자들이니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자색 도포 차림의 수하는 조금 주저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취성대를 빌려 달라는 요청에는 뭐라고 답을….”

    “그자는 대승기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 원한을 사 봐야 좋을 게 없으니 일단은 승낙해 주거라.”

    태상대장로의 말에 수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관내의 태상장로 몇 분께선 이 요청에 대해 꽤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혹시라도 그자가 취성대에서 수련한 뒤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라도 하면 우리 경원관이 냉염종에 밀리게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지요. 거기다 취성대를 발동하는 데엔 완성석(浣星石)이 적잖이 소모될 텐데 그걸 우리 제자도 아닌 외인에게 낭비한다는 건 좀….”

    “바보 같은 소리. 대승기에서 다시 그 위 경지로 올라가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라더냐? 흠. 하지만 취성대를 빌려달라고 한 건 그자이니 거기에 필요한 완성석도 그자가 부담해야겠지. 소모되는 완성석은 두 배로 냉염종에다 청구하거라.”

    태상대장로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분부하자 수하는 곧 공손히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두 달 후, 경원관.

    산세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져 있는 푸른 산 위로 구름이 표표히 떠다니고, 구름 사이로는 백학이 우아하게 날아갔다. 누가 봐도 선산복지(仙山福地)다운 모습이었다.

    봉우리들 한가운데에 유독 높은 봉우리 하나가 구름 위로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정상에는 이끼조차 끼지 않은 거대한 돌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영기가 자욱한 거석 중앙엔 백옥으로 조각된 9층짜리 둥근 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탑의 네 방위에는 각각 갈색 도포 차림의 노인이 한 명씩 가부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무는 태양의 빛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가운데 거석에서 반사된 부드러운 주홍색 빛이 백색 탑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그때, 저 멀리서 갑자기 두 줄기 빛이 빠르게 날아왔다. 탑 앞에 착지한 빛이 걷히고 나자 뚱뚱하고 늘씬한 두 개의 신형이 드러났다.

    탑 주위에 앉아 있던 갈색 도포 차림 노인들은 서둘러 일어나더니 뚱뚱한 신형을 향해서 공손히 몸을 굽혔다.

    “태상대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를 마친 노인들은 슬쩍 시선을 돌려 뚱뚱한 남자 옆의 낯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평범한 외모의 남자로, 취성대를 빌려 쓰러 온 한립이었다.

    뚱뚱한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네 노인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는 한립에게 말했다.

    “한 수사, 저들은 취성대의 경계를 맡고 있는 자들로 합체기 수사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 셋은 모두 연허기라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서로 호흡을 맞춰 와서 협공에도 능하니 수사의 호법을 서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요. 그러니 안심하고 수련하도록 하시오.”

    한립은 경원관 사람이 자신을 옆에서 감시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합산(闔山) 수사의 신세를 좀 지도록 하겠소.”

    “하늘의 색을 보니 곧 밤이 되겠군. 빈도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이만 물러가 보겠소이다. 뭔가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저자들에게 말씀하도록 하시구려.”

    뚱뚱한 남자는 한립에게 공수하며 인사하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남자가 떠난 후 한립은 사방을 한번 훑어보고는 천천히 취성대 계단 앞까지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취성대 주위의 네 노인은 때맞춰 수결을 맺으며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 노인들이 앉아 있는 바닥에서 신비한 부적이 빛나더니 취성대를 완전히 덮고 있던 빛의 장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막 한쪽에 사람 키만 한 입구가 나 있는 걸 본 한립은 이 빛의 장막이 단순한 방어용 진법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한 후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립이 장막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가 곧 닫혔으며, 장막 역시 금세 자취를 감췄다.

    곧이어 한립이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 기이한 영력 파동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한립은 의아해하며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계단과 주위 땅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결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작은 구덩이들이 빼곡하게 나 있었다.

    영목(靈目)을 동원한 한립은 그 구덩이 표면에서 은은한 은빛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건 오랜 세월 동안 쏟아진 성광지력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외에도 취성대 계단에는 원과 선으로 구성된 문양이 많이 새겨져 있었다.

    그중엔 서너 개의 원이 단순하게 이어져 있는 문양도 있었고, 10여 개의 원이 복잡한 구조로 연결돼 있는 문양도 있었으며, 어떤 건 우물 정(井) 자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한립은 계단을 오르며 문양을 훑어보고는 점차 그것이 하늘의 별자리들을 묘사한 그림임을 알아차렸다.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간 한립은 취성대의 가장 위층 가운데 쪽 바닥에서 북두칠성 문양을 발견하고는 곧 그 위에 가부좌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어느새 짙은 남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드문드문 별도 떠올라 있었다. 한립은 천천히 눈을 감고서 운기토납하기 시작했다.

    한 시진 후.

    살짝 눈꺼풀을 움직이다 조용히 눈을 뜬 한립은 짧은 명령을 내렸다.

    “시작.”

    한립의 명령을 들은 취성대 주변 수사들은 곧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유백색 완성석(浣星石)을 앞쪽 바닥에 움푹 패어 있는 곳에 놓고서 꾹 눌렀다.

    콰득.

    완성석이 동시에 부서지자 흰빛이 번쩍였는데, 움푹한 곳에 담겨 있던 그 빛은 금세 바닥의 문양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 취성대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취성대 전체에 갑자기 강한 빛이 일어나더니 그 위에 새겨져 있던 별자리 문양들이 은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축소되어 있는 듯 극히 화려한 모습이었다.

    하늘의 별들도 취성대의 문양과 서로 호응하듯 한층 더 밝게 빛났고, 미세한 은색 빛점들도 밤의 장막에서 가득 쏟아져 내려와 옅은 안개처럼 취성대를 뒤덮었다.

    그 속에 앉아 있는 한립은 마치 실제로 별이 빼곡한 하늘에 앉아 있는 듯 성광지력이 자신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그는 곧 수결을 맺고 나지막이 뭔가를 중얼거리며 소북두성원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굵은 빛 기둥 6개가 하늘에서부터 쇄도해 왔다. 기둥들은 하늘에서 시작돼 한립의 주위로 모여 있었는데, 기둥에 충만하게 담겨 있는 성광지력은 곧 날카로운 강침(鋼針)처럼 변해 한립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이와 함께 원래 취성대를 덮고 있던 은빛 안개도 뭔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돌연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안개는 어느 거대한 힘에 의해 빙글빙글 돌다가 취성대 상공에 10장에 달하는 은빛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한립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성광지력이 갑자기 무섭도록 거칠어졌다.

    빛의 기둥들은 안개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급격히 짙어지고 굵기도 굵어졌고, 그에 따라 한립의 몸에 밀려드는 성광지력의 양도 몇 배나 늘어났다.

    당연히 한립이 받는 고통 역시 처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강침 형태의 광사(光絲)들이 앞 다퉈 몸에 파고들면서 한립의 몸에 걸쳐져 있던 옷은 피투성이가 돼 있었고, 그에게서 흐른 피는 은빛 소용돌이의 힘에 의해 혈무처럼 변해서 한립의 전신을 감쌌다.

    취성대 주위에 있던 네 노인은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 왔지만 이런 엄청난 성광지력도, 저렇게 무지막지한 수련법도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때 이미 피에 흠뻑 젖어 있던 한립의 허리 부분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흑색 거울 여섯 개가 기둥들을 향해 날아갔다.

    검은 기운에 휩싸인 거울의 위에는 부적문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바로 한립이 천귀종으로부터 받은 음진석으로 제련한 성월보경(星月寶鏡)이었다.

    각각 하나씩 빛의 기둥 속으로 날아든 거울에는 작은 크기의 부적이 쏟아져 나와 한데 모이더니 또 다른 빛의 기둥을 형성했다. 이 굵은 빛의 기둥은 곧장 밤하늘을 향해 쭉 뻗어갔다.

    “저기서 더 성광지력을 늘리려 하다니. 정말 놀랍군…!”

    취성대를 지키던 노인 중 하나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밤하늘에 새겨져 있던 북두칠성 중 여섯 개의 별이 폭발하듯 강하게 빛나더니, 허공에 갑자기 은빛 장막이 펼쳐졌다가 곧 취성대 위의 소용돌이 속으로 세차게 흘러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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