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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464화 (1,221/2,000)
  • 1464화. 두 가지 방법

    *

    어느 동부 상공에서 웬 거한이 허공에 선 채 굵은 빛의 기둥 여섯 개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있는 광경을 무거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는 전신에 검은빛을 휘감고서 순식간에 한립이 머무는 동부 근처로 날아갔다.

    한립의 동부에 가까워질수록 거한은 빛의 기둥 속에 담겨 있는 거대한 성광지력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는데, 그 힘은 마치 거센 파도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잠시 주저하던 거한이 위험을 무릅쓰고 좀 더 조사해 보려던 순간,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낙균, 기다리게.”

    뒤이어 눈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출운봉 봉주, 남궁장산이었다.

    “봉주님……!”

    낙균은 살짝 놀란 얼굴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남궁장산이 먼저 말을 끊었다.

    “긴말 할 것 없이 일단 날 따라오게.”

    남궁장산은 말을 마치자마자 낙균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산 정상을 향해 날아갔다.

    낙균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남궁장산이 벌써 저 멀리까지 가 버린 뒤였으므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산 정상의 대전 안.

    낙균이 도착하자 남궁장산은 뒷짐을 진 채 대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던 낙균은 못 참겠다는 듯 뒤에 대고 물었다.

    “봉주, 아까 전 한립의 거처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보셨습니까. 뭔가 예사롭지 않은 공법을 수련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한립은 내력도 불분명한 자인데, 만약 이대로 놔뒀다가 종문에서 이를 따지고 든다면 그땐 뭐라고 변명한단 말입니까.”

    초조해하는 낙균의 태도에도 남궁장산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는 태상대장로께서 친히 전음으로 분부하신 일이네. 한립의 일에 대해선 상관하지 말라 하셨지.”

    “태상대장로께서요! 아니 대체 왜…….”

    낙균이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하자 대전 안쪽으로 걸어가던 남궁장산이 문득 발을 멈추더니 낙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하신 데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우린 그저 명이나 받들면 되는 거네.”

    “예……. 명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네. 누구도 한립의 동부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되며, 그를 방해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는 명을 전해주게나!”

    “예!”

    남궁장산의 명을 받은 낙균은 곧 대전 밖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남궁장산은 그제야 방금 전과는 달리 역시나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립……. 대체 정체가 뭐지? 평소 늘 폐관에 들어 계시며 종문의 일에는 관여치 않으시던 분까지 이리 관심을 보이시다니…….”

    * * *

    한립의 동부 위쪽에 나타났던 여섯 개의 별빛 기둥은 약 한 시진쯤 지나자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는데도 동부를 찾아와 그를 귀찮게 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동부 안 밀실.

    한립은 여전히 가부좌를 한 채 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한참 동안이나 미동조차 않고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북두성원공 제6단계는 한립의 예상보다 훨씬 난해했으며, 더구나 이 단계를 수련하는 데 필요한 성광지력의 양은 앞선 단계 때의 몇 배 이상이었다.

    이를 감당하기 위한 의식의 힘은 지금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렇게 의식의 힘을 대량으로 사용하면 법력 역시 적잖이 소모될 것이다.

    그동안에는 운학초를 복용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장천병을 이용해 영초를 성장시킨다 해도 계속 수련을 이어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속도라면 제6단계 완성까지 적어도 10년은 걸릴 거야.’

    한립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찡그려졌다. 최대한 빨리 선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한립에게 있어서 1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사실 10년 만에 소북두성원공을 제6단계까지 수련해 내는 것도 턱이 놀랄 만큼 대단한 속도였지만 한립은 만족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은 곧 뭔가가 떠오른 듯 살짝 기대감에 찬 얼굴로 눈을 감고는 앞서 살펴봤었던 장경각 옥간들의 내용을 떠올렸다.

    얼마 뒤 눈을 뜬 한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냉염종은 영환계 3대 종문 중 하나답게 장경각 내각에 많은 비서를 보관하고 있었고, 한립은 그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방법을 찾았다.

    그중 하나는 영환계의 또 다른 대종문인 경원관(境元觀)과 관련이 있었다.

    경원관에는 성광지력을 이용해 수련하는 신통이 적잖이 전수되고 있었으며, 특히 개파조사가 그런 공법에 정통하다고 했다.

    경원관 관내에는 수많은 희귀 재료로 만들어진 ‘취성대(聚星臺)’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오래된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이 진법은 바로 그 개파조사가 친히 만든 것으로, 당연히 한립이 만든 북두취원진(北斗聚元陣)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즉 이 진법의 도움을 받는다면 평소의 네다섯 배를 훌쩍 넘는 성광지력을 쉽게 끌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취성대는 경원관의 귀한 보물이었으므로, 취성대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는 몇몇 제자와 장로들뿐이었으며 외인은 눈으로 구경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소북두성원공 제6단계 수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머지 한 가지 열쇠는, 어느 옥간에 기록돼 있던 ‘성월보경(星月寶鏡)’이라는 특수한 법보 제련법이었다.

    성월보경은 공격용이 아니라 보조적 법보로, 이를 이용하면 극히 적은 법력만으로도 대량의 성광지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 제련법은 수만 년 전 냉염종의 어느 합체기 장로가 우연히 얻은 것이었는데, 그때는 별을 이용한 공법이 별로 없었던 데다 이 법보를 만드는 덴 일반 법보의 열 배에 달하는 재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귀한 공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까진 냉염종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성월보경을 제련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음진석(陰辰石)’이었다. 이는 극히 보기 힘든 귀한 재료였지만 천귀종의 근간을 이루는 광석이기도 했다. 즉, 천귀종의 핵심 공법인 천귀대법 마지막 단계를 수련할 때 이 음진석이 엄청나게 많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환계의 몇 안 되는 음진석 광맥들은 자연히 천귀종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취성대든 성월보경이든, 어느 것도 만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립은 잠시 고민한 끝에 곧바로 일어나 동부를 떠났다.

    * * *

    만물이 고요히 잠든 깊은 밤.

    동부를 나온 한립은 체표에 둔광을 휘감은 채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비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쪽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희고 거대한 손바닥이 갑자기 한립을 향해 내리쳤다.

    파라라라락!

    그 손바닥 아래로는 화염으로 덮인 수많은 백색 연꽃 꽃잎들이 마치 천녀가 꽃을 흩뿌린 것처럼 빙글빙글 돌며 쏟아져 내려 단번에 주위를 뒤덮으면서 한립의 퇴로마저 차단했다.

    지독한 한기가 주위를 휩쓸어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고, 심지어 근처 산봉우리의 지면은 수정 같은 서리로 덮이기도 했다.

    잠시 당황하던 한립은 곧 주먹을 뻗어 거대한 힘을 방출했다.

    퍼어엉! 펑! 퍼엉!

    잇따른 폭발음과 함께 백색 꽃잎들이 기포처럼 힘없이 터져 사라졌다.

    그와 함께 흰 손바닥 표면의 영광(靈光)도 주먹의 기운에 의해 부르르 떨렸고, 주위 공간마저 뒤틀리면서 쿠르릉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손바닥은 뜻밖의 반격에 놀란 주인에 의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곧 멀지 않은 곳의 허공에 파동이 일더니 전신이 흰빛에 휩싸인 신형이 나타났다.

    신형의 손에는 표면에 회오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남색 옥척(玉尺)이 들려 있었다.

    신형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바로 손에 들고 있던 옥척을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언덕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고, 표면의 영문(靈紋)은 눈부신 푸른빛을 발했다.

    백색 신형이 손을 휙 흔들자 옥척이 긴 울음과 함께 마치 천둥 같은 소리를 일으키며 아래쪽의 한립에게로 날아갔다.

    그 모습에 한립은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허공을 쥐었다.

    가볍게 허공을 쥐었을 뿐인데도 태산마저 으스러뜨릴 정도의 거대한 힘이 옥척을 향해 날아갔고, 옥척은 더 이상 한립을 향해 내려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옥척 표면의 회오리 문양이 빛나더니 황소 머리에 용의 몸을 한 괴수의 허상이 떠올라 소 울음소리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남색 옥척은 다시 힘을 받은 듯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한립이 몸속 소북두성원공을 운용하자 갑자기 가슴 부위에서 다섯 개의 푸른 빛점이 번쩍이며 북두칠성 문양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은 일곱 개의 별 중 다섯 개만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뿐, 나머지 두 개는 광채 없이 어두웠다.

    한립은 허공을 쥔 손에 힘을 줘, 공간을 거칠게 일그러뜨렸다!

    옥척 위에 떠올랐던 괴수의 허상은 그 강한 힘에 몸이 으스러지며 비명을 지르더니 결국 ‘펑’ 하고 터져 흩어졌다. 그제야 흰빛에 감싸여 있던 백색 신형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한 수사, 빈도는 사마경명(司馬鏡明)입니다. 손에 사정을 두십시오!”

    한립은 백발에 자색 도포 차림의 남자를 보고는 주먹을 더 가하려다 힘을 잠시 멈추었다.

    그때를 틈타 사마경명이 서둘러 수결을 맺자 거대한 옥척이 순식간에 줄어들어 그의 손에 떨어졌다.

    옥척이 무사한 걸 본 사마경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사마경명은 옥척을 통해 한립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이 귀한 영보가 설사 깨지진 않더라도 최소한 영성은 크게 잃었을 것이다.

    비록 사마경명 역시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한립이 가볍게 응수하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역시나 상대가 자신의 사정을 봐준 게 확실했다.

    “사마 수사, 이런 일을 벌이신 뜻이 뭡니까?”

    한립은 뒷짐을 진 채 무표정하게 물었다.

    “한 수사, 무례하게 굴려는 뜻은 없었으니 너무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단지 수사의 진짜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수사와 저희 어르신께서 맺으신 약속은 본종 전체에 있어 지극히 큰일이니, 아무리 어르신께서 당부하셨어도 본종의 백만 년 보물과 맞바꾼 상대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는 꼭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시험해 본 느낌은 어떻습니까?”

    한립이 찡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묻자 사마경명이 작은 탄성과 함께 말했다.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실력을 갖고 계시더군요. 게다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소북두성원공을 이런 경지까지 수련해 내시다니……. 덕분에 제 안계가 크게 넓어졌습니다. 사실 예전에도 이 공법을 수련했던 본종 제자들이 있었습니다만, 다들 초입 근처만 맴돌고 말았지요.”

    “과찬이십니다.”

    빙긋 웃으며 겸손히 말하던 한립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보탰다.

    “장경각의 유실된 옥간들은 한 모가 급한 일부터 마친 후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부본이 남아 있으니 그리 애쓰실 거 없습니다. 다만 빈도는 한 수사께서 어르신과 하신 약속만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한번 응낙한 일을 번복하진 않습니다.”

    한립의 담담한 말에 사마경명은 만족한 듯한 얼굴로 포권하며 말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자, 그럼 한 수사께선 또 다른 일이 있으신 것 같으니 전 이만 방해하지 않고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자 한립 역시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몸에 청색 영광을 감은 채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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