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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73화 (1,230/2,000)

1473화. 사양하는 것도 예의는 아닐지니

*

촤촤촤촥!

푸른빛을 담은 광풍이 적혈천귀의 몸을 에워싸고 소용돌이쳤다. 엄청난 속도로 휘감기는 수백 가닥의 빛줄기 덕분에 적혈천귀는 꼭 청색 고치가 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날카로운 그 푸른빛에 적혈천귀의 몸에는 급격하게 상처가 늘어났다. 적혈천귀는 죽을힘을 다해 두 손을 휘저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원래도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살점들은 금세 예리한 광풍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몇 번이나 혈해의 힘을 빌려 몸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파도마저 청란에 의해 소멸됐다.

청란이 나타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적혈천귀는 머리만 제외하고는 전신의 살점이 죄다 사라져 처음처럼 핏빛 해골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청란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던 귀물들마저도 적혈천귀가 더 이상 법력으로 조종할 수 없게 되자 그대로 붕괴돼 버렸다.

“젠장!”

적혈천귀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어떻게든 혈해로 내려가기 위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란 역시 비행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주위의 광풍도 더 매서워졌고, 결국 적혈천귀는 혈해로 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광풍에 떠밀려 하늘 높이 올라가게 되었다.

파앗! 팟! 팟!

끝없이 스쳐대는 푸른빛으로 인해 적혈천귀의 뼈대에 감돌던 혈광의 기세도 점점 약해졌다.

서걱!

혈광이 약해진 틈에, 다시 한 번 스쳐 간 푸른빛이 마침내 적혈천귀의 뼈에 흠집을 내는 데 성공했다.

“멈춰라! 내가 졌다!”

적혈천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주위를 휘돌던 청란도 비행을 멈추더니 날개를 접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청란이 날갯짓을 멈추자 무섭게 불어 대던 광풍도 서서히 사그라졌다.

적혈천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곧장 혈해로 몸을 날렸다.

풍덩!

잠시 후, 적혈천귀가 잠수했던 혈해에서 흑색 도포 차림의 단인리가 날아올랐다. 방금 전의 일전에서 원기가 많이 소모된 탓인지 그의 얼굴은 꽤나 창백했다.

이를 본 청란 역시 푸른빛을 번쩍이며 몸을 축소시키더니 곧 한립의 모습으로 변했다. 서로 마주 보며 한립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단인리의 얼굴은 상당히 구겨져 있었다.

* * *

마염곡 안.

골짜기 한쪽 구석에는 자색 수염 남자 등 천귀종의 합체기 수사 네 명이 있었고, 낙아는 여전히 은빛 화염의 보호를 받으며 골짜기의 또 다른 구석에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골짜기를 거의 다 가릴 만큼 거대한 혈운(血雲)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구름 속에서는 커다란 깃발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으며 때때로 무시무시한 혈광이 비쳐 나오기도 했다.

낙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천귀종 사람들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천귀종의 고계 수사로서 이들은 적혈천귀번의 위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적혈천귀번은 사실 선계로 비승한 천귀종 노조 중 한 명인 골염노조가 물려준 것으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속에 봉인돼 있는 천귀는 상계 선인이 죽은 후 귀왕으로 변한 것을 골염노조가 유명의 땅에서 잡아 온 것이라고 했다.

이 깃발은 대대로 태상대장로에게 전해졌으며, 태상대장로들은 자신의 정혈로 깃발의 힘을 키워 왔기 때문에 오랜 세월의 특수한 정련을 거친 이 적혈천귀번은 평범한 법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인리의 실력은 영환계의 여러 대승기 수사들 중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적혈천귀번으로 형성한 공간 안에서는 그를 당해 낼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

천귀종 수사들은 한립이 아무리 대단해도 일단 저 적혈천귀번 공간에 갇힌 이상 승패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반 시진이나 지났으니 그놈도 지금쯤 천귀의 먹이가 돼 있겠지. 저 요호 계집도 그냥 깨끗이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자색 수염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낙아를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이 남자는 한립에게 보물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단인리 앞에서 망신까지 당해 그 화풀이를 한립이 아닌 낙아에게로 돌린 것이다.

“노 장로, 그래도 잠시 더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소? 내 생각에는 사숙께 허락을 받은 후 처리하는 게 좋을 듯하오.”

천귀종의 여자 수사의 말에 곱사등이 노인도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시의선자(詩旖仙子)의 말이 맞소. 내 살펴보니 저 요호를 보호하고 있는 화염이 예사롭지 않았소이다. 구천마염마저 막을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보통 화염은 아니란 뜻이지. 역시 사숙을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소.”

세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외눈박이 거한은 팔짱을 낀 채 하늘의 혈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색 수염 남자는 세 사람의 반응에 미간을 약간 찡그렸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전음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화를 나눴기에 낙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서 바위에 몸을 바짝 기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외눈박이 거한이 입을 열었다.

“끝났나 보군.”

거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하늘의 혈운은 뜻밖에도 심하게 요동치다가 돌연 반으로 쩍 갈라졌고, 그 안에 있던 깃발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천귀종 수사들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깃발이 뿜어내는 혈광은 여전히 강했지만 그 표면의 귀신 문양은 전에 비해 조금 흐려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뭔가 추측할 새도 없이 깃발에서 곧 두 줄기 빛이 튀어나와 지면으로 내려왔다. 빛이 걷히고 나자 한립과 단인리의 모습이 보였다.

단인리는 무표정하게 뒷짐을 진 채 차가운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립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라버니!”

낙아는 바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한립에게 달려갔다. 너무 걱정한 탓인지, 아니면 법력이 소진된 상태여서 그런지 낙아는 달려오다 잠시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어떤 부드러운 힘이 낙아의 몸을 받치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한립 바로 옆까지 데려다 주었다. 한립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낙아를 덮고 있던 보호막이 수축하며 은빛 새로 변해 한립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낙아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문득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는 바로 입을 다물고 얌전히 서 있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한립이 멀쩡하게 살아서 나타난 것도 모자라 느긋한 미소까지 띠고 있자 자색 수염 남자 등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이들은 설마 하는 마음에 직접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순 없었다. 바로 그때, 단인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진석 백 근을 가져오너라.”

단인리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장로들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대강 짐작하긴 했어도, 실제로 단인리의 패배를 뜻하는 말을 듣자 머리까지 멍해졌다.

그 당당한 천귀종의 양대 태상대장로 중 한 명이, 영환계를 호령하는 대승기 수사가 어떻게 저런 평범해 보이는 청년에게 질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이 대결을 벌인 곳은 무려 적혈천귀번으로 만들어진 혈해의 공간이었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느냐?”

“아, 아닙니다!”

단인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자색 수염 남자와 시의선자는 허둥대며 골짜기 저 너머로 사라졌다.

“단 수사께서 그리 성의를 보이시니,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구려.”

한립이 여전히 옅은 미소와 함께 말하자 단인리는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내가 정말 대단한 분을 만났군.”

단인리는 하늘에 떠 있던 깃발을 회수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짜기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 * *

천귀종 사건이 있고 얼마 후, 냉염종 출운봉의 대전 안.

“보통 인물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이야. 천귀종의 단인리까지 상대가 안 될 정도라니….”

남궁장산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낙균도 긴 한숨과 함께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거들었다.

“그래도 그가 우리 냉염종의 적이 아닌 게 다행이지요.”

“천부당과 장경각의 도난 사건은 모두 한 장로가 우리 출운봉에 온 뒤 일어난 일이었으니, 아마 십중팔구는 한 장로의 짓일 것이네. 다만 그때는 도저히 한 장로가 그곳에 침입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것뿐이지.”

남궁장산의 말에 낙균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천귀종에서 꽤 입단속을 시키긴 한 모양입니다. 그런 큰 소동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소식이 새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온 영환계가 이 일로 난리입니다. 듣자니 원래 천귀종이나 경원관(境元觀)과 친분이 있던 세력들이 우리 쪽으로 많이들 기울었다고 하더군요.”

남궁장산은 흐뭇하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맞네. 풍유곡의 유(庾) 곡주와 무위산(無爲山)의 조(趙) 산주도 종주님께 밀담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 왔지. 물론 그 바탕엔 밀담을 핑계로 한 장로를 직접 만나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네. 그런 뒤 우리 냉염종 아래로 귀속될지 여부를 결정하겠단 게지. 아쉽게 됐어…. 한 장로는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폐관해 버리지 않았나. 태상대장로께서도 누구도 한 장로를 방해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고 말이네.”

낙균은 그저 다시 고개만 끄덕거렸다. 대전에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남궁장산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낙 장로, 자네는 한 장로를 어떻게 생각하나?”

낙균은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마음속 말을 바로바로 털어놨을 테지만, 지금은 내키는 대로 입을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이나 적당한 말을 찾은 후에야 낙균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한 장로와 접촉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장로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역수임을 증명했던 것 외에는 별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장로가 얼마나 주도면밀했는지 절감이 됩니다. 다만…. 그래도 한 장로는 은혜를 원수로 갚거나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예전에 성화봉에 있는 태상대장로님의 동부와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도 한 장로가 완곡하게 거절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동부도 만족하니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죠.

하지만 전 그때 그게 우리 출운봉을 위해 거절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고수가 머물러 준다면 종문 안에서 출운봉의 지위도 자연히 높아질 테니까요.”

낙균의 말을 들은 남궁장산은 흡족한 표정으로 분부했다.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고 보면 한 장로를 데려온 고 사질의 공이 아주 크지 않나. 앞으로 고 사질에게 지급될 수련용 재료의 양을 두 배로 늘리게.”

낙균은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예, 봉주님.”

* * *

며칠 후 출운봉(出雲峰) 산 중턱의 어느 동부 정원 안.

눈보다 흰 피부의 아름다운 소녀가 미부인 뒤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여몽한과 고운월이었다.

“네가 전에 했던 얘길 다시 떠올려 보니 한 장로의 내력이 정말 신비하긴 하구나. 여기까지 동행해 오는 동안 그를 꽤 파악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한 장로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대단한 인물이었어.”

고운월의 말에 여몽한이 작은 한숨과 함께 눈에 동경의 빛을 띠며 말했다.

“제자는 언제쯤에나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한한 생으로 선도(仙道)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본디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다. 수련에 있어서는 자질과 기연 모두 중요하지. 일생을 바치고도 축기기에도 들지 못하는 자가 허다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사부 역시 오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수행해 온 데다 원영 중기에 머문 지도 백여 년이 지났지만 언제 그 이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구나.”

고운월이 걸음을 멈추고 흐릿한 눈으로 저 먼 하늘을 바라보자 여몽한 역시 절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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