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461화 (1,218/2,000)

1461화. 장천병(掌天甁)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순식간에 이레가 지나갔다.

동부의 밀실.

한립은 여전히 진법의 첫 번째 문양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피부엔 어느새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고 각 근육과 뼈에도 점점의 별빛 같은 빛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중 가장 특이한 건 아랫배 부분에 피어난 푸른빛 점이었다. 그 남색 빛점은 꼭 살아있는 것처럼 팽창했다 수축하길 반복했으며 주위에 있던 성광지력까지 대부분 삼켜 버렸다.

한립의 얼굴은 고통스런 기색 없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한립 주위의 성광지력이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 위의 남색 빛점이 눈부신 광휘를 뿜으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는데 그 빛이 유난히 번쩍인 순간 신비한 부적문이 떠올랐다.

부적문은 역시나 뱅그르르 회전하다가 이내 한립의 체내로 들어갔다. 눈을 뜬 한립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강한 육신과 의식 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소북두성원공의 제1단계를 완전히 익힘으로써 첫 번째 현규를 성공적으로 응집해 낸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잠시도 쉬지 않고 수련을 이어 갔다.

또다시 며칠이 지나, 달은 밝고 별은 드문 어느 날 밤.

밀실 중앙에 앉아 있던 한립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갑자기 북두취원진의 운행을 멈췄다. 그러자 주위의 성광지력과 점점의 별빛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사라졌다.

한립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근처에 놔뒀던 작은 병을 주워 살펴보았다.

병목이 가느다란 형태의 이 병은 지금 병 전체가 녹색 빛으로 감싸여 있었으며 표면에는 고풍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황금색 기이한 기호가 몇 개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녹색 빛이 홀연히 병의 무늬에 스며들면서, 그와는 반대로 황금색 기호들은 병 위로 살짝 떠올랐다.

병을 흔들자 안쪽에서 누에콩만 한 크기의 액체 한 방울이 함께 흔들렸다. 한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요 며칠 한립은 수련할 때마다 이 작은 병을 근처 바닥에 뒀었는데, 어느 일정한 시점이 되면 병 표면에 옅은 흰빛이 일곤 했다.

그러고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백색 빛점들로 이뤄져 있는 그 빛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앞 다퉈 병 속으로 밀려들어 가곤 했었다.

다만 이런 기이한 현상은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니라 매일 밤 특정 시각이 지나면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흰빛이 병 속으로 모두 들어간 다음에는 이틀 건너 한 번씩 병 표면에 오늘처럼 녹색 빛이 떠올랐으며, 병 안에 녹색 액체가 한 방울 생겼던 것이다.

한립은 사랑하는 사람의 뺨을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로 작은 병 위의 잎사귀 모양 무늬를 살짝 문질렀다.

약간 도드라져 있는 무늬의 요철감이 느껴지자 한립의 마음이 잔잔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립은 마치 단번에 칠현문 신수곡의 그 작은 약밭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병에 든 녹색 액체를 사용해 보려는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그때 병 속의 액체가 약성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진정한 수도의 길을 가지도, 범인의 몸으로 승승장구하여 만인이 우러러보는 인족 제일 수사이자 모두가 부복하는 영계의 수장, 한 천존(天尊)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수행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후부터, 단 한 순간도 한립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그건 의심의 여지도 없이 바로 이 ‘장천(掌天)’이라는 이름의 작은 병이었다.

선계로 들어선 후, 한립은 해 도인과 서금충을 비롯해 이전에 의지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엔 줄곧 이 작은 병을 소중히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도 한립은 이 병을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놨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에 한립은 이 병에 대해 말로 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립이 갑자기 병을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마개를 열어 안쪽을 들여다봤다.

순간 한립의 표정이 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립은 마개를 닫은 후 곧바로 밀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동부 안 연단실.

한립은 장천병(掌天甁)의 마개를 다시 연 뒤 단로 옆 바닥에 내려놓고서 단로 아래의 진법을 격발시켜 맹렬한 불길을 일으켰다.

한참 후, 한립은 허공에다 하얀 손가락을 뻗어 단로에서부터 장천병 쪽으로 뭔가를 끌어당기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휘이익.

붉은 화염이 단로 아래에서 날아가 빙글빙글 돌더니 가느다랗게 변해 장천병 입구로 들어갔다.

화염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병 안쪽에서 갑자기 붉은빛이 번쩍이면서 병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환하게 비췄으며, 병 표면의 잎사귀 모양 무늬에서도 암홍색 빛이 새어 나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한립은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병 안의 붉은빛이 완전히 가라앉았으며 녹색 장천병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립은 꼭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병을 쳐다봤다.

시간이 흘러 일각 후, 한립은 다시 손을 뻗어 단로에서 아까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불길을 끌어당겨 장천병에 담았다.

그러자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병 안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다가 잠잠해졌지만, 이번 반짝임은 아까보다 좀 더 오래 지속되었다.

이를 본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계속해서 단로의 불을 작은 병으로 끌어들였고, 매번 시도할수록 간격도 좁아졌다. 예상했던 대로 병 속의 붉은 빛이 빛나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 * *

얼마가 지났을까.

한립은 다시 단로 불을 병으로 끌어당겨 붉은 빛을 일으켰는데 이번엔 일각이나 빛을 번쩍이고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립의 눈에 기대감이 스쳤다. 바로 그때, 맑은 울음소리가 울리면서 병 안에 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은빛은 빠른 속도로 모든 붉은빛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은색 빛 덩어리가 병 입구에서 휙 튀어나와 곧장 연단실 천장으로 돌진했다.

콰아앙!

은색 빛은 천장에 부딪쳤다가 아래로 조금씩 내려앉더니 곧 눈부신 은색 광휘를 내뿜어 연단실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은빛을 올려다보는 한립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가 곧 살짝 구겨졌다.

은빛 덩어리는 허공에서 몇 바퀴 돌다가 갑자기 줄어들어 조그만 은색 불새로 변하더니 두 날개를 펴 곧장 한립에게로 날아들었다.

때맞춰 한립이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불새는 손앞에서 날렵하게 멈춰 서더니, 그의 손 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쁨에 찬 울음소리를 냈다.

이 불새는 바로 정염지화(精炎之火)에 영성이 생겨 만들어진 정염화조(精炎火鳥)였던 것이다!

예전에 한립이 인계에 있을 때 건람빙염과 육익상공이 내뿜는 한기로 자라극화를 이뤄 냈었고, 이후엔 자라극화를 태음진화 속에 융합시켰었다.

그 뒤 영계에 다다른 다음에는 태음진화에 또 다른 화염을 대량으로 녹여 마침내 정염지화를 만들었다.

정염지화는 원래 각종 영염(靈焰)을 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 속성 영수에 대한 통제 효과도 뛰어나서 한립이 한때 영계를 종횡하는 데 큰 도움을 줬었다.

한립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생각들을 접고서 팔을 살짝 더 들었다. 그러자 정염화조가 얌전히 날개를 접고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립은 줄곧 정염지화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역시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까 밀실에서 수련하던 중, 줄곧 장천병 속에 잠들어 있던 정염지화와의 미약한 감응을 느꼈던 것이다.

이에 한립은 단로의 불을 끌어다 정염화조를 깨우기 위해 재빨리 연단실로 달려왔었는데, 다행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 단번에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염화조는 손가락 하나 정도의 높이도 되지 않았으며, 전심에서 느껴지는 불의 힘도 원래의 10분의 1에 불과할 만큼 약했다.

그런 정염화조의 모습에, 그간 애써 눌러 놨던 분노가 한층 더 커졌다.

정염화조가 이렇게 약해진 건 자신이 예전 실력과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와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한립은 자신을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자가 누구든, 반드시 그 이상을 갚아 주리라 맹세했다.

그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은빛 정염화조를 몸속으로 회수했다. 이렇게 체내에 두고 키워야 정염화조가 다시 얼마라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립은 다시 동부를 떠나 영전의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는 의식으로 사방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삼각 깃발을 잇달아 날려 그리 크지 않은 원형 구역을 만들었다.

한립이 나지막이 주문을 읊으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깃발에 옅은 자줏빛이 번뜩이더니 깃발 사이에 희미한 빛의 장막이 형성되어 안쪽의 원형 구역을 감쌌다.

이후 한립이 그 원형 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빛의 막에 떠올라 있던 자줏빛이 사라지면서 그곳은 어둠 속에 완전히 어우러졌으며, 한립의 모습도 완전히 가려주었다.

아마 누군가 이 근처를 지나가더라도 화신기에 이른 자가 아닌 이상 이곳의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비밀스런 장막 안에서 한립이 목갑 20여 개를 공중에 꺼낸 후 손짓으로 휙 뚜껑들을 열자 안에 담겨 있던 수십 뿌리의 영초들에서 은은한 약 향이 풍겨 나왔다.

영초들은 곧 하나씩 상자 밖으로 날아 나오더니 땅에 사뿐히 내려앉아 뿌리를 내렸다. 전부 평범한 인삼과 비슷한 모양의 백년 묵은 운학초(雲鶴草)였다.

요 며칠 한립은 몇 차례에 걸쳐 통역곡에 가서 그곳에서 유통되고 있는 운학초의 거의 대부분을 사들였다. 물론 남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자신의 경지는 감췄으며 외모도 바꿨었다.

한립은 땅 위의 백색 영초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품에서 녹색 장천병을 꺼냈다.

뒤이어 한립이 마개를 열고서 조심스럽게 병을 기울이자 녹색 액체가 병 입구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와 영초가 심어져 있는 땅 위로 떨어졌다.

액체가 영초 뿌리에 천천히 스며들자 한립은 옅게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장막을 나섰다.

* * *

계절의 변화 속에 2년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풍국 서북의 혈망산맥(血芒山脈)은 수천 리나 이어져 있을 만큼 거대했지만 이곳의 영기는 그리 짙지 않아서 황량한 민둥산만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사방에는 어두운 안개가 자욱했다.

산맥의 어느 암홍색 골짜기.

골짜기 형태를 따라 전각이며 누각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이따금 핏빛 도포를 입은 수사들 몇몇이 나직이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거나 바쁜 걸음으로 전각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골짜기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큰 대전에서는 퍽 위엄 있어 보이는 남색 도포 차림의 중년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왔다 갔다 하며 대전 안쪽의 거대한 석문을 바라보았다.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표면엔 선혈 같은 빛이 쉼 없이 맴돌고 있었다.

“큰형님께선 아직 출관 전이십니까?”

대전 문 밖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거한이 걸어 들어왔다.

“아마 곧 나오시겠지. 셋째야, 일은 어떻게 됐느냐?”

남색 도포 차림의 중년인이 다급히 물었다.

“이미 분타 아홉 곳의 수하들이 도착했고, 나머지 네 분타 사람들도 곧 올 겁니다. 밖에서 일을 보던 내당제자들까지 거의 다 소환하긴 했습니다만……. 둘째 형님, 혹시 우리가 너무 일을 크게 벌인 것 아닐까요?”

거한이 약간 주저하며 묻자 중년인이 한숨을 쉬며 반문했다.

“단 열흘 만에 분타 여섯 곳이 폐허가 됐고, 타주(舵主)까지 포함해 분타 내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셋째야, 우리만으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야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거래도 끊기고 큰 손해가 생기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큰형님께서 우릴 질책하실까 봐 그게 두려울 뿐입니다.”

거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나중엔 그 큰형님의 진노한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중년인 역시 조금 두려운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본회(本會)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게다.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평소 우리 앞에서 벌벌 기는 것처럼 행동하는 놈들도 실은 하나같이 우리 혈도회(血刀會)를 사지로 몰아넣을 궁리만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요족까지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한테 달려들 테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큰형님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다고요! 예전에 낭주제일가(朗州第一家) 가주(家主)가 감히 본회의 행사에 이러쿵저러쿵했다가 천삼백여 식솔 전부가 큰형님의 손에 하루아침에 몰살당하지 않았습니까. 범인들조차 예외가 되지 못했죠. 지금은 큰형님께서도 화신 중기에 들어서셨으니, 출관하시기만 하면 감히 본회의 분타를 공격한 그 괘씸한 놈을 천참만륙 (千斬萬戮)하실 것입니다!”

거한이 살기등등한 태도로 말했지만 중년인은 여전히 무겁게 대꾸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넌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한 달여 전에 석 당주가 호송해 오던 영묘족(影猫族) 여자를 강탈당하고 석 당주를 포함한 20여 명이 행방불명된 일이 있었다.

지금 보니 그때의 일이 최근 벌어진 일들과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큰 것 같구나. 너도 알다시피 석 당주는 우리랑 비슷한 원영 중기가 아니었느냐. 그런데 원영마저 탈출하지 못했다는 건 흉수가 보통 인물은 아니란 뜻일 테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흉수의 실력이 큰형님 못지않다는 거군요. 휴우……. 아무래도 이 일은 천귀종에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