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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70화 (1,227/2,000)

1470화. 마염(魔焰) 흡수

*

화염으로 만들어진 바다에선 푸른 파도 대신 흑색 불꽃이 넘실댔다.

이 화염은 엄청난 고온을 발산해 골짜기 안 공기를 마치 화로 속처럼 뜨겁게 달구는 동시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먹빛 마기를 뿜어내기도 했다.

한립과 낙아 주변의 공기는 고온 때문에 안개처럼 뿌옇게 변할 정도였는데, 낙아는 사방에서 마염이 밀려오자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낙아를 감싼 은빛 보호막이 주위의 고온과 마기를 자석처럼 끌어당겨 흡수해 공기를 청량하게 만드는 걸 보고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립은 보호막도 없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센 불길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염이 금방이라도 한립의 몸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한립은 입을 벌려 무서운 힘으로 그 불길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먹빛 마염은 그 흡입력에 의해 빙글빙글 회오리치며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금세 절반 이상이 한립의 뱃속으로 삼켜져 버리자 골짜기를 통째로 태울 듯 매섭게 이글대던 불길의 기세도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이 광경을 본 수사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진 채 수결을 맺던 손을 멈췄다.

이들이 공격을 멈추자 암석 표면의 연꽃 문양들도 빛을 잃으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처음에 비해 한층 어둡고 흐릿해져 있었다.

그 후에도 한립은 계속해서 마염을 빨아들였고, 결국 골짜기 내의 모든 마염을 죄다 삼키고도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트림하는 듯한 소리까지 냈다.

“말도 안 돼!”

“만물을 불사른다는 구천마염을 어떻게…!”

“저게 어떻게 사람이란 말인가!”

“여러분, 보셨다시피 저자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고 있소. 그나마 아직은 지귀진혼대진에 갇혀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빨리 손을 쓰도록 합시다!”

자색 수염 남자는 굳은 얼굴로 외치고는 즉시 한 뼘도 안 되는 크기의 적동(赤銅) 등잔을 꺼내 주문을 외면서 가볍게 문질렀다.

화라라락.

등잔 위에 담자색 화염 한 송이가 떠오른 순간 등잔 표면에도 쌀알 크기의 부적들이 빼곡하게 떠올라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등잔에서는 짙은 자색 연기가 피어올라 순식간에 생생한 호랑이 모습으로 응결됐는데, 누각만 한 호랑이는 고개를 쳐들고 포효하더니 한립에게로 돌진했다.

그때 또 다른 기둥 위에 앉아 있던 천귀종 여인은 목소리를 쉴 새 없이 높였다 낮췄다하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자 몸에 걸치고 있는 자색 치마가 선녀의 옷처럼 나부꼈지만, 여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붉은빛이 떠올랐고 전신의 근육은 빠르게 수축했다.

게다가 가느다란 손톱은 돌연 기다랗게 변해 검은빛을 띠었고, 얼굴을 뒤덮고 있던 살점들마저 녹아 그 아름답던 미녀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 홍분고루(紅粉骷髏)로 변해 버렸다.

여인은 기둥에서 뛰어내리면서 한립을 향해 사납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립의 정수리 위에서 파문이 일며 갑자기 작은 언덕만 한 크기의 백골 손이 나타나 매서운 기세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직도 골짜기에는 처음에 머리통들이 핏빛 안개를 뿜어 형성한 혈해의 환영이 가득했지만, 백골 손은 그 환영으로 인한 압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한립은 백골 손을 보고 그대로 선 채 작은 산 하나를 꺼내 던졌다.

콰콰쾅!

순식간에 커진 산이 백골 손을 가격한 순간, 산산이 깨져 버린 산의 파편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고 백골 손 역시 파괴돼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홍분고루로 변한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 공격을 펼치려 했지만, 그때 거친 파도가 솟구쳐 올라 여인을 감싸더니 너무 쉽게 한쪽 암벽으로 집어던졌다.

쿠웅!

암벽에 부딪친 여인의 뼈가 산산조각 나면서 암벽 아래엔 곧 한 무더기의 뼈가 수북이 쌓였다.

그때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자색 호랑이가 허공을 달려오며 한립을 향해 강한 빛을 내뿜었지만, 한립은 손을 휘저어 그 빛을 가볍게 소멸시키고는 호랑이의 복부 아래까지 훌쩍 뛰어올랐다.

뒤이어 한립이 두 팔을 뻗어 한 손으로는 호랑이 머리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뒷다리를 잡자 호랑이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어떻게 해도 그 강한 힘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한립이 팔의 근육을 부풀리며 호랑이를 두 쪽으로 찢어 버리려던 순간, 아래쪽 지면이 들썩였다.

쌔애애액!

지면을 뚫고 튀어나온 건 바로 검은빛으로 휘감겨 있는 장창 네 자루였는데, 역시나 혈해의 압력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한립의 가슴을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카앙! 캉!

장창은 마치 철벽에 부딪친 것처럼 강한 반탄력에 의해 튕겨 나가 버렸다.

“키이이이이!”

이번엔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땅이 또 한 번 들썩이더니 온몸이 새카만 거대 거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거미의 머리에는 눈동자가 두 개씩인 눈이 두 줄로 나 있었고, 몸통엔 길고 날카로운 8개의 다리가 돋아 있었다. 그리고 그 복부에는 회색 살덩어리 같은 게 달려 있었다.

회색 살덩어리를 가만히 살펴보던 한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살덩어리는 사실 곱사등이 노인이었던 것이다. 거대 거미는 마치 노인의 혹에서 자란 것처럼 붙어 있어, 극히 기괴한 모습이었다.

새카만 거대 거미는 달아오른 쇠만큼 벌겋게 변한 앞발을 교차해 커다란 가위처럼 한립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여전히 호랑이를 움켜쥔 채, 혈해로 인한 압력을 이용해 아래로 뛰어내리면서 다리를 휘둘렀다.

퍼어억!

강한 충격으로 거미의 앞발은 산산조각 났고, 휙 날아간 몸은 암벽에 부딪혔다가 땅에 떨어졌는데 그 위로 쏟아져 내린 암벽의 파편들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땅에 착지한 한립은 양팔에 힘을 줘 호랑이를 두 쪽으로 찢어 버렸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찢어진 호랑이가 흩어지기는커녕 자색 안개의 형태로 세차게 회오리치며 한립을 뒤덮은 것이다.

안개는 괴이한 향기를 짙게 풍겼는데 사람의 혼을 조종하고 신지(神智)를 갉아먹는 힘을 갖고 있는 듯했다.

“오라버니!”

멀리 떨어져 있던 낙아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 채고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호호호호! 육신이 강해 봤자 그게 뭐 대수겠소. 노 장로의 식혼귀무(蝕魂鬼霧) 안에서는 어차피….”

암벽 아래 쌓여 있던 천귀종 여인의 뼈들은 어느새 다시 뭉쳐져 홍분고루를 형성한 상태였는데, 홍분고루가 몸을 일으키며 비웃음을 날리던 순간 어느 청석 기둥 꼭대기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기둥 위에는 자색 수염 남자가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채 추락했고, 남자가 갖고 있는 등잔 역시 그의 손을 벗어나 떨어졌다.

그때 한립을 덮고 있던 자색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면서 태연한 표정의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등잔을 거둬들여 슬쩍 살피고는 곧장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자색 수염 남자는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머리에서 번쩍이며 튀어나왔다가 다시 미간으로 스며들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지 옆의 패루를 보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아직도 공격할 틈을 못 찾은 거요?”

남자의 말에 패루 뒤쪽에서 웬 신형이 슬쩍 나왔는데, 바로 외눈박이 거한이었다.

거한의 몸에는 뾰족한 가시가 가득 돋아 있는 뼈 갑옷이 둘러져 있었고, 손에는 한눈에도 극품의 법보임을 알 수 있는 대단한 기세를 내뿜는 핏빛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한은 그저 경계하는 표정으로 한립을 쳐다보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방금 전 한립이 합체기 수사 3명을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상대하는 걸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이런 무력감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한립은 거한을 흘긋 보더니 곧장 다른 쪽 패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립의 옷이 그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걸 봐서는 여전히 주변을 가득 채운 혈해의 압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는 게 확실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패루 앞에 다다른 한립은 슬쩍 위아래를 한번 훑어보고는 갑자기 기둥 하나를 끌어안고서 허리와 팔에 힘을 줘 위로 끌어당겼다.

지면은 거칠게 진동했고, 패루 위의 악귀 눈동자도 공포로 인해 떨렸다.

촤아악!

흔들흔들하면서 점점 더 높이 솟아오르던 패루가 마침내 땅속에서 완전히 뽑혀 나왔다.

그 순간 지붕의 악귀들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고, 표면을 감쌌던 검은빛이 순식간에 사라져 패루는 결국 흑색 영패로 변해 한립의 손에 떨어졌다.

이에 사방을 덮었던 혈해의 환영 역시 심하게 일렁거리다 확 줄어들었다. 영패를 거둬들인 한립은 곧 또 다른 패루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곱사등이 노인과 자색 수염 남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킨 상태였고 홍분고루로 변했던 여인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외눈박이 거한을 포함한 이 네 명의 천귀종 수사들은 한립이 지귀진혼대진을 구성하고 있는 지귀패루(地鬼牌樓)를 하나씩 거둬들이는 걸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 딱히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패루 네 개가 변한 흑색 영패를 모두 거둬들인 한립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군.”

푸화아아악!

말을 마친 한립이 갑자기 입을 쩍 벌리자 엄청난 기세의 흑색 화염이 꿈틀대며 나왔는데, 그 정체는 바로 방금 전 그가 들이마셨던 마염이었다.

마염은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니 네 개의 수레바퀴 모양으로 응집돼 빙글빙글 돌다가, 뱀의 모습으로 변해 천귀종 수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수사들은 깜짝 놀라 저마다 방어용 법보들을 꺼내 방어막을 만들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빠르게 방어를 펼치긴 했지만 네 명의 합체기 수사들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천귀종 수사라면 구천마염이 응축돼 만들어진 이 뱀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합체기 수사라 해도 여차하면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 가공할 마염의 공격을 역으로 받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고, 네 마리의 뱀은 이미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골짜기 상공에 갑자기 빛이 번쩍이나 싶더니 어느새 나타난 흰빛이 네 줄기로 갈라져 꼭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수사들 앞에 나타났다.

빛의 정체는 바로 번득이는 검기였다!

검기 네 줄기가 빙글빙글 돌면서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검륜으로 변해 마염의 뱀들을 덮쳤다.

쿠르르르르릉!

검륜 표면의 불덩이들이 폭발하듯 타오르면서 주위에 거친 파문이 일었다. 기세등등하던 뱀들은 검륜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뒤이어 골짜기 상공이 일렁이더니 흑색 도포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반듯한 외모에 점잖은 분위기를 풍겼고 눈썹은 먹처럼 검어 어쩐지 음산한 느낌을 풍겼다.

뱀들을 없앤 검륜은 다시 흰빛으로 변해 남자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단(段) 사숙!”

천귀종 수사들은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이에 한립은 제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천귀종 사람으로 종문 내 두 명의 대승기 수사 중 한 명인 단인리(段人離)였다.

단인리는 종문의 금지인 마염곡이 난장판이 되고 합체기 수사 네 명까지 궁지에 몰려 있는 모습을 보고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눈가에는 살짝 경련이 일었다.

아래쪽의 한립을 내려다보던 단인리는 수결조차 맺지 않고 그저 가볍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서 영롱한 빛이 떠올랐다.

쐐쐐쐑!

손가락에서는 흰빛이 연이어 방출됐는데, 그 빛은 곧 수백 자루의 기다란 백골 비검으로 변해 폭우처럼 한립에게 쏟아졌다.

이를 본 한립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전신에서 투두둑 소리가 나며 몸집이 커지더니, 체표에 금색 비늘이 떠올라 순식간에 온몸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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