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9화. 뜻밖의 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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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옥간에 기록된 공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너 번이나 자세히 읽어 봤고 심지어 직접 수련해 보기까지 했지만 결국엔 아무런 특별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했던 건가…….”
이번에 한립은 의식으로 옥간을 완전히 감싼 뒤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펴봤다.
그런데 그때, 옥간 표면에 다시 별빛이 떠오르나 싶더니 강한 흡입력이 발생해 한립의 의식을 삼켰다. 그러자 곧이어 옥간 위로 모래 알갱이 같은 금빛이 한 개 떠올랐다.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일단 의식을 회수하지 않고 놔뒀다.
시간이 지나자 옥간은 마치 밑 빠진 독처럼 의식의 힘을 거의 5분의 1가량이나 삼켰고 아까의 금빛은 누에콩만 한 크기로 커졌다.
영환계에서 깨어난 뒤 살펴본 의식의 수준은 절정기 때의 1성 정도에 불과했지만, 한립이 익힌 수련 공법 덕분에 그 정도면 웬만한 일반적인 선인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의식의 힘을 소모하고 나면 회복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릴 테지만,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결국 계속해서 옥간이 자신의 의식을 삼키도록 했다.
잠시 후.
콩만 하던 옥간 위의 금빛이 점점 더 커지더니 곧 옥간 표면을 가득 덮었다. 그리고는 저절로 일렁거리다가 마지막엔 북두칠성 문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의식을 빨아들이던 흡입력도 뚝 끊겼다.
한립은 나직이 긴 숨을 내뱉고는 흥분에 찬 얼굴로 옥간을 살펴봤다.
다시 한 번 의식을 침투시켜 확인한 옥간 속에는 원래의 노란색 작은 글자들 대신 황금빛 글자들이 생성돼 있었다.
일각이 지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든 한립의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옥간에 기록돼 있는 건 ‘소북두성원공(小北斗星元功)’이라는 체련 공법이었다.
냉염노조가 옥간 속에 남긴 정보에 의하면, 이는 영환계가 아니라 정통 선계 공법으로서 노조가 비승한 후 특별히 하계로 전한 것이었다.
이 공법이 특별한 건, 이를 수련할 땐 천지영기가 아니라 별빛의 힘을 체내에 응집시킴으로써 육신을 단련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공법은 총 일곱 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 단계씩 완성할 때마다 하나의 현규(玄竅)를 맺을 수 있었으며 일곱 단계를 모두 익히면 현규 일곱 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극의를 이루게 되면 비로소 현선(玄仙)이 되는 것이다.
한립은 지금 원영이 이상하게 변한 탓에 천지영기를 이용해 수련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성광지력(星光之力)이라면 한번 시도해 볼 만했다.
그러나 냉염노조는 마지막에 신신당부하기를, 성광지력으로 육신을 단련하면 별빛이 칼날처럼 몸을 찔러 대는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더구나 이 공법은 정통 공법이 아니어서 육신을 대폭 강화시킬 수는 있지만 법력 수준을 높여 주지는 못하며, 대성한 후 걷게 되는 현선의 길은 일반 선인의 길보다 훨씬 더 힘들 거라고 했다.
특히 이 공법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육신이 일정 정도 이상 강인해야 하며, 또 성광지력을 육신으로 끌어올 수 있을 만큼 강한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냉염노조는 이 공법을 전할 때, 충분한 수준의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공법을 볼 수 있도록 옥간에 특수 금제를 걸어놨던 것이었다.
한립은 이제야 자신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꼭 날 위해 만들어진 공법 같군.’
수련에 고통이 따를 거라는 설명을 보고도 한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한립이 기쁨에 취해 있던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옥간이 갑자기 쪼개지더니 눈부신 금빛 기운이 나타났다.
한립이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이 금빛이 허공에서 저절로 일그러지더니 장대한 체격의 중년 남자로 변했다.
남자는 반듯한 얼굴에, 뺨에 난 구불구불한 수염 때문에 꽤 기백이 있어 보였다.
한립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눈앞에 나타난 자는 분명 냉염종에 온 뒤 화상으로 본 적 있는 자였다. 이 중년인이 바로 그 유명한 냉염노조였던 것이다!
“하하하! 아주 훌륭하군! 내 심혈이 헛되지 않았구나. 드디어 금제를 푼 자가 나타났어! 하하! 넌 어느 봉(峰) 제자냐? 이름이 뭐지?”
냉염노조가 한립을 보고 활짝 웃으며 물었다.
“그게…….”
한립은 일단 어떻게든 잘 얼버무려 이 상황만이라도 넘기고 싶었다.
눈앞의 신형은 냉염노조가 남겨 놓은 의식으로 형성된 분신이었지만, 분신임에도 적잖은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이런!”
하지만 한립이 말을 잇기도 전에 냉염노조가 차가운 눈으로 한립을 훑어보며 물었다.
“어찌 네 몸에선 본 종 공법의 기운이 한 올도 느껴지지 않는 거지? 설마 내문 적전제자(嫡傳弟子)가 아니었던 게냐?”
“송구하오나 속하는 이제 막 입문한 객경장로인지라 아직 종문의 공법을 수련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객경장로라고? 일개 외문 장로가 어떻게 소북두성원공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이냐!”
냉염노조의 매서운 질문에 한립이 순간적으로 우물쭈물하는 사이, 노조의 시선이 한립 앞에 소복이 쌓여 있는 옥간 가루로 향했다.
냉염노조의 시선을 느낀 한립은 겉으론 담담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작은 한숨을 뱉고 있었다.
‘망했군.’
냉염노조는 금색 빛줄기를 방출해 한립 앞에 쌓여 있는 가루를 자신의 눈앞까지 감아올려 살피더니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것들은 모두 본 종의 비전 공법이 담긴 옥간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네놈이 이걸 갖고 있는 거지? 설마 장경각 내각에 잠입해 훔쳐 내기라도 한 것이냐?”
옥간들은 이미 가루가 됐지만 냉염노조 정도의 고수라면 조금 남은 흔적만으로도 원래 담겨 있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냉염 수사, 일단 노기를 좀 거두십시오. 이 일에 대해선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곤란한 표정으로 냉염노조의 행동을 지켜보던 한립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건방진 놈! 감히 노부와 같은 배분인 듯 굴다니!”
노호하는 냉염노조의 미간에 금빛이 일더니, 곧 물결 같은 빛이 빙글빙글 회오리치며 뻗어 나가 거대한 황금색 꽃 환영을 만들어냈다.
이 꽃의 환영은 천천히 회전하며, 안쪽의 아직 덜 열린 꽃봉오리에서 반투명한 황금색 빛줄기가 방출돼 한립의 정수리로 날아갔다.
빛이 지나가자 허공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한립은 제자리에 선 채 살짝 고개만 들어, 똑같이 미간에서 빛을 일으켜 냉염노조의 공격에 응수했다.
파아아아앗!
가벼운 충돌음과 함께 사방으로 여파가 퍼져 나갔다. 냉염노조가 방출한 금색 빛줄기는 도끼에 찍힌 장작처럼 앞쪽부터 뒤쪽까지 쫙 쪼개졌으며, 주위의 파문 역시 흩어져 사라졌다.
한립은 냉염노조의 일격을 받아 내면서도 힘든 기색이라곤 없이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적선(謫仙)이십니까?”
냉염노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방금 전 일격은 비록 분신이 펼친 것이라 그의 전력이 담겨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승기 수사조차 가볍게 막긴 힘든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걸 원영기 수사가 막았다는 건 상대의 의식 경지가 냉염노조보다 결코 아래가 아님을 뜻했다.
“냉염 수사, 이제는 제 말씀을 좀 들어 보실 마음이 생겼는지요?”
한립이 담담하게 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얘기부터 들어 봅시다. 왜 이미 선업(仙業)을 이루고도 제가 하계로 전한 공법을 굳이 훔치셨는지 말입니다.”
냉염노조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쾌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전 어떤 이유로 인해 우연히 이 영환계에 떨어지게 됐을 뿐, 귀종(貴宗)에 악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몸이 온전치 않은 데다 마땅히 갖고 있는 단약도 없어서, 그 대신으로 뭔가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을까 하여 귀종의 비급을 뒤지게 됐던 겁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한 수사께서는 원래 선계의 어느 곳에 몸을 담으셨습니까?”
냉염노조의 질문 속엔 한립에 대한 의심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제가 귀종에 잠시라도 머무르며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이상, 절대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내력에 대해서도 수사 역시 굳이 궁금해 하실 까닭이 없지요.”
한립의 대답에 냉염노조는 못마땅한 듯 작게 혀를 찼다.
자신의 종문에 난데없이 선인이 들이닥쳤는데 어떻게 아무 질문도 하지 말란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밝히길 원하지 않는 한, 이곳에 남겨 놓은 분신만으로는 그의 입을 열 방법은 없었다.
“냉염 수사, 걱정 마십시오. 이렇게 수사의 신세를 지게 됐으니, 언젠가 냉염종에 변고가 생긴다면 저 역시 한 번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굳어 있던 냉염노조의 얼굴에 살짝 희색이 떠올랐다.
냉염노조는 이미 선계에 속한 몸이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성장시켰던 냉염종에 대해서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을 떠난 후까지 틈틈이 단약이며 공법 등을 전해 줄 이유도 없었다.
사실 냉염종이 영환계에서 제법 큰 세력을 갖고 있는 듯 보이긴 해도 근심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냉염노조가 선계에 머물고 있는 까닭에 돕고 싶어도 직접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진선인 한립이 대신 있어 준다면 자연히 큰 시름을 덜 수 있을 것이다.
* * *
이틀 후 냉염종, 성화봉(聖火峰) 뒷산.
안개가 자욱한 성화봉의 어느 죽림에 청기와와 흰 벽으로 이뤄진 사합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죽림의 자색 대나무들은 언뜻 어지럽게 자라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 안에 현묘한 이치를 담고 있었다.
즉, 이곳의 모든 대나무는 사전에 정해진 위치에 정확히 심어져 하나의 독특한 진법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대나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지화(地火)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폐화죽(肺火竹)으로 대나무 껍질에는 꼭 화염처럼 짙은 붉은색 무늬가 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죽해폐화대진(竹海肺火大陣) 덕분에 이곳이 영염산맥 전체를 통틀어 영기가 가장 짙고 지화의 힘이 최고로 집중된 구역이 될 수 있었는데, 그 고아한 느낌의 사합원은 이 대진의 진안(陣眼) 위에 위치해 있었다.
사합원 안채.
이곳에선 지금 자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가부좌한 채 눈을 감고 수련 중이었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남자의 긴 머리는 눈처럼 희었고 청수한 얼굴의 미간에는 불꽃 형태의 자색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청년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휘감고 있는 자색 기운에서는 놀랄 정도로 웅혼한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한편 근처에 있는 자단목 탁자 위 향로에서는 단향이 타오르며 푸른 연기를 피우고 있었고, 벽에는 중년 남자가 그려진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을 이루고 있는 선들은 섬세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넘쳤으며, 덕분에 족자 속 남자에게서는 꼭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졌다.
거친 선으로 그려진 남자의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났고, 볼에는 구불거리는 수염이 나 있었다. 또한 남자의 자세는 붓처럼 곧았으며 전신에서 당당한 기백이 넘치고 있었다.
가부좌하고 있던 남자가 문득 눈을 번쩍 뜨더니, 다소 의아한 눈으로 벽의 족자를 돌아봤다.
그때 족자 위에 기이한 파동이 일더니 출렁거리는 물결 속에서 그림 속 중년인이 마치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종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백발의 남자는 황망하게 바닥에 엎드리며 공손히 말했다.
“어르신의 강림을 봉영하옵니다.”
“일어나거라! 내 오늘 화신을 내려 보낸 것은 한 가지 당부할 일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림에서 나온 중년인, 냉염노조의 말에 백발 남자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 얌전히 냉염노조의 지시를 기다렸다.
“며칠 전 누군가 장경각에 잠입했던 일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백발 남자는 냉염노조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그가 막 변명하려던 순간 냉염노조의 말이 이어졌다.
“그 일은 그냥 묻어 두고 더 이상 추적하지 말거라.”
“예……?”
의아해하는 백발 남자를 향해 냉염노조가 계속해서 뭔가를 얘기했다.
냉염노조의 얘기가 이어짐에 따라 처음엔 멍해졌던 백발 남자의 얼굴에 곧 놀라움이 떠오르더니, 마지막엔 기쁨의 빛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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