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화. 유야무야(有耶無耶)
*
그날 오후.
성화봉 정상의 광활한 광장 위에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는데, 둔광이 걷히고 나자 머리에 문사 두건을 쓴 중년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중년 남자가 막 유삼 자락을 휘날리며 착지하자마자 뒤쪽에서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 형.”
유삼 차림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흑색 도포를 입은 도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카만 수염을 갖고 있는 도인은 한 걸음마다 족히 50장 거리를 뛰어넘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중년인 앞에 다다랐다.
“장(莊) 노제도 왔군. 같이 가세.”
중년인이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네자 검은 수염 도인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 멀리 하늘에서 빠르게 날아오는 빛줄기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제자들이 소집된 건 십여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 유삼 차림 중년인과 검은 수염 도인은 바로 출운봉과 낙하봉의 봉주인 남궁장산(南宮長山)과 장자유(莊自游)였다.
남궁장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게 다 장경각의 일 때문이 아니겠나. 아마 많은 자들이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네.”
“요 며칠 연단 때문에 바빠 제대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얼핏 듣기론 이번 일에 이상한 점이 좀 많다던데요. 그 도둑이 겹겹이 펼쳐져 있던 금제를 뚫고 내각에 잠입한 것만도 모자라, 마지막엔 호연(呼延) 장로께서 직접 출수했는데도 무사히 도망쳤다지 뭡니까.”
“그렇다네.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많지……. 뭐, 잠시 다들 모이고 나면 태상대장로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 않겠나.”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광장을 통과해 웅장한 기세의 주홍색 궁전 앞에 이르렀는데, 그때부터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단을 올라 대전으로 들어섰다.
대전 안쪽의 금과 옥으로 장식돼 있는 기둥에는 여러 진귀한 동물들이 조각돼 있었고, 단상 위에는 널찍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또한 그 아래로는 좌우로 한 줄씩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상석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왼쪽 의자엔 선홍색 도포를 입은 붉은 머리 거한이 앉아 있었다.
거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남궁장산과 장자유는 서로 흘긋 시선을 교환하더니 나란히 붙어 있는 자리를 골라 앉은 후 눈을 감고 회의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밖에서 계속해서 수사들이 들어왔고, 잠시 뒤에는 대전에 놓여 있는 의자들이 전부 채워졌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연허기 이상의 고수로 표정이 다들 썩 좋지 못했다. 기껏해야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할 뿐이었다.
대전 안의 빈자리가 모두 채워진 후, 얼마쯤 시간이 더 지나자 신형 두 개가 대전 내당 쪽에서 걸어 나왔다.
남궁장산과 장자유, 붉은 머리 거한까지 포함해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몸을 굽히며 말했다.
“태상대장로님과 장문인을 뵙습니다!”
앞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남자는 냉염노조의 화신과 대화했던 인물로 바로 냉염종의 유일한 태상대장로인 대승기 수사 사마경명(司馬鏡明)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꽤나 엄격해 보이는 또 다른 남자는 장문인인 유경죽(劉敬竹)이었다.
상석 앞까지 다다른 사마경명은 자리에 앉는 대신 단상 아래쪽의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런 그의 존재만으로도 수사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져 저마다 고개를 떨어뜨렸으며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한참 뒤, 사마경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천부당과 장경각에 잇따라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는 건 다들 알 것이오. 오늘 여러 봉주들을 모이라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위엄이 담겨 있었다. 대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가슴을 졸이며 태상대장로의 문책을 기다렸다.
하지만 사마경명은 추호도 이의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뜻밖의 말을 뱉었다.
“이 일은 이만 묻어 두고 모든 추적을 중단하도록 하시오. 더는 침입자를 찾을 필요 없소.”
대전 안 수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지만 감히 질문을 던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마 사형, 하지만 장경각에 도둑이 든 건 보통 중한 일이 아닌데 어찌…….”
가장 앞쪽에 서 있던 붉은 머리 거한이 결국 침묵을 깨고 나섰다. 그러나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사마경명이 차갑게 말했다.
“호연 사제, 내가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해야 하는 게냐?”
사마경명은 얼떨떨한 표정의 붉은 머리 거한과 봉주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돌아서서 내당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장문인 유경죽도 입을 열었다.
“산회(散會).”
유경죽은 단 두 글자만 뱉은 후 역시나 휭하니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대전 밖 광장.
“추적을 중단하라니? 장경각의 그 많은 옥간들을 잃어버렸는데 이렇게 끝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장자유가 아직도 당황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듯 남궁장산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 옥간을 잃어버린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 복제해 놓은 게 남아 있으니 말이네. 하지만 만약 그 비급들이 외부에 전해진다면…….
후우우……. 어쨌든 태상대장로께서 그 같은 결정을 내리신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니 허튼 추측은 하지 말게나.”
남궁장산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지만, 그 역시 가슴속엔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냉염종의 중요한 곳에 도둑이 들었는데도 갑자기 모든 추적이 중단됐다는 소식이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퍼졌다.
모두가 수군거렸지만 봉주들이 더 이상 길게 얘기하지 않고 함구해 버렸기 때문에, 종문 전체를 뒤흔든 사건은 이렇게 흐지부지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이 소동의 주인공인 한립은 이런 일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동부에만 틀어박혀 소북두성원공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공법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현묘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한립의 가슴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한립은 수도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적잖은 체련 공법을 접했었지만 그 전부가 근육, 뼈, 혹은 그가 익혔던 오장단원공처럼 오장육부를 단련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소북두성원공은 그런 공법들과는 완전히 달리 ‘현규(玄竅)’를 개발하는 공법이었다.
그럼 현규란 무엇일까?
한립 역시 이에 대해선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소북두성원공이 담겨 있던 옥간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옥간에 묘사되어 있는 수련 과정은 한립조차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맨 후에야 그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신비했다.
어쨌든 이 공법을 제대로 수련해 내기만 한다면 주먹의 힘만으로 공간을 깰 수 있고, 일반적인 선인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점도 적지 않았는데, 첫째는 수련 과정이 웬만큼 의지가 강하지 않고는 끝까지 버티지 못할 만큼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또한 성광지력을 끌어들이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별과의 거리가 워낙 멀기 때문에 이 공법을 수련하는 데엔 엄청나게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립은 이 모든 단점들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듯 즉시 수련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선계에서 전해진 이 공법을 수련하면 이후 심신과 법력이 회복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한립은 우선 동부 밖으로 나가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부터 동부의 모든 금제를 발동시키고 적당한 밀실을 골라 천장에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는 곧장 수련을 시작했다.
* * *
며칠 후, 깊은 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둥근 달이 뭇별 가운데 걸려 있었고, 이따금 유성이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져 사라지곤 했다.
한립은 동부 밀실 안에서 두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밀실 천장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통해 쏟아져 내린 별빛에 온몸이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바닥엔 7개의 큰 별 문양으로 구성돼 있는 진법이 새겨져 있었는데, 커다란 별 문양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북두칠성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진법의 이름은 ‘북두취원진(北斗聚元陣)’으로, 소북두성원공(小北斗星元功)에 기록돼 있던 것이 아니라 한립이 요 며칠 별을 관찰해 기존에 갖고 있던 진법에 결합시켜 또 다른 진법을 개조, 발전시켜 만든 것이었다.
각 별의 성광지력은 서로 비슷할 것 같았지만 실제론 어떤 별의 힘은 음랭(陰冷)했으며 어떤 건 극양(極陽)의 기운을 띠고 있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성광지력은 음과 양의 기운이 번갈아 나타나기도 했다.
그중 소북두성원공을 수련할 때 필요한 건 북두칠성의 힘이었는데 북두칠성의 운행은 그를 바탕으로 음양과 사시(四时)가 나뉘고, 오행이 고르게 되는 등 그 질서가 무척이나 현묘하고 변화무쌍했다.
북두취원진은 한립이 이러한 북두칠성의 특징을 살려 만든 것으로 그 칠성의 성광지력을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립이 앉아 있는 자리는 바로 진법의 일곱 별 중 첫 번째 별이 그려져 있는 자리였다.
한립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법결을 운용했다.
우우우웅.
진동 소리와 함께 아래쪽 진법이 운행되기 시작하자 일곱 개의 큰 별들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특히 그중에서 첫 번째 별이 더 찬란히 빛났고, 진법의 빛이 위로 떠올라 사방을 가득 메우며 무수한 별들의 형상을 어렴풋이 만들었다.
한립은 이 별의 바다 속에 잠긴 채 주문을 읊으며 열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여 소북두성원공의 법결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한립의 미간에 은은한 빛이 번쩍이더니 의식의 힘이 빠져나와 그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뒤이어 한립이 수결을 바꾸자 소용돌이가 쫙 펼쳐지면서 성운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었으며, 곧 성운 속에 아래쪽 진법과 대응되는 북두칠성도(北斗七星圖)가 나타났다.
한립은 밀실 위 구멍을 통해 밤의 장막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7개의 별을 올려다보다가 첫 번째 천추성(天樞星)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기묘한 주문을 읊었다.
파아아아앗!
원래도 반짝이던 천추성이 살짝 더 밝아진 순간, 웅혼한 성광지력이 위에서부터 마치 은빛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와 밀실 구멍 아래의 한립을 덮쳤다.
한립의 얼굴에는 내내 긴장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늘의 성광지력을 끌어들이는 힘은 의식의 강함에 달려 있었는데, 현재 한립의 의식은 일반 선인(仙人)과 대등한 수준이었으므로 이 공법을 수련하기 위한 기초는 충분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한립은 새로운 수결을 맺으며 공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주위의 성광지력이 갑자기 요동치면서 바늘처럼 가느다란 무수한 빛이 실처럼 변하더니 의식의 인도 아래 날카롭게 한립의 몸에 파고들었다.
한립은 몸을 떨며 살짝 찌푸린 얼굴로 숨을 들이마셨다.
광사(光絲)들이 완전히 실체를 갖추고서 진짜 바늘처럼 피부를 뚫고 체내로 파고든 탓에 수천수만 자루의 검이 몸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지금 한립의 온몸에 빼곡하게 바늘구멍 같은 미세한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선혈이 그 속에서부터 배어 나와 곧 그의 몸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더 끔찍한 건, 그 광사들이 몸속에 들어온 뒤로도 계속해서 몸 곳곳을 휘젓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육신이 조금만 더 약했어도 한립 역시 견디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후, 구겨졌던 한립의 미간이 점점 펴졌다. 광사들이 점차 분해되어 다시 가장 정순한 성광지력으로 바뀌더니 이내 전신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한립은 뛸 듯이 기뻐하다가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전력으로 운공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보다 더 많은 성광지력이 하늘에서 내려와 한립의 몸을 찌르고 들어갔고 곧 공법의 인도에 따라 몸 안에 흘러 다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립의 육신은 원기를 보충할 수 없었지만, 이젠 정순한 성광지력을 접한 덕분에 그 즉시 기운을 빨아들여 손상됐던 부분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성광지력이 형상화된 광사가 살에 박히면서 생겼던 작은 구멍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한립은 수천 개의 검이 몸속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마저 잊어버린 채 수련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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