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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71화 (1,228/2,000)
  • 1471화. 기다리던 인물의 등장

    *

    하늘을 덮으며 날아온 백골 비검들이 한립의 몸에 부딪친 순간 백색과 금색이 섞인 불꽃이 폭죽이 터지 듯 사방으로 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충격으로 일어난 파문이 사방으로 퍼졌고 한립 위의 허공에는 작은 흑색 인장이 나타났다. 인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각만 한 크기로 커져서 한립에게 쇄도해 왔다. 인장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주위 공간이 무서운 압력으로 일그러졌다.

    콰아아아앙!

    그러나 한립을 덮쳤던 거대한 인장은 지면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춘 채 더 이상 내려가지 못했다. 그 모습에 단인리의 얼굴이 드디어 조금 굳어졌다.

    백석과 금색이 섞여 번득이던 빛이 가라앉자 인장 아래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났다.

    인장 아래에서는 한립이 우뚝 선 채 금빛 비늘이 덮인 오른팔로 인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지면에는 그의 두 발이 푹 박혀 금이 가 있었다.

    한립은 허공에 떠 있는 단인리를 보며 냉소하더니 곧 오른팔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거대한 인장은 마치 작은 돌멩이처럼 무력하게 골짜기 너머까지 날아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땅에 박혀 있던 한립의 발이 공중으로 휙 솟구치나 싶더니, 바로 단인리 근처에 나타나 일격을 가하려는 듯 흐릿해졌다.

    하지만 단인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두 눈만 가늘게 떴다. 그때 한립의 뒤에서 빛이 번쩍이며 은색 고리 하나가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한립은 빠르게 몸을 돌려 손날로 고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고리는 단숨에 두 조각이 나 버렸지만, 뜻밖에도 고리 표면에 부적문이 떠올라 맴돌더니 두 개로 갈라진 은환(銀環) 모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철컥!

    순식간에 다시 한립 양쪽에 나타난 은환은 다시 하나로 합쳐져 한립의 몸통을 꽉 조이기 시작했다. 은환은 영광을 번득이면서 점점 더 크기를 줄였고, 은환과 한립의 금빛 비늘이 닿는 곳에선 불꽃이 튀었다.

    “오라버니!”

    그 모습을 보고는 골짜기 구석으로 밀려나있던 낙아가 안타깝게 소리쳤고, 천귀종의 합체기 수사들은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립은 당황한 기색 없이 나직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몸속에서 묵직한 뇌성이 들리더니 한립의 가슴에 푸른빛 다섯 개가 떠오르더니 근육이 팽창하면서 다시 한 번 몸이 커졌다.

    그가 두 팔로 힘껏 고리를 뜯으려 하자 은환에 있는 부적문이 거칠게 요동쳤고,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가고 말았다.

    단인리의 낯빛이 마침내 어두워졌다.

    단인리는 뒤로 물러나 다른 법기를 꺼내려 했지만, 상대에게 몇 번씩이나 공격할 기회를 줄 한립이 아니었다. 한립은 곧 원래의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금세 단인리의 뒤에 나타나 주먹을 뻗었다.

    주먹은 마치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번쩍였으며, 권풍(拳風)이 지나간 곳에는 백색 잔흔이 그려졌다!

    단인리가 서둘러 입에서 핏빛 안개를 뿜어내자 안개는 곧 방패 형상으로 응집됐다.

    콰아아앙!

    한립의 일격에 방패는 움푹 꺼졌다가 산산이 흩어졌고, 미처 방패로 다 막아내지 못한 주먹의 힘은 단인리의 몸통을 뚫었다. 그러나 한립은 기쁜 기색 없이 혀를 찼다.

    단인리의 몸은 거품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한립의 주먹에는 그의 시신 대신 웬 백골이 꽂혀 대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진짜 단인리는 저 멀찍이 떨어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단인리는 공격을 멈추고 한립을 훑어보며 말했다.

    “폐관한 지 겨우 수백 년밖에 안 됐건만, 그새 수사 같은 고수가 등장했을 줄이야. 존성대명을 알려 주시겠소?”

    “한립이오.”

    한립 역시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손에 걸려 있던 백골을 휙 내던졌다. 그러자 피부의 금빛 비늘도 곧 사라졌다.

    “한 수사셨군. 그런데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분께서 어찌하여 우리 천귀종에서 이런 소동을 벌이신 거요? 금지를 범한 것도 모자라 제자들까지 상하게 하다니. 이에 대한 보상은 해주셔야 하지 않겠소?”

    “먼저 도발한 건 천귀종이었소. 그쪽에서 먼저 내 사람을 납치했고, 나중엔 강제로 우릴 이곳으로 끌고 와 버렸지. 보상은 천귀종에서 해주셔야 할 것 같소만.”

    한립의 말에 단인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합체기 장로들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장로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일제히 자색 수염 남자를 바라보자, 결국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예, 사숙. 실은 소질도 침입자가 있다는 얘기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갔다가, 소질의 힘만으로 저 한 수사를 상대하기 벅차 이리로 전송시켰을 뿐입니다. 한 수사가 왜 우리 천귀종에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쯧…. 당장 상황을 알아보고 오너라!”

    “예, 사숙!”

    단인리의 명령에 자색 수염 남자는 허둥지둥 골짜기 밖으로 날아갔다. 사질을 기다리는 동안 단인리는 아무 말 없이 한립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립은 낙아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담담히 미소를 짓고는, 그 역시 단인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후, 자색 수염 남자가 골짜기로 돌아오더니 단인리에게 공손히 전음을 보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던 단인리가 손을 내젓자 남자는 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한 수사께선 냉염종에서 오신 분이었구려.”

    단인리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느릿느릿 말했다.

    “맞소.”

    “귀종이 이리 은밀한 줄은 몰랐소이다. 한 수사처럼 대단한 고수에 대한 얘기가 여태 한 마디도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다니 말이오.”

    “단 수사, 얘기 돌릴 것 없이 하실 말씀이 있거든 바로 하시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나도 방금 전해 들었소. 보아하니 한 수사와 본종의 외문장로 사이에 은원이 얽혀 있던 모양인데, 그 뒤의 일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오. 어쨌든 그 외문장로가 죽은 이상 일은 깨끗이 마무리된 거나 다름없지 않겠소. 그러니 이쯤에서 서로 물러서는 게 어떻겠소? 내, 수사와 일행은 사람을 시켜 정중히 돌려보내 주겠소.”

    단인리는 한립의 수행이 비록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어떤 특수한 수법을 써서 원래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필 천귀종의 다른 대승기 수사도 자리를 비운 참이었기 때문에, 계속 싸우면 득보다 실이 많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단인리의 제안에 한립은 실소하며 말했다.

    “이대로 물러서라? 하하…. 단 수사, 이유 없이 끌려와 수많은 제자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저 오해였다는 말로 물러서란 말씀이오? 수사라면 그렇게 하시겠소?”

    “그럼 어떻게 해드려야 물러가시겠소?”

    단인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한립이 빙긋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정련된 음진석(陰辰石) 일백 근을 주시오.”

    한립의 말이 떨어지자 골짜기 안은 갑자기 극도의 적막에 휩싸였다.

    “음진석…? 그것도 일백 근을 달라고?”

    “본종의 대진들을 망가뜨리고 금지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 오히려 우리한테 음진석을 내놓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단인리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자색 수염 남자 등 천귀종 장로들의 분노한 목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좀 과하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광맥 하나에서 한 해 얻는 음진석이라고 해 봐야 정련하고 나면 한 근도 채 되지 않소. 그런데 한 번에 백 근을 달라고 하니 그게 말이 된다고 보오?”

    단인리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 말 속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한립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난 그리 여기지 않소. 천귀종의 역사가 얼만데 그 정도의 음진석도 모으지 못했겠소?”

    “지금 보니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가기 싫으면, 영원히 남거라!”

    한립의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난 듯 단인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그의 온몸에서 붉은빛이 피어올랐고, 입에서는 한 뼘 정도의 적색 깃발이 방출되었다.

    깃발은 빙글빙글 돌아 순식간에 집채만 큼 커져, 표면에 그려져 있는 귀신 머리 문양이 똑똑히 보였다.

    섬뜩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시퍼런 얼굴은 머리에 뿔 두 개가 돋아 있었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두 눈은 꼭 감고 있었다.

    단인리가 주문을 외자 거대한 깃발에선 피비린내가 나는 바람이 일었고, 귀신 문양은 시뻘건 입을 떡 벌려 핏빛 안개를 뿜어냈다.

    안개는 한립에게로 곧장 쇄도했는데, 안개가 가까이 이르기도 전에 메스꺼운 피비린내가 사방에 가득 찼고 기온도 확 내려갔다.

    이를 본 한립은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러자 한립이 지나간 곳마다 잠시나마 안개마저 갈라졌다.

    잠시 후, 단인리의 뒤쪽 공기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한립이 나타나 금빛 비늘로 뒤덮인 주먹을 내질렀다.

    백 개는 될 것 같은 주먹이 거의 동시에 날아들었고, 주먹이 지나간 곳에선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공격에도 단인리는 차분하게 한 손을 들어 커다란 깃발을 가리켰다.

    그러자 빠르게 펄럭이는 깃발에서 핏빛 안개가 뿜어져 나와 금세 한립에게로 밀려들었다.

    조금 전의 금색 권영들은 이 혈무에 닿는 순간 꼭 솜뭉치처럼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권영이 스며들 때마다 혈무는 타격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짙어졌다.

    한립은 팔을 회수하고는 곧장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위를 가득 메운 혈무가 사나운 파도처럼 회오리치면서 그 가운데에 핏빛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혈무의 소용돌이가 빙글빙글 돌자 근처 공간마저 찌그러졌다.

    귀를 찌르는 굉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한립의 주위 공기는 바짝 조여졌다. 소용돌이로 인한 거대한 힘은 후퇴하던 한립의 속도까지 느려지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깃발 표면의 귀신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눈동자는 작열하는 태양처럼 붉고 눈부셔서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한립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립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살펴보자 주위가 어느새 핏빛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머리 위 하늘은 온통 붉은 빛이었고 발 아래쪽은 붉은 안개가 덮여 있는 혈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공기 중에선 뜻밖에도 달콤한 냄새가 느껴졌다.

    “동천지보(洞天之寶)!”

    한립은 조금 놀란 듯 중얼거렸다.

    “식견이 제법이군. 맞다. 이 적혈천귀번(赤血天鬼幡)은 동천지보이자 본종 최고의 보물이지. 적혈천귀번에 목숨을 잃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어느새 멀지 않은 곳의 허공에 나타난 단인리가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말했다.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단인리의 전신에는 역시나 혈무가 휘감겨 있었다.

    “그래…?”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대꾸했다.

    한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방에서 귀신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이 귀곡성은 마치 수많은 귀신들이 앞 다퉈 절규하듯 때론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크고 작게 울려 댔다.

    귀곡성을 듣자 한립은 눈꺼풀이 갑자기 무거워지고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저질러야만 될 것 같은 갈증까지 들끓었다.

    하지만 한립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청량한 힘이 단전에서 솟아 나와 경맥 곳곳으로 흘러갔다.

    머리와 가슴에 차올랐던 광기는 깨끗이 사라지고, 사방에 메아리치던 귀곡성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한립이 그저 조금 몸을 휘청거리기만 했을 뿐, 바로 원래대로 돌아오자 단인리는 눈이 동그래졌다.

    이 혈해 위의 미혼혈무(迷魂血霧)는 일만 원혼의 한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욕망과 살의를 깨우는 힘을 갖고 있었다.

    단인리 자신조차 사전 준비 없이는 이 안개 속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역수가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단인리는 한립이 자신을 능가할 정도의 강한 의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때 한립이 두 눈을 번득이며 단인리에게로 돌진했다.

    “흥.”

    잠시 당황하고 있던 단인리는 가소롭다는 듯 냉소하며 수결을 맺었다.

    촤아아아!

    아래쪽의 혈해가 격하게 출렁이더니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단인리의 몸을 감쌌다.

    파도가 가라앉으며 단인리도 자취를 감추자 한립은 눈을 감고 의식으로 사방을 탐색했지만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공간은 끝이 없는 것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고, 혈해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한립의 의식으로도 수면 아래 10장 정도까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단인리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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