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5화.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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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북한선역(北寒仙域).
짙은 영기의 안개로 뒤덮인 어느 푸른 산 정상에서는 휘황찬란한 황금빛 대전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대전 안 커다란 의자에는 한 노인이 자색을 띤 금빛 도포를 입고 머리에 연화보관(蓮花寶冠)을 쓰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비취옥 찻잔에 담긴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에야 고개를 들어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20~30세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흑색 경장 차림인 남자가 공손히 몸을 굽히며 말했다.
“통허(通虛) 선배님. 후배 방반, 이리 외람되게 찾아뵈어 송구하오나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천기비술(天機祕術)로 누군가를 좀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관심 없다. 통허각의 규칙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통허는 옆의 다탁에다 찻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 년 수령의 허해자양화(虛海紫陽花) 한 포기, 상품(上品) 금동용안석(金瞳龍眼石) 두 개, 거기에 박양회음수(泊陽回陰水) 한 병을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방반은 말을 마치자마자 정교한 자색 상자 두 개와 백색 옥병 한 개를 꺼내, 안의 내용물을 보였다. 통허는 흘긋 물건들을 훑어보고는 그제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법 예의를 아는 후배였군. 말해 보거라. 누굴 찾는 게냐?”
“예전에 후배와 겨룬 적이 있던 자입니다. 300년 전에 이미 제 손으로 없앤 줄 알았는데, 최근에서야 그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다만 아직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라 선배님께 도움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비술을 펼치자면 그자의 피라든가 머리카락 같은 게 필요하다만. 혹시 갖고 있느냐?”
통허의 물음에 방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백자 병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사실 그자의 혈맥이 좀 특이한지라, 싸우면서 정혈 한 방울을 취해 놓긴 했었습니다. 이거면 될는지요?”
통허는 병을 받아 살짝 흔들어 봤는데 무게가 꽤 나가자 의아한 얼굴로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았다.
“정말 기이하구먼, 기이해. 대체 어떤 자이냐? 어떻게 피 속에 이렇게 여러 종류의 진령의 힘을 담고 있을 수 있지?”
통허가 깜짝 놀라 묻자 방반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그게……. 실은 그자는 하계에서 비승한 자로, 다양한 신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실력이 꽤 뛰어나서 후배 역시 운 좋게 겨우 그자를 이길 수 있었지요.”
“하계에서 비승한 자라……. 알았다. 따라오너라.”
통허는 몸을 일으켜 대전 뒤편을 향해 걸어갔다. 방반이 그 뒤를 따라 금색 병풍을 돌아 얼마쯤 더 걸어가자 어느 밀실이 나타났다.
밀실은 상당히 넓었지만 탁자나 의자 같은 건 하나도 없이 그저 정중앙에 청동 항아리 하나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는 복잡한 문양으로 이뤄진 세 겹의 고리 모양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항아리는 사람 허리까지 왔고, 표면에는 바닥의 진법 문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기이한 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방반이 통허를 따라 항아리 앞으로 걸어가 안쪽을 들여다보자 흑색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까만 수면 위로 방반 자신과 통허의 모습이 희미하게 아른 거렸다.
통허는 백자 병의 마개를 열고는 항아리 쪽으로 병을 기울였다.
퐁.
백자 병에서 옅은 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리자 항아리 속 수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잔물결이 퍼져 나감에 따라 먹물 같던 액체는 점차 맑아지기 시작하더니 고리 모양 무늬가 새겨져 있는 항아리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해졌다.
그 모습에 통허는 복잡한 주문을 읊기 시작하더니 한참 뒤 한 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짚었다가 청동 항아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개(開)!”
우우우웅.
항아리가 진동하면서 표면의 무늬가 강렬한 청색으로 빛나더니 푸른빛이 부적문을 따라 아래로 흐르며 바닥 전체의 진법을 밝혔다.
그리고 그 순간, 방반의 역시 푸른빛에 완전히 휩싸였다.
방반은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어느새 자신이 넓은 호수 위에 서있다는 걸 깨닫고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수는 아득히 보이는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방반은 조금 감탄한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긴……. 항아리 안이군!”
“시간이 얼마 없다. 빨리 찾으려던 것부터 찾아라!”
갑자기 통허의 목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들려오자 방반은 서둘러 정신을 집중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그저 멀리 이어져 있는 산과 물뿐이었다.
하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 고개를 홱 숙이자 자신이 딛고 있는 수면 아래에서 옅은 금빛 핏방울이 저 깊은 곳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물속에 흐릿한 푸른색 신형이 나타났는데,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멀어지고 또렷이 보일 듯하다가 다시 희미해져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려 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방반이 그 일렁거리는 신형을 보기 위해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려던 순간, 금빛 핏방울이 돌연 물살을 타고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방반이 당황해하는 사이 주위의 산과 발아래 호수까지 빙글빙글 돌면서 일그러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방반은 자신이 여전히 청동 항아리 앞에 서서 항아리 입구를 짚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항아리 속 액체는 방금 전 일이 마치 없었던 일 처럼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말해 보거라. 뭘 봤느냐?”
통허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부끄럽습니다만 제대로 본 것이 없습니다. 그자의 신형은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흐릿하게만 보였습니다.”
“본디 당사자는 눈이 흐려지는 법이지. 천기옹(天機甕)이 그런 식으로 상대의 모습을 비추는 건 피의 주인 탓인 경우가 많다. 즉 그자는 지금 북한선역이 아니라 선계의 어느 은밀한 비경(祕境)에 있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야. 그게 아니면……. 어쩌면 선역 직속의 어느 하계에 있는지도 모르지.”
통허의 말에 방반은 다급히 물었다.
“그럼 혹시 그자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적어도 어느 비경, 아니면 어느 하계에 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황당하군! 너는 이 선계가 애들 손바닥만 한 크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날더러 고작 피 한 방울로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라고?”
통허가 불쾌한 듯 대꾸하자 방반이 놀란 얼굴로 공수하며 말했다.
“후배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잠시 후, 푸른 산을 벗어난 방반은 허공에 선 채 차가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흥! 네놈이 땅 밑으로 꺼지든 하늘 위로 솟든, 끝까지 찾아내서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 테다!”
으드득 이를 갈던 방반이 전신 원반을 꺼내 주문을 읊으며 미간을 짚었다가 휙 손을 펼치자 빛의 장막이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장막 위에는 청색 도포를 입은 키가 큰 청년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뒤이어 방반이 손을 흔들자 그 빛의 장막은 빠르게 축소되어 전신 원반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며칠 후, 풍국 북서쪽, 짙은 산안개가 끼어 있는 어느 깊은 산골짜기.
자욱한 안개 속에서 강한 폭발음과 법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콰콰쾅!
갑자기 뇌성 같은 굉음이 울리더니 안개가 확 갈라지며 녹색 둔광이 날아왔다.
둔광에 휩싸여 있는 자는 청록색 비사(飛梭)를 타고 비행하고 있는 녹의 소녀로 몸 주위에는 청색 옥패 세 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총기 가득한 눈동자에 청아한 외모를 가진 소녀는, 바로 류낙아였다.
낙아가 안개 속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짜기의 안개가 세차게 소용돌이치더니 흑색 둔광 다섯 가닥이 튀어나와 빠른 속도로 낙아의 뒤를 쫓았다.
둔광의 속도와 기세를 봤을 때, 이들은 모두 원영기 수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낙아는 힘껏 속도를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뒤쪽의 다섯 수사들보단 느렸다.
잠깐 사이에 양쪽 사이의 거리는 30장까지 좁혀졌다.
“대체 누구길래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것이냐?”
결국 낙아가 도망을 멈추고 수사들을 돌아보며 묻자 다섯 수사들 중 거한이 먼저 낙아 발밑의 비사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흐흐흐. 그런 건 알 것 없고,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잡히기나 하거라.”
이어서 나머지 둔광도 제각각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낙아 주위를 포위했다.
둔광이 걷히자 다른 수사들의 모습도 드러났는데, 한 명은 붉은 얼굴의 노인, 또 한 명은 자색 옷을 입은 부인, 나머지 두 명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검은 옷의 청년이었다.
“이렇게 여럿이서 한 사람을 핍박하다니. 감히 냉염종을 무시하는 것이냐?”
낙아의 차가운 말에 붉은 얼굴의 노인이 매섭게 외쳤다.
“고작 결단기 주제에 입은 맵구나. 아무래도 노부가 먼저 따끔한 맛을 보여 주는 게 낫겠군!”
노인이 먼저 붉은색 원환(圓環)을 던지자 거한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도 각자의 법보로 공격을 펼쳤다.
네 명의 협공에 낙아는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곧 주문을 외워 몸 주위의 청색 옥패를 거대하게 키우고는 겹겹이 만들어 낸 옥패의 환영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콰콰콰콰쾅!
법보 네 개가 한꺼번에 옥패의 푸른 보호막에 부딪치자 각기 다른 색의 불꽃이 튀었다. 보호막은 거칠게 흔들렸고 표면의 빛도 확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네 사람의 공격을 막아냈다.
거한은 이 광경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바로 다른 수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만만찮은 계집이었군. 나도 한 수 돕겠습니다! 그래도 계집의 목숨만은 붙여 놔야 하니 주의하십시오!”
거한은 바위만 한 흑색 벽돌을 꺼내 협공에 합류했다.
그렇게 원영기 수사 다섯의 힘이 합쳐지자 공격의 위력이 더욱 거세졌고, 낙아를 둘러싼 푸른 보호막의 힘은 급격하게 약해졌다.
결국 보호막이 완전히 깨지기 직전, 낙아는 다시 영광이 감돌고 있는 백색 비단 헝겊을 꺼냈다.
방금 전의 청색 옥패에 결코 뒤지지 않는 등급의 법보였다.
비단 헝겊이 낙아의 머리 위에서 빙그르르 돌자 흰 물결이 번져 나가 낙아의 전신을 겹겹이 감쌌다.
“젠장! 고작 결단기 주제에 무슨 법보를 저렇게 많이 갖고 있는 거야?”
다섯 수사들은 놀라움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낙아를 노려보다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각자의 법보에 주입하는 법력의 강도를 높였다.
쿠쿠쿠쿵!
굉음이 울리면서 낙아 주위의 흰빛이 심하게 떨렸지만, 일단은 무사히 버텨 냈다.
그 사이 낙아는 급히 단약 하나를 복용하고,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낙아의 작은 얼굴에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여러 적들에 혼자 맞서 싸우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혈도회의 화신기 회주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한립이 특수한 방법을 이용해 낙아의 몸에 정염화조(精炎火鳥)를 봉인해 준 덕분이었다.
그때 만약 일시적으로 법력을 증가시켜 주는 췌령단(萃靈丹)을 복용해서 정염화조의 힘을 완벽히 끌어내지 않았다면 결코 그를 일격에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도, 다섯 수사들에 맞서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한립이 준 법보와 영단 덕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아의 상황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안 돼! 난 절대 이대로 당할 수 없어. 무사히 다녀오겠다고 오라버니한테 약속했단 말이야!’
낙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왼팔을 들어 올리고는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왼팔에서 신비로운 은색 진법 문양이 번쩍 빛났다.
곧이어 청명한 울음소리와 함께 혈도회를 습격했을 때보다 조금 작아진 은빛 불새가 날아갔다.
불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수사들을 향해 다가간 순간.
화라라라락.
“이, 이게 대체 뭐야!”
“안 돼……!”
검은 옷을 입은 두 청년의 비명이 은빛 화염 속에 잠겼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원영조차 탈출하지 못한 채 연기로 변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당황해 잠시 멈칫하는 사이, 붉은 얼굴의 노인 역시 화염에 삼켜졌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호체영광(護體靈光)이 찰나조차 버티지 못한 탓에 노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연기가 되어 버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거한과 자색 옷의 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한은 부인보다 조금 더 비행 속도가 빨랐지만, 은빛 불새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바로 뒤까지 접근해서 그들의 몸을 차례로 관통했다.
“사부님, 구해 주…….”
부인이 먼저 불덩어리로 변해 추락한 뒤, 거한의 처절한 비명 역시 화염에 파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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