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62화 (1,219/2,000)

1462화. 복수

*

거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전 안쪽 석문의 표면에 어려 있던 핏빛이 사그라지더니 문이 열리며 백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 남자는 겉으론 서른 갓 넘은 나이로 보였으며, 영준한 외모에 온화함과 기품이 서려 있었다.

“큰형님의 출관을 경하드립니다!”

거한과 남색 도포 차림의 중년인은 그의 모습을 보더니 황급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하하! 아우들, 본회 부회주(副會主)인 몸으로 이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가 뭐 있느냐. 일어나서 얘기하자꾸나.”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말하자 중년인과 거한은 감사를 표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큰형님, 저…….”

중년인이 머뭇대며 뭔가 말하려 하자 큰형님이라는 남자가 먼저 말을 끊고 나섰다.

“풍송(馮松), 날 다급히 찾았던 일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앞당겨 출관하지 않았느냐.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부터 말해 보거라.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느냐?”

“예, 실은 사흘 전에도 수주(隋州) 분타에 똑같은 일이 발생해 그곳에 머물고 있던 200여 명이 거의 다 죽어 버렸습니다. 앞선 석 당주의 일과 합쳐 생각해 봤을 때 흉수는 적어도 화신기 이상이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또한 불 속성 보물이나 공법을 사용하는 데 능한 자인 것 같습니다.”

“그게 끝이냐? 거의 다 죽어 버렸다는 건, 살아남은 자도 있다는 뜻 아니냐. 풍송,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교묘한 말솜씨를 갖게 됐는지 모르겠구나.”

“요, 용서하십시오! 생존자는 지금 대전 밖에서 대령하고 있으니 바로 부르겠습니다.”

풍송은 바짝 긴장된 얼굴로 대답하고는 서둘러 대전 밖으로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쩍 마른 청년이 빠른 걸음으로 대전에 들어오더니 세 사람을 향해 절을 했다.

“회주님과 두 분 부회주님을 뵙습니다!”

“지금이 예를 차릴 때더냐. 어서 일어나서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해 보거라.”

회주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청년은 감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회, 회주님께 아뢰옵니다. 그……. 사흘 전 밤중에 저희 분타가 야습을 당했었는데, 침입자가 작……, 너무 작아서 외모는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고, 다만 그자가 화염 신통을 펼쳐서 분타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 것만 볼 수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여(餘) 타주님마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면서 넌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이냐?”

“속하는 일이 있어 나갔다가, 참사가 벌어졌을 땐 막 분타 근처 반십령(盤辻嶺)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행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수척한 청년이 두려움에 떨며 말하자 회주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혹시 아직 보고하지 않은 부분이 있느냐?”

“아, 아니, 없습니다.”

회주는 덜덜 떨고 있는 청년을 보면서 옅게 미소 짓더니 갑자기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청년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잡힌 것처럼 몸이 움츠러들었고, 머리 위에 기다란 검은빛이 나타나 곧 청년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아!”

청년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눈, 코, 귀 등에서 피를 흘렀다. 하지만 그의 비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해 사라졌고 몸뚱이도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정직한 녀석이었군.”

회주는 손을 내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풍송과 거한은 청년이 대전에 들어온 후부터 줄곧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숨도 크게 못 쉬고 있었다.

콰앙!

그런데 그때 갑자기 굉음이 들려오더니 뒤이어 크고 작은 고함 소리가 울리며 대전까지 흔들거렸다.

회주는 굳은 얼굴로 대전 밖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고 풍송과 거한 역시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원래 암홍색 골짜기는 두꺼운 혈운(血雲)의 장막으로 덮여 보호되고 있었는데, 지금 그 장막 위쪽에 난데없이 일백 장 높이의 흑색 거산 세 개가 떠올라 있었다.

장막의 혈광은 거산의 흑광에 맞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골짜기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건물 밖으로 나와 이 광경을 보고는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그 순간, 또 다른 흑색 거산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이번에는 혈광이 감돌고 있던 장막이 심하게 요동치더니 결국 거산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마침내 장막을 뚫은 거산 네 개는 곧 매섭게 아래로 돌진해 내려왔고, 대전을 포함해서 골짜기의 절반 이상을 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산세가 워낙 험해서 제때 몸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신형이 대전 상공에 나타났다. 바로 온화해 보이는 회주였다. 회주는 즉시 커다란 적색 깃발을 꺼낸 후 핏빛 안개를 분출해 거산의 낙하를 막았다.

깃발과 거산의 힘이 맹렬하게 충돌한 순간, 깃발은 덜덜 떨리면서도 간신히 거산을 지탱해 냈다.

“와아아아아아!”

“회주님! 감사합니다!”

거산의 그림자 아래 있던 혈도회 수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환호가 길게 이어지기도 전에 저 높은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또 하나의 거산이 매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려왔다.

쿠우우우웅!

무려 다섯 개의 거산이 핏빛 안개를 짓누르자 안개에 휘감겨 있던 깃발이 결국엔 찢어져 버렸다.

더 이상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게 된 거산들은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거산이 한 개 더 보태지면서 골짜기는 대부분이 거산의 그림자로 덮여 버려 해가 진 것처럼 어두컴컴해졌다.

이를 본 회주는 제때에 거산을 막을 방법이 없겠다 싶었는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거산들이 땅에 떨어지기 전 밖으로 피했다.

쿠우웅! 쿠웅! 쿠우우우웅!

다섯 개의 거산이 잇따라 땅에 박히면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지면이 심하게 흔들렸다. 사방에선 비참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마저도 곧 거산 아래에 파묻혀 버렸다.

골짜기 위 하늘로 피한 회주는 굳은 얼굴로 근처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회주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허공에는 청옥 비주(飛舟)가 한 척 떠 있었는데, 갑판에는 회백색 도포를 걸친 노도사와 청아한 외모의 소녀가 서 있었다.

바로 백석진인과 류낙아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회주가 묻자 낙아가 차갑게 대답했다.

“널 죽이러 온 사람이다.”

“아아, 알 것 같다. 바로 운호족(雲狐族) 계집이었군? 그래, 네가 그때 도망쳤던 꼬마 요호구나. 못 본 사이 벌써 결단기가 돼 있을 줄은 몰랐군.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청운구운호(青雲丘雲狐) 일족의 털가죽은 아주 훌륭한 방어 법보 재료거든. 덕분에 그때 큰돈을 벌었었지.”

회주의 미소를 본 낙아는 눈가가 벌게진 채 외쳤다.

“이 잔인한……! 가인(賈仁), 죽여 버리겠어!”

낙아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수결을 맺자 왼팔이 은빛으로 번쩍이더니 자그마한 은색 불덩어리가 방출됐다. 불덩어리는 빙글빙글 돌면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은빛 불새로 변해 회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회주는 낙아와 대화하는 동안 이미 의식을 펼쳐 사방을 살폈었지만 자신보다 강한 경지의 수사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불새를 보고도 조소하며 말했다.

“고작 결단기 주제에 감히 나한테 덤벼? 웃기는군!”

뒤이어 회주가 흑색 원환(圓環)을 내뿜자 원환은 곧 100장 가까이 되는 크기의 흑염괴수(黑焰怪獸)로 변했다.

사자와 호랑이를 반씩 닮은 이 괴수는 광포한 기세로 허공을 달려 나가 은빛 불새에게 달려들었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현저한 크기 차이가 더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불새와 괴수가 맞붙은 순간, 눈부신 은빛이 번쩍이면서 불새가 순식간에 흑염괴수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가 곧 몸통의 반대쪽을 뚫고 나왔다.

퍼퍼퍼어엉!

흑염괴수는 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폭발해 사라졌다.

회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신에 핏빛 갑옷을 형성한 채 체면이고 뭐고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빛 불새는 눈 깜짝할 사이에 회주의 바로 뒤까지 쫓아가 그의 몸마저 관통했다. 회주의 갑옷은 찰나조차 버티지 못했다.

“안……!”

회주는 비명조차 다 지르지 못하고 전신이 활활 타올라, 지니고 있던 법보들과 함께 재로 변해 버렸다.

이어서 불새는 하늘을 한 바퀴 돌더니 아래쪽 골짜기를 향해 은빛 화염을 내뿜었다.

작은 화염은 떨어지는 동안 마치 파도처럼 거대하게 커져서 골짜기 전체를 휩쓸었다.

활활 타오르는 골짜기를 바라보는 낙아의 두 눈이 흐릿해졌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언니……. 낙아가 드디어 원수를 갚았어요. 혈도회도 없앴고요. 이제 편히 쉬세요.’

백석진인은 낙아가 잠시 감정을 추스르도록 기다렸다 공수하며 말했다.

“류 수사, 복수에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리오!”

“다 지난 몇 해 동안 백석 수사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지요. 오라버니께서 꼭 기억해 두시겠다고 하셨어요.”

낙아가 눈물을 닦고는 예를 올리자 백석진인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한 선배님께서 분부하신 일이라면 전력을 다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소.”

* * *

그 시각, 영염산맥 출운봉.

어느 외진 동부 밀실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반짝였다.

밀실 가운데엔 꽤 커다란 모양의 백색 고치가 흰빛으로 반짝이는 가느다란 실로 촘촘하게 몇 겹이나 둘러싸여 있었다.

갑자기 진법 바닥의 성운 모양 문양이 한층 더 강하게 번쩍이며 눈부신 빛을 발산해 밀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고치를 감싼 실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으며, 곧이어 표면에서 수많은 백색 부적문들이 쏟아져 나와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다.

퍼어어억!

고치가 일순간 오그라들었다가 이내 터져 나갔다.

덮여 있던 고치가 사라지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하고 있던 청년의 모습의 드러났다.

웃옷을 벗고 있는 이 청년은 체격이 크고 평범한 외모를 가졌는데 전신이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백색 안개로 감싸여 있었다.

그는 바로 한립이었다.

한립이 번쩍 눈을 뜨자 놀라운 기운이 몸에서 방출돼 몸을 휘감고 있던 안개를 확 날려 버렸다.

한립의 가슴에서는 남색 빛점 다섯 개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각각의 빛 안에선 다시 기이한 부적문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또한 피부 아래의 근육과 뼈에도 역시나 수천수만의 별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은은한 별빛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회전하던 부적문들이 점차 옅어지면서 빛 역시 조금씩 사그라졌다. 한립은 감격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두 해 동안의 수련 끝에 마침내 다섯 번째 현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바로 소북두성원공의 제5단계를 완성했다는 의미였다.

이런 수련 속도는 공법에 설명돼 있던 것보다 백배 이상 빠른 것이었다. 게다가 온전치 못했던 육신도 방금 전 드디어 완벽하게 회복됐으며, 신혼(神魂) 역시 원래의 3분의 1까지 회복돼 있었다.

뒤이어 한립은 인삼 모양의 연한 푸른색 영초를 꺼내 삼켰는데 단전에 천천히 차오르는 법력을 느끼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한립은 장천병의 녹색 액체를 이용해 500~600년 묵은 것과 다름없는 운학초를 모았었다.

지금의 한립에게 있어서는 그 정도 묵은거면 충분했으며, 굳이 그보다 오래 묵은 운학초를 구해 봤자 낭비일 뿐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는 일만 년에 이르도록 운학초를 성숙시켜 복용해 보기도 했었지만, 역시나 원영기를 넘는 법력은 저절로 사라져 버려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았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