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66화 (1,223/2,000)
  • 1466화. 협박

    *

    불새는 허공을 한 바퀴 돈 뒤 빠르게 낙아에게로 돌아와 그녀의 팔 안으로 녹아들었다.

    그제야 낙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얼굴빛은 창백했으며 몸도 휘청거렸다.

    급히 영단을 꺼내 복용하고 겨우 조금 혈색을 회복한 순간, 갑자기 낙아의 머리 위에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그 속에서 시커먼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은 낙아의 몸에 닿기도 전에 엄청난 영압(靈壓)으로 아래쪽을 짓눌렀다.

    파아아아아!

    아까의 공격 때문에 약해져 있던 낙아 주위의 흰빛은 결국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낙아는 깜짝 놀라서 둔술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내 전신이 꽉 조여져 수결을 맺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사이 머리 위 시커먼 손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흑색 그물을 만들어 낙아를 완전히 가둬 버렸다.

    목적을 이룬 시커먼 손은 곧 사라졌고, 그 대신 근처 허공에 흑색 도포를 입은 신형이 나타났다. 신형은 바싹 마른 체격에 검은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노인은 낙아의 왼팔에 있는 은색 봉인을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일개 요호 따위가 그렇게 귀한 보물을 품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아, 아마 그 한가 놈이 준 것이겠구나? 어쩐지 놈을 잡기가 그렇게 힘들더라니……. 아무튼 덕분에 의외의 수확까지 거두게 됐군. 허허.”

    그물에 묶여 꼼짝달싹 못한 채 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낙아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노인을 보며 소리쳤다.

    “너, 천귀종의 제훤이로구나!”

    “똑똑하군. 그래, 노부가 바로 제훤이다. 그럼 노부가 여기 나타난 까닭도 잘 알겠구나.”

    제훤의 얼굴에 웃음기 대신 흉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날 미끼로 오라버닐 협박하려고? 어림없다!”

    분노하던 낙아의 눈에 결연한 빛이 스친 순간, 눈동자가 갑자기 진녹색으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미간에서도 녹색 빛이 빠르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제훤은 손가락 끝에서 검은빛 한 줄기를 방출해 낙아의 미간으로 침투시켰다. 그러자 낙아의 미간에서 반짝이던 녹색 빛이 사그라지며, 낙아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흥! 아직은 네가 필요하니 살려 둔다만, 한립을 잡은 뒤엔 함께 호아의 위패 앞에서 지귀지화(地鬼之火)로 불태워 환생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마!”

    제훤은 살기 어린 얼굴로 중얼거리다 낙아의 왼팔을 바라보더니 빼곡하게 부적문이 새겨져 있는 붉은색 병을 꺼냈다.

    그는 허공에 병을 던져 놓고는 한참 동안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우다가 갑자기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병 표면의 부적문들이 일제히 밝아지더니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안개 속에서 붉은 실 수십 가닥이 튀어나와 낙아의 왼팔에 있는 은빛 봉인으로 녹아들더니 봉인을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봉인이 밝게 빛나면서, 은빛 화염이 조금씩 피부 위로 떠올랐다.

    이를 본 제훤이 기쁜 얼굴로 빠르게 결인하자 붉은 안개가 한층 더 짙어지면서 더 많은 실들이 튀어나와 봉인에 스며들었다.

    낙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고, 왼팔엔 경련이 일었다.

    팔에서 뽑혀 나오는 은빛 화염의 양이 점점 많아지면서 어느새 피부 위로 불새의 몸이 절반 정도 드러났지만 아직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봉인 아래쪽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신비로운 힘이 불새를 다시 끌어당기려 했다.

    “흥.”

    제훤은 코웃음을 치며 병 쪽으로 정혈을 내뿜었다. 정혈이 스며든 병에선 곧 더 많은 안개가 나와 순식간에 사슬 두 개로 응집되더니 불새의 목을 철컥 잠갔다.

    그 탓에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불새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목의 사슬을 감지하고는 분노의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펼쳐 입에서 은색 불기둥을 내뿜었다.

    불기둥은 그 기세만으로도 불새의 목을 감고 있던 사슬을 태워 버리고 이어서 붉은색 병마저 덮치고는 제훤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

    불기둥의 속도가 워낙 빨라 제훤은 불기둥이 지척까지 다다른 후에야 겨우 청록색 방패를 꺼내 방어해 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몸을 피한 제훤의 왼쪽 팔은 방금 전 스친 화염에 의해 깨끗이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나마 불새의 힘이 원래보다 약해졌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한숨을 돌리며 핏빛 단약을 꺼내 복용했다. 그러자 사라진 팔의 단면에서 꿈틀거리며 새살이 돋아나더니, 금세 멀쩡한 팔이 만들어졌다.

    제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낙아 쪽으로 다가갔다.

    붉은색 병과 청록색 방패는 이미 은빛 화염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불새 역시 푸른빛에 의해 다시 봉인 속으로 녹아든 상태였다.

    예상치 못한 손해를 보고 말았지만, 그럴수록 봉인을 바라보는 제훤의 눈빛은 뜨거워졌다.

    * * *

    굽이굽이 파도치듯 이어져 있는 산맥은 곳곳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누각과 전각을 품은 채 영기 가득한 안개로 덮여 있었는데, 그중 어느 외딴 골짜기에 신형 7~8개가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자는 열여섯 가량의 소년으로 꽤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 소년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다른 사람들을 향해 분부했다.

    “분명 저쪽 숲이었지? 당장 쫓아가.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돼!”

    “예!”

    사람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숲으로 뛰어들었지만 회색 도포를 입은 백발의 노파만은 자색 지팡이를 짚은 채 여전히 소년 곁에 머물러 있었다.

    “손 파파, 파파도 빨리 가. 자운초는 워낙 교활해서 쟤네들만으로 잡는 건 무리란 말이야.”

    소년의 말에도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소주, 노신은 소주의 안전을 지키라는 관주(觀主)님의 명을 받은 몸이라 절대 소주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냥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숲에 들어가서 자운초를 잡으라는 것뿐인데 그게 뭐 어떻단 거야?”

    “관주님께서는 소주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약 소주의 곁을 떠났다가 소주께서 뜻밖의 일이라도 당하시게 된다면 노신은 절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파가 고집을 부리자 소년은 다소 불쾌한 듯 말했다.

    “이 호로곡(葫蘆谷)은 우리 경원관(境元觀) 관할 하에 있거늘 누가 감히 여기서 허튼짓을 한단 말이야?”

    “그야 그렇지만…….”

    “길게 말할 거 없어. 만약 이 이상 지체했다가 자운초를 놓치기라도 하면 어르신께 다 파파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릴 거야.”

    노파는 얼굴이 조금 굳어졌지만 여전히 주저했다.

    “빨리 안 가고 뭐하는 거야!”

    드디어 소년이 화를 내자 노파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자색 지팡이로 힘껏 땅을 짚어 숲 속으로 날아갔다.

    소년은 그 뒷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못마땅한지 짜증스런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뒤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곤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푸르게 번쩍이는 빛을 보고는 금세 의식이 흐려졌다.

    곧이어 소년의 눈앞엔 청색 도포를 입은 한립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의 눈동자에선 푸른빛이 반짝였고, 손가락에는 자색 부적이 끼워져 있었다.

    한립은 담담하게 태일화청부를 회수하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취성대(聚星臺)는 어디 있지?”

    소년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구궁봉(九宮峰) 꼭대기에 있습니다.”

    “그래? 왜 경천봉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거지?”

    “구궁봉은 산맥 중 제일 높은 봉우리라, 방해 없이 주변을 살필 수 있으며 성광지력을 끌어들이기에도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그래서 선조께서도 그곳에다 진법을 만드신 겁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해서 물었다.

    “취성대는 누가 지키고 있으며, 그자의 경지는 어느 정도냐?”

    “종문에서는 그곳에…….”

    소년은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구궁봉의 상황을 줄줄이 읊었다.

    구궁봉은 경원관에서 경천봉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봉우리였기에 평소에도 경원관의 많은 장로와 제자가 그곳에서 수행했다.

    하지만 취성대가 자리하고 있는 산 정상 구역은 경원관의 금지(禁地)로서, 몇몇 내문장로와 주요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소년의 설명에 의하면 취성대 주위엔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고 금제 안쪽에도 경계를 맡은 장로들이 버티고 있는데, 그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합체기 장로 한 명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소년의 미간을 가볍게 짚고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다시 눈이 맑아진 소년은 자신이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단 사실을 떠올리고는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자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서 숲으로 향했다.

    한편 한립은 어느 커다란 나무 뒤에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허리춤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저절로 황색 부적 한 장이 한립의 눈앞으로 날아와 멈췄다.

    부적을 본 한립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화르륵.

    부적이 허공에서 절로 타오르자 그 불길 속에 어떤 희미한 장면이 나타나 점점 선명해졌다.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고, 그녀의 가냘픈 손목은 어느 비쩍 마른 손에 잡혀 있었다.

    그 야윈 손의 주인은 백발과 검은 수염을 가진 수척한 노인으로 음산한 눈빛으로 한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립은 노인이 입고 있는 흑색 도포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네가 바로 제훤이냐?”

    “흥, 이 괘씸한 놈! 처음엔 내 질손 호아를 죽이더니, 그 다음엔 간악하게도 육애 노제까지 죽였지. 그 후로 네놈이 계속 냉염종 안에 웅크리고 있어서 노부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느냐? 어쨌든 이제야 이 요호 계집이라도 내 손에 넣게 됐구나. 어떠냐? 구하러 올 용기가 있느냐?”

    제훤의 입가엔 살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한 달 안에 우리 천귀종 풍음산맥(酆陰山脈)의 유귀봉(幽鬼峰)으로 오너라. 단, 반드시 네놈 혼자 와야 한다. 만약 때가 되어도 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땐…….”

    제훤이 섬뜩한 눈빛으로 말하며 낙아의 손목에 힘을 가하자 낙아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한립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낙아를 바라봤다. 그런 한립 앞에서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울리더니, 곧 부적이 불에 타 재로 변해 흩어졌다.

    * * *

    보름 후, 풍음산맥.

    험한 산세 속 우뚝 속은 어느 산봉우리에 짙은 먹구름이 햇빛을 가린 탓에 한낮인데도 금방 비가 쏟아질 듯 어두컴컴했다.

    또한 산을 무성하게 뒤덮고 있는 나무들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산 전체가 마치 먹물로 그린 커다란 수묵화 같았다.

    먹구름이 조금씩 커져 가고 있을 때, 구름 가운데에 돌연 구멍이 뚫리더니 한 줄기 빛이 날아 나왔다.

    빛의 정체는 청색 도포를 입은 청년, 바로 한립이었다.

    한립은 허공에 서서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두 눈을 감고 의식을 풀어서 산봉우리 전체를 훑어 내렸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한립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근처의 숲으로 내려갔다.

    숲에 착지한 후 유난히 굵은 나무를 돌자, 안개 너머로 작은 신형이 나지막한 백색 관목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낙아.”

    한립의 나지막한 부름에 그 작은 신형은 움찔 몸을 떨더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한립을 본 순간 창백하던 작은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고, 입가에도 간신히 미소가 번졌다.

    “웁…….”

    낙아는 뭔가 말하고 싶어 입을 벙끗거렸지만, 아마 목소리를 막는 금제에 걸린 듯 꽉 막힌 소리만 나왔다.

    “내가 왔으니 이제 걱정 마라.”

    한립이 천천히 다가오자 낙아가 순간 안타까운 눈으로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립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낙아는 더욱 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연 전신에서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제야 낙아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묶고 있는 검은빛 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슬은 낙아가 조금만 움직여도 번갯불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낙아의 작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한립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선 섬뜩한 살의가 번득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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