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7화. 파탑(破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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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멈추지 않고 앞쪽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순간, 나무 사이에 퍼져 있던 안개가 갑자기 시커멓게 변해 일렁거리더니 곧 거센 바람과 함께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 기온도 뚝 떨어졌으며, 귀곡성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어느새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게 된 한립은 지면에 형성된 강한 흡입력 때문에 발이 무거워짐을 느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성큼성큼 낙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쿠쿠쿠쿠쿵!
굉음이 땅 밑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한립의 양쪽 지면이 덜덜 떨리다가 쩍 쪼개졌고, 이내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 박혀 있는 귀수(鬼手) 한 쌍이 불쑥 튀어나와 한립의 다리를 잡았다. 게다가 한립의 머리 위에서는 검게 변했던 안개가 좌우로 걷히면서 거대한 압력이 쏟아졌다.
쿠오오오오오!
순식간에 태산 같은 압력을 뿜으며 내려온 자색 팔각 거탑이 한립을 짓눌렀다.
거탑은 높이가 무려 50장도 넘었으며, 탑 전체에 새겨져 있는 영문(靈紋)에서는 기묘한 음산함이 풍겼다.
이 모든 일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일어났기 때문에 한립도 미처 어떤 대응을 하지 못한 채 탑에 깔려 버렸다.
“우우웁!”
그 모습에 낙아가 눈이 동그래져서 마구 발버둥 쳐 댔지만 그럴수록 몸을 묶고 있는 사슬도 강하게 조여와 번갯불을 내보냈고, 낙아의 얼굴은 점점 더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때 거탑 주위의 흑색 안개가 꿈틀거리더니 신형 네 개가 사방에서 하나씩 튀어나왔다.
그 중 한 명은 흑색 도포를 걸친 수척한 노인 제훤이었고, 또 다른 이는 황색 도포 차림의 각진 얼굴의 거한이었다. 나머지 둘은 은관(銀冠)을 쓴 마른 체격의 중년인과 선홍색 옷을 입은 중년 미부인이었다.
이 네 사람은 어느 한 명 빠짐없이 전부 화신기 수사였는데, 모두 같은 모양의 수결을 맺고 있다가 거탑 가까이 가서야 손을 풀었다.
“하하! 전(田) 장로, 장로께서 자명탑(紫冥塔)을 빌려주신 덕분에 손쉽게 저 악적 놈을 잡을 수 있었소이다.”
제훤이 각진 얼굴의 거한을 향해 공수하며 말하자 거한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 예를 차리실 것 없소이다, 제 장로. 다만 장로께서 고작 원영기 수사 하나 잡자고 그리 큰 대가를 치르시며 제게 사존의 성명비보(成名祕寶)를 빌려 오라고 하실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그게 다 만전을 기하려는 뜻이었다오. 어쨌든 육애 장로까지 저놈 손에 죽지 않았겠소. 그 때문에 집법전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르오.”
“뭐, 중요한 건 결국 저자를 무사히 생포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 제 장로께서도 저희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겁니다.”
선홍색 옷차림의 미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제훤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소. 걱정 말…….”
쿠쿠쿠쿠쿵.
제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거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심지어 지면까지 덜덜덜 떨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미부인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중년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하하하! 걱정하실 것 없소. 아마 탑 밑에서 그 괘씸한 놈이 난동을 부리자 내 부망귀(腐莽鬼)가 쓴맛을 좀 보여 준 모양이오.”
“나 장로의 귀물이 벌써 자명탑까지 움직일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몰랐군요.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미부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돌리던 순간, 거탑에서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리면서 방금 전보다 더 큰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심하게 흔들려서 제훤을 비롯한 화신기 수사들마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지면에는 거탑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균열들이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생겨 있었다.
“나 장로, 혹시 이것도 부망귀가 한 일인가요?”
미부인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묻자, 나 씨 성의 중년인이 막 뭔가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힌 것처럼 말을 멈추더니 대답대신 선혈을 뿜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내 부망귀가, 내 부망귀가 죽다니……!”
중년인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중년인의 말에 다른 수사들 역시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네모난 얼굴의 거한이 곧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보아하니 제 장로의 예상이 맞은 것 같구려. 그 흉수 놈은 과연 육신의 힘이 만만치 않은 것 같소. 하지만, 그래도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소. 자명탑은 통천령보로, 연허기 수사조차 일단 그 힘에 속박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오. 그러니 아무리 힘 좋은 역수라 해도 고작 원영기인 자가 어찌 자명탑을 이길 수 있겠소?”
“그야 그렇지만, 자명탑은 원래 합체기 경지에는 이르러야 비로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보물 아니겠소. 즉 우리 네 사람이 힘을 모았다곤 하나 지금의 자명탑은 원래보다 위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오. 내 생각엔 차라리 지금 전력을 다해서 흉수 놈을 깨끗이 압살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제훤이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나 씨 중년인도 바로 찬성하고 나섰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 생포고 뭐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지금 바로 놈을 죽이는 게 좋겠소. 필요하다면 그냥 원영만 남겨 천천히 처분하면 되는 일 아니겠소.”
결국 수사들은 다시 한 번 결인하며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거탑 탑신의 영문들이 번쩍 빛나더니 수많은 부적문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탑신에 짙은 자색 기운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주위로 한기가 자욱이 퍼지면서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공기 중엔 우박 같은 얼음 알갱이들까지 응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탑이 방금 전보다 훨씬 묵중해진 느낌으로 땅속에 깊이 박혔다. 그러나 수사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거탑이 심하게 요동쳤다.
“뭔가 이상하오!”
네모난 얼굴의 거한이 하얘진 얼굴로 외쳤지만, 수사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쩌쩌쩍’ 하는 소리와 함께 탑기단에서부터 탑첨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균열이 생겼다.
콰콰콰콰콰쾅!
결국 네 명의 수사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거탑이 허무하게 폭발해 버리며 자색 연기가 치솟았다.
터져 나간 거탑에서 엄청난 기세의 여파가 퍼져 나가자 수사들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낙아도 바람을 타고 몸이 날았다.
쏟아져 내리던 거탑의 파편이 거의 다 떨어지고 연기와 먼지마저 점점 걷히자, 칠흑처럼 시커먼 몸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거귀 한 마리가 땅 위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귀의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구멍 속에선 악취가 풍기는 검은색 피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귀의 머리 위에 서 있던 한립은 무표정하게 낙아를 힐끗 보더니 뒤이어 차가운 눈으로 네 수사들을 훑어봤다.
‘설마 저자는……!’
놀란 수사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립이 곧장 두 주먹을 날렸다.
한립의 왼쪽 주먹은 가장 가까이 있던 중년인을 향해 날아갔고, 다른 주먹은 역시나 비슷한 거리에 있던 미부인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 탓에 서둘러 몸을 피하려 했지만 공기마저 단단히 응집된 탓에 도저히 제때 피할 수가 없었다.
중년인은 할 수 없이 제자리에 선 채 양쪽 소매 속에서 짙은 흑색 안개를 분출했다.
안개 속에선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악귀의 머리통 다섯 개가 나타나 시뻘건 입을 쩍 벌린 채 권압(拳壓)의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기다 글자들이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는 핏빛 인장도 함께 튀어 나가 집채만 한 크기로 커지더니 방패처럼 중년인의 앞을 막았다.
미부인 역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막 백골 비검 열세 자루를 꺼내 던진 참이었다.
미부인은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세우고는 독하게 자신의 팔뚝을 찔렀다. 그러자 팔뚝에 난 구멍 다섯 개에서 쌀알 크기의 붉은색 혈충들이 바글바글 기어 나와 순식간에 그녀 앞에 핏빛 방패를 형성했다.
콰아아앙! 퍼어억!
양쪽에서 거센 충돌음이 들렸다.
악귀의 머리통은 마치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나갔고, 핏빛 인장 역시 폭발해 함께 가루가 돼 버렸다.
다른 쪽의 백골 비검 13자루도 ‘쩌쩌쩡’ 금이 가는가 싶다가 다음 순간 바로 부스러기로 변했고, 혈충으로 이뤄진 둥근 방패도 예외 없이 물 먹은 종이처럼 찢어지다가 결국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으아악!”
“끼아아아!”
두 개의 비명이 함께 울렸다. 은관을 쓴 중년인과 선홍색 옷을 입은 미부인의 몸은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휘감겼다가 순식간에 터져 버렸다.
가루가 된 두 사람의 시신이 흩날리며 허공에 자색 빛이 번쩍였는데, 그 정체는 바로 온몸이 옅은 자색을 띠고 있는 자그마한 크기의 중년인의 원영이었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채 도망치려 했지만 자색 빛이 번쩍이던 그 순간 벌써 다가온 한립에 의해 잡혀 버리고 말았다.
자색 원영은 미친 듯이 꿈틀대며 한립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썼지만, 커다란 손이 살짝 힘을 주자마자 한 줌의 먼지로 변했다.
한립이 중년인의 원영을 상대하고 있을 때 미부인의 원영은 지면에 바짝 붙어서 산속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백색 기운을 내뿜어 비검 형태로 응결시킨 뒤 날려 보냈다.
쿠우웅! 쿠웅! 쿵! 쿵! 쿵!
미부인의 원영이 숨어든 숲에서 나무들이 잇따라 넘어지며 쉼 없이 굉음이 울렸다.
쓰러진 나무들 끝에서 매서운 흰빛이 번쩍이자 미부인의 원영은 두 쪽으로 갈라져 빛을 잃어 갔다.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지만, 각진 얼굴의 거한과 제휜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비술을 이용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
거한은 전신이 눈처럼 새하얀 거대 백골조(白骨鳥)를 타고 있었는데, 새의 두 날개가 한 번 날갯짓할 때마다 200~300장씩 놀라운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제훤은 등에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핏빛 날개를 달고 거한보다도 빠른 속도로 벌써 1,000장 밖까지 달아나 있었다.
‘이런, 제길!’
거한은 중년인과 미부인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 걸 느끼고는 곧바로 팔각 거울을 꺼내 흑적색 빛을 방출해 자신의 뒤를 보호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흑색 깃발까지 9개나 꺼내 주위에 빛의 장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한의 몸속에서 갑자기 ‘끼기긱’ 거리는 소리가 나며 뾰족한 뼈들이 피부를 뚫고 나오더니, 체표에서 서로 융합돼 백색 갑옷을 만들었다.
백색 갑옷은 흉부 등 몸의 중요한 부위를 덮었다.
제훤 역시 위기를 감지하고는 오른손 손날로 자신의 반대쪽 어깻죽지를 매섭게 내리쳐서 팔을 잘라냈다.
그러자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던 선혈이 피의 안개로 변해 그의 몸을 감쌌고, 곧 새빨간 빛줄기로 변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 모습을 보고도 곧바로 추격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근처의 낙아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방출된 푸른빛은 곧장 낙아에게 날아가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낙아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흑색 사슬들은 무력하게 체표에 떠올랐다가 산산이 파괴돼 버렸다.
“오라버니!”
낙아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한립을 불렀고, 한립은 빙긋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립의 손짓에 낙아의 몸에서 날아오른 흑색 부적은 허공에서 다섯 개의 앙증맞은 산으로 변해 한립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휙! 휙!
한립은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거한과 제훤을 흘긋 보고는 다섯 개의 산 중 두 개를 던졌다. 산은 두 사람을 향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면서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따라잡았다.
그와 동시에 산이 흑색 빛을 번쩍이며 집채만큼 커지자, 산이 지나가는 곳마다 거친 파문이 일었다.
거한과 제훤은 뒤에서 놀랄만한 기세가 파도처럼 밀어닥쳐 오는 걸 느끼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한이 다급히 수결을 맺었지만, 뭘 하든 이미 늦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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