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69화 (1,226/2,000)

1469화. 지귀진혼대진(地鬼鎮魂大陣)

*

세 명의 장로는 천귀종의 대진이 너무 쉽게 파훼되자 얼굴이 굳어졌으며, 주위 수백 명의 제자들은 더더욱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히 이 귀한 진법을 파괴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매부리코 노인은 매서운 노호와 함께 백색 골도(骨刀)를 방출했는데, 칼등에는 제법 큰 은색 고리 9개가 달려 있었다.

뒤이어 노인이 빠르게 수결을 맺자 골도 위의 고리들이 듣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괴상한 소리를 냈으며, 골도는 곧 피처럼 붉은 도광을 휘감고서 한립을 향해 날아갔다.

그 무렵 백발노인 역시 윗부분에 용머리가 장식돼 있는 흑색 지팡이를 꺼내 허공에 던졌는데, 지팡이는 금세 커져서 등에 날개가 돋친 괴이한 교룡으로 변했다.

교룡은 입을 쩍 벌려 흑색 화염을 내뿜었고, 거한도 회색 깃털 부채를 꺼내 법력을 주입한 후 매섭게 흔들었다.

그러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광풍이 몰아치다가 용 모양으로 응집돼 한립을 향해 돌진했는데 그 수가 7~8개에 달했다.

장로들이 합공을 펼치자 제자들도 정신을 차리고는 저마다 온갖 법보를 꺼내 주문을 읊어 댔다. 덕분에 광장 안은 다양한 색의 영광(靈光)으로 가득 찼다.

이에 맞서 한립의 미간에서는 방대한 의식이 방출돼 무서운 기세로 순식간에 광장을 뒤덮었다.

우우우우웅!

신비한 신혼의 힘이 광장에 모여 있던 이들을 짓누르면서 천귀종 제자들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져 잇따라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제자들은 강한 압박감에 미동조차 하지 못했고, 하늘에 가득했던 법보들 역시 주인의 통제를 받지 못해 땅에 떨어졌다.

매부리코 노인을 비롯한 장로들은 그래도 비교적 경지가 높은 편이었기에 금세 그 압박감을 떨치고 정신을 회복했다.

그 순간 세 장로가 펼쳤던 공격도 이어졌는데 도광, 흑색 화염, 용 형상의 바람이 순식간에 한립 바로 앞까지 몰려왔다. 하지만 한립은 조금도 피하려는 기색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쾅 쾅 쾅!

세 개의 굉음이 울리는 순간, 도광은 원래의 백색 골도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화염과 바람의 용은 아예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그 어떤 공격도 한립의 몸은커녕 그의 옷에조차 작은 흠집 하나 남기지 못했다. 낙아 역시 대부분의 공격이 한립에 의해 막힌 데다 은빛 장막의 보호를 받고 있어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장로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치자, 한립이 그들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제 내 차례군.”

말을 마친 한립은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조심…!”

매부리코 노인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지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 웬 신형이 번뜩 나타나 거대한 주먹을 날려 저 멀리 날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퍼억! 퍽!

백발노인과 까만 피부의 거한은 매부리코 노인이 허무하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마치 광풍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힘없이 날아가 절벽에 으깨졌다.

광장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낙아는 주위에 널려 있는 법보들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천귀종 제자들을 보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석두 오라버니가 대단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낙아가 얼떨떨해져 있을 때 한립이 다가오며 다정하게 물었다.

“낙아, 어디 다친 덴 없느냐?”

“네. 오라버니께서 주신 보물들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나저나 제훤 그자, 정말 악독하지 뭐예요. 오라버니의 영염(靈焰)을 탐낸 걸로도 모자라 그런 함정까지 파다니. 얼마나 걱정됐다고요.”

낙아의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부좌를 하고 백색 단약을 꺼내 삼켰다. 방금 전 의식을 펼쳐 공격할 때, 일부러 위력을 상당히 감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법력이 거의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오라버니, 바로 여길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낙아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한립이 이렇게 큰 소동을 벌였으니 당연히 천귀종의 다른 제자들까지 모조리 몰려오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립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서둘러 갈 필요 있겠느냐.”

쌔애애액!

한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온 빛에서 순식간에 6개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풍기는 기세는 매부리코 노인 등 앞선 세 장로에 뒤지지 않았다.

그들은 광장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한립을 살피더니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서로 거리를 벌리며 법보를 꺼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법보 6개가 일제히 한립을 향해 돌진해 왔는데 한립은 여전히 가부좌를 한 채 몸만 조금씩 돌려 동시에 여섯 개의 주먹을 날렸다.

쾅 쾅 쾅!

거친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한립을 향해 날아들던 법보들이 마치 무형의 벽에 부딪힌 것처럼 폭발해 눈부신 빛을 일으켰다. 빛은 곧 가라앉았지만 가부좌를 하고 있던 한립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던 수사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가느다란 눈을 가진 중년인 앞에 웬 신형이 번뜩 나타나 다짜고짜 그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억!

중년인은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졌고, 또 다른 방향에서도 연이어 타격음이 들려왔다.

한립은 그렇게 나머지 연허기 수사 다섯 명 마저도 단 일격만으로 날려 보낸 뒤 다시 낙아에게 돌아왔다.

그때 뒤늦게 사방에서 몰려온 또 다른 천귀종 제자들도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던 장로들이 고작 원영기 수사에게 맞아 누군가는 광장에 추락해 깊은 구덩이를 만들며 처박혔고, 또 누군가는 근처 궁전 위로 떨어져 버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장 위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수백 명의 제자들과 법보들이 그득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이에 새로 몰려든 제자들 역시 감히 공격을 개시할 엄두를 못 내고 멍하니 허공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흰빛 한 줄기가 저 멀리서부터 쏜살같이 날아와 이미 반쯤 무너져 버린 천귀전(天鬼殿) 상공에 멈춰 섰는데, 곧 그 빛 속에서 비단옷을 입은 장대한 체격의 사내가 나타났다.

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반듯한 얼굴과 함께 턱에 자줏빛이 도는 짧은 수염을 갖고 있었고, 전신에서는 꽤나 웅혼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태상장로님!”

“노(盧) 장로님께서 오셨다! 다행이야…!”

당황하고 있던 제자들은 그 사내의 모습에 희색을 띠며 환호했다. 사내는 그런 제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한립을 보자마자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합체기 수사로군.’

한립은 사내를 보고 입 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작은 산을 꺼내 던졌다. 산은 사내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급격하게 커졌지만, 사내는 침착하게 좀 더 빠른 속도로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마침내 거대하게 변한 산이 사내를 덮치려던 순간, 사내의 손놀림이 갑자기 멈추더니 사내의 발밑에 어두운 자줏빛이 번쩍이면서 부적문으로 이뤄진 진법이 떠올라 순식간에 그를 감쌌다.

사내가 진법에 싸여 사라지자 거대한 산은 그저 허공만 가르고 지나가, 이미 반쯤 무너져 있던 궁전을 마저 깔아뭉갰다.

이때 한립과 낙아의 발밑에서도 똑같은 진법이 떠오르더니 자색 광휘가 두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 * *

풍음산맥(酆陰山脈)의 어느 은밀한 골짜기 안.

흑색 안개가 휘감고 있는 이 골짜기는 무척이나 좁고 어두웠다. 양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었는데, 암벽 표면엔 괴상한 무늬와 알아보기 힘든 부적문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골짜기 네 귀퉁이에는 각각 높다란 청석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각 기둥의 표면에는 역시나 독특한 부적문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칠흑처럼 새카만 땅 위에 갑자기 자색 빛이 번쩍이더니 한립과 낙아가 홀연히 나타났다.

낙아는 아직도 은빛 보호막에 감싸여 있기 때문에 잠시 몸을 휘청거렸을 뿐 크게 다치진 않았고, 한립은 골짜기로 전송되자마자 꼿꼿한 자세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자색 수염 남자는 어느새 청석 기둥 하나에 올라서 있었다. 게다가 다른 3개의 기둥 위에는 웬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눈을 감고 있었다.

여인은 붉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고,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지만 은근한 성숙미를 풍기고 있었다. 나머지 두 남자는 각기 외눈박이 거한과 곱사등이 노인으로 모두 합체기 고수로 보였다.

세 사람은 골짜기가 어수선해지자 가만히 눈을 뜨더니, 아래쪽의 한립과 낙아를 의아한 얼굴로 보다가 바로 자색 수염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 장로, 광장에서 벌어진 일을 처리하러 가신 것 아니었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그것도 외인까지 데리고 돌아온 것이오? 이곳이 금지인 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여인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질책했지만 자색 수염 남자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소! 저자는 합체기 절정의 실력을 가진 역수요. 빨리 지귀진혼대진(地鬼鎮魂大陣)을 발동해야 하오!”

남자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여전히 의아해하면서도 즉시 흑색 영패를 꺼내 들었다.

곧이어 네 사람이 함께 나지막이 주문을 읊으며 영패를 던지자, 영패는 곧장 한립 주변의 땅속으로 깊이 박혀 들었다.

쿠쿠쿠쿠쿵.

사방에서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굉음이 메아리쳤고, 한립이 서 있는 땅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흙먼지까지 자욱하게 일어나더니, 마침내 땅이 갈라지며 기괴한 패루(牌樓) 네 채가 동시에 바닥에서 솟구쳐 나와 한립과 낙아를 둘러쌌다.

굵은 기둥 4개가 위쪽으로 지붕 3개를 떠받치고 있고, 문짝은 없는 형태의 이 패루는 족히 누각 10개는 합쳐진 정도의 높이였다.

각 기둥들에는 사람과 짐승의 뼈가 가득 박혀 있었고, 지붕의 추녀 끝마다 핏빛 해골이 걸린 채 마치 풍경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각 패루 가운데 지붕에는 거대한 악귀의 머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 어떤 것은 머리에 뿔이 돋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사람 시체를 물고 입가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를 본 한립이 막 공격을 취하려고 할 때, 갑자기 그 머리통들에 달린 커다란 눈알 8개가 마치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푸쉬쉬쉬쉬쉭!

섬뜩하게 한립을 노려보던 눈알들에서 돌연 핏빛 안개가 뿜어져 서로 뒤엉키더니 혈해(血海)의 환영으로 변해 한립과 낙아가 있는 아래쪽 공간을 뒤덮었다.

혈해가 덮친 순간 한립은 엄청난 압력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는데, 그 압력으로 인해 그의 옷은 몸에 착 달라붙었고 동작도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한립의 체내에서 폭죽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잇따라 울리더니 잠시 흔들리던 그의 몸은 이내 균형을 되찾았다.

낙아를 지켜 주던 은빛 보호막도 강한 압력 때문에 흔들리다 위쪽 부분이 움푹 패이기까지 했지만, 한립이 법결을 운용하자 다시 안정을 찾았다.

청석 기둥에 앉아 있던 여인은 그 광경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래도 이 진법도 저놈을 오래 잡아 두진 못할 것 같군. 하지만 놈이 마염곡(魔焰谷)에 들어온 이상, 우리도 골염노조께서 남기신 구천마염(九天魔焰)의 힘을 이용할 수 있지 않겠소? 그거면 저놈을 없앨 수 있을 거요.”

“좋소!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자색 수염 남자의 말에 외눈박이 거한과 곱사등이 노인이 서로 흘긋 보더니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네 사람이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우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치며 골짜기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으로 인해 양쪽 암벽 위에서 돌 부스러기들이 굴러 떨어졌지만, 암벽 표면에 새겨져 있던 부적문들은 어느새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원래의 흐릿하던 모습이 금세 또렷하게 바뀐 부적문들은 곧 모양이 일그러지더니 흑색 화염으로 이뤄진 수많은 연꽃들로 변했다.

뒤이어 연꽃이 빙글빙글 돌며 꽃잎을 방출하자 꽃잎들은 곧장 골짜기로 쏟아지며 검은 불바다를 이뤄 한립과 낙아를 덮쳤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